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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2화 (62/1,108)

062화 정혼자를 찾아서

사남 백작이 웃으며 범한을 바라봤다. 그는 범한이 총명하기는 하지만 정치 투쟁에서는 경험이 부족하니 앞으로 천천히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생 말 위에서 보내신 폐하가 걱정하실 게 뭐가 있겠느냐. 다만 부자 사이가 틀어지는 걸 원치 않으니 이 일로 후당에 경고를 보내시는 거야."

‘후당? 아마도 황후, 황태자, 장 공주······ 그리고 재상을 말하는 거겠지.’

낯선 단어에 범한이 속으로 생각하며 계속 물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는 이 일을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으시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 이전에 말씀하셨듯이 황궁의 금고의 사업을 감찰원이 관리하면 될 텐데 왜 저를 선택하신 건가요?"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이지."

범한을 바라보는 사남 백작의 눈빛은 아주 먼 곳에 있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선택해 달라고 건의했기 때문이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남 백작이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 그가 돌려서 물었다.

"그럼 진평평 원장을 왜 반대하신 건가요?"

"진평평 원장은 네가 다른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래서 폐하께 너를 선택하지 말라고 건의한 거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감찰원 원장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범한은 감찰원 입구에 세워진 비석을 떠올렸다. 그가 사남 백작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감찰원 입구에······."

"네 어머니의 이름이 새겨져 있냐고? 원래 경국에는 감찰원이 없었단다. 네 어머니가 감찰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사남 백작이 말을 끌면서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서 경국에 감찰원이 생겼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범한은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너무 놀란 그는 한동안 입을 쩍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사남 백작의 말은 마치 이전 세계에서 들었던 ‘하느님이 빛이 있으라 말하니 빛이 생겼다’라는 말처럼 경건하게 들렸다.

범한은 사남 백작과의 대화를 통해서 비로소 당시 섭가가 얼마나 무서운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과거 섭가는 경국이 정벌 활동을 하다가 재정 위기에 빠졌을 때 쓰러질 위기에 있던 조정을 장악했고, 이후 황제가 경국의 힘을 ‘단결’하는 데 사용하는 감찰원을 설립했다. 더구나 감찰원이 설립될 때 사용된 막대한 비용도 모두 섭가에서 지원했다. 그러니까 현재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감찰원은 그의 어머니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었다.

범한은 비로소 감찰원 입구 비석에 섭경미라는 이름이 새겨진 이유와 감찰원 원장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한동안 멍하니 사남 백작을 바라보던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아버지, 제가 묻는 말에 화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언제 너에게 화낸 적 있니?"

사남 백작은 아들이 뭘 물을지 알고 있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범한은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다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말 궁금한 것이 있는데······ 어머니와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건가요?"

"하하하, 네 어머니의 이름이나 잊어버리지 말거라."

사남 백작은 오랫동안 즐겁게 웃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웃고는 손을 내저어 범한을 서재에서 내쫓았다.

정원으로 나온 범한은 사남 백작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이해한 표정을 지었다.

사남 백작은 섭경미란 이름에서 업신여긴다는 의미인 경(輕)과 남자의 수염을 뜻하는 미(眉)를 통해 그의 어머니가 천하의 남자들을 모두 업신여기는 여인이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려 준 것이었다.

* * *

"아버지께 많이 혼났나요?"

범약약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범한을 보았다. 사실 범약약과 범한은 긴 속눈썹과 백옥처럼 흰 피부 말고는 닮은 구석이 없었다.

범한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혼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건 생각을 교류하는 거야. 부모는 자식과 대화하며 생각을 교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식으로서는 힘든 게 사실이지. 갑자기 억지로 가까워지려 하는 게 혈기왕성한 자식에게 반감을 준다는 건 모르시는 것 같아."

방금 사남 백작과의 대화에 대해 말하면서 응접실을 지나던 범한의 눈에 유씨 부인에게 훈계를 듣는 범사철이 보였다. 범사철은 훈계가 듣기 싫은지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범한이 다가오는 걸 본 부인이 말을 멈췄다. 범한은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이 능청맞은 표정을 지으며 범사철을 데리고 갔다.

