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화 따귀
정탁과 함께 경도부를 나오던 범한은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송세인을 발견했다.
"범 공자."
송세인이 웃으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범한은 상대방이 무슨 의도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예를 갖춰 인사했다.
송세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상서가에 은혜를 입은 게 있어 오늘은 부득불 기분을 상하게 해드