뒤따르던 범약약이 한숨을 쉬며 낮에 있었던 소송에 관해 물었다.

"오라버니가 이전에 자신이 원치 않은 일을 하려면 명확하고 강력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오늘 소송에도 이유가 있는 거지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범약약이 곰곰이 생각하다 다시 물었다.

"원하는 결과는 얻었나요?"

굳이 곽보곤을 때린 이유를 묻지 않는 범약약을 향해 범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지. 최소한 아버지가 어느 편에 서고 싶어 하시는지 알았고, 또 조정에서 백작가의 영향력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크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까. 다만 네가 생각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다른 결과를 얻지 못했어. 내가 모기로 변해서 몰래 황궁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을 것 같아."

그러자 범약약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가장 큰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셈이네요."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그놈을 때려서 경도의 물이 얼마나 깊은지 알게 된 것만으로 만족해."

"저기, 뭐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범사철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범약약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계척을 꺼내 들더니 범사철에게 말했다.

"못 알아들었으면 맞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앞으로는 형님이라는 호칭을 쓰도록 해,"

"알았어요."

범사철은 나이는 어리지만 악덕 상인이 될 자질을 타고났기에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참지를 못했다. 범한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범사철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어제 수정한 계획서를 보니 영리한 것 같은데 왜 나와 누이가 하는 대화는 알아듣지 못하는 거야?"

범사철이 울컥했다.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니까······. 하지만 마지막 말은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곽보곤이 지난번 식당에서 무시해서 저기······ 아니 형님이 기회를 엿보다가 어젯밤에 때렸다는 거 아니에요? 앞으로 그런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저도 데리고 가요."

범한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범사철이 길거리 불량배가 되고 싶어 하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두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두 사람 사이에서 이야기를 듣는 범사철을 피하지 않는 건 범한의 결정 때문이었다. 범한은 소통 부족으로 갈등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 유씨 부인에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리고 싶었다. 그러니 범사철은 두 사람을 이어 주는 매개체인 셈이다.

또 한편으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해서 고집불통인 범사철을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범한은 분위기를 통해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범사철이 자러 갈 때까지 기다린 범한이 고개를 돌려 누이에게 물었다.

"약속은 잡았어?"

범약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어쩌실 거예요? 오라버니가 정혼자를 만나기 위해 이런 일을 꾸민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비웃음을 당할 거예요. 그리고 많은 사람이 안 좋게 생각할 거고요."

"상관없어."

범한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 일은 이미 정해진 거야."

* * *

이른 아침, 경도 수비대장 섭중 저택의 마차가 백작가 앞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섭령아가 초조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펴보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잠시 뒤 범약약이 누르스름한 얼굴빛에 등이 굽은 젊은 남자를 데리고 저택에서 나왔다. 섭령아가 반가워하며 둘을 맞이했다. 그러고는 예를 갖춰 인사한 뒤 범약약에게 말했다.

"고생했어."

섭령아는 몸을 돌려 등이 굽은 젊은 남자를 바라보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비개 대인의 제자라고요?"

젊은 남자가 웃자 누르스름한 얼굴에 주름이 지는 것이 한눈에 보기에도 정상은 아닌 모습이었다. 그가 두 손을 맞잡아 인사하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섭령아가 말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젊은 의원이 웃으며 예의를 갖춰 답했다.

"환자를 보는 게 급하니 얼른 가죠."

섭령아와 범약약이 앞 마차에 타고 젊은 의원은 뒤 마차에 탔다. 경도의 다른 마차들과 다르게 널찍한 마차 안에는 아무런 장식도 되어 있지 않았다. 전쟁터를 누비는 무인 집안답게 소박한 모습이었다.

뒤 마차에 탄 젊은 의원은 당연하게도 범한이었다. 이른 아침 범약약의 도움을 받아 어린 시절 비개에게 배웠던 방법으로 위장을 한 범한은 상당히 그럴싸했다.

그는 자신이 경도에서 이미 약간의 명성을 얻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임씨 아가씨와 섭령아를 만날 기회가 없자 이런 일을 꾸민 것이었다. 곧 있으면 임씨 아가씨를 만날 거라는 생각에 범한은 가슴이 두근두근 떨렸다.

사실 현재 자신의 정혼자는 임씨 아가씨이지만 범한의 마음은 하얀 옷을 입은 여인에게 가 있었다. 명문가 출신이 분명한 그 여인을 첩으로 들이는 건 불가능할 테니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마차가 움직일수록 범한은 더 긴장되었다. 마차가 움직이는 방향이 황가 별궁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곳에 임씨 아가씨가 있었다. 의원으로 변장한 채 자신의 정혼자가 사는 곳으로 가는 건 정말이지 황당한 일었다.

하지만 평생 살을 맞대고 살 상대인 이상 혼인 전에 반드시 만나 봐야 했다. 그는 정혼자가 얼마나 귀엽고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생겼는지 보고 싶었다.

앞 마차에 탄 섭령아가 약간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고생했어. 그런데 저분, 정말 비개 선생 제자 맞아? 너무 젊어 보이던데."

범약약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어쨌든 비개 대인의 의술이 황궁의 어의보다 좋은 건 사실이잖아. 비개 대인과 우리 집안의 인연을 생각해서 저분이 특별히 봐주시는 거야."

섭령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의들이 임씨 아가씨의 폐병을 고칠 방법을 찾지 못하자 황실에서도 비개를 찾았다. 하지만 외부 감찰을 나간 비개가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아 답답해하던 차였다. 그러니 이렇게 제자라도 찾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섭령아가 한동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약약, 너희 오라버니가 어제 소송을 했다고 들었어."

범약약이 속으로 ‘지금 그걸 왜 묻는 거야?’라고 생각하면서도 웃으며 말했다.

"우리 오라버니가 모함받은 일 말이야?"

섭령아가 한숨을 쉬었다.

"너를 봐서 이야기를 안 하려고 했는데 이건 정말 아니야. 사내대장부가 돼서는 어른들이 하는 일에 찍소리도 못 하면서 그런 일을 벌인 걸 보면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 같아."

범약약은 만일 이번 혼인이 취소된다면 누가 더 좋아할까 생각하다 웃었다.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하지만 너희 오라버니는 제멋대로 하는 사람이잖아? 임씨 아가씨와 혼인을 앞두고는 세상에, 기생집을 드나들지 않나. 그럼 임씨 아가씨 체면은 뭐가 되니?"

섭령아가 최근에 들은 소문을 생각하고는 씩씩거렸다.

"길거리에서 사람을 폭행하기까지 하고. 정말 성품이······. 약약, 내 말에 화내지 마. 만약 너라면 그런 사람과 혼인하고 싶겠어?"

범약약이 한숨을 쉬며 속으로 ‘싫을 게 뭐가 있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화제를 바꿨다.

"소문만 듣고 함부로 판단하지 마. 그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호색꾼은 아니니까."

섭령아가 비웃었다.

"아니라고? 어제 일은 알고 말하는 거지? 경도 사람들이 너희 오라버니를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뭐라고 부르는데?"

범약약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는 정말이지 경도 사람들이 자신의 오라버니를 어떻게 부르는지 궁금했다.

"그러니까······ 백작가의 검은 주먹이라고 불러!"

섭량아가 씩씩거렸다.

"너도 다른 사람들이 너희 오라버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 해."

범약약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거 말고 다른 별명도 있어?"

"뭐라고?"

"황태후께서 오라버니를 만 리 쓸쓸한 가을에 나그네가 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며? 만 리 쓸쓸한 가을에 나그네 되는 사람은 그건 별명으로 하기에는 너무 긴가?"

범약약은 범한이 주먹질을 잘할 뿐만 아니라 시도 잘 쓴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그 사실을 아는 섭령아가 흥, 콧방귀를 뀌고는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황태후가 범한의 시를 칭찬한 것은 사실이었다.

두 대의 마차가 별궁에 가까워지자 황궁 호위병들이 보였다. 호위병들은 모두 뽑기 편한 단도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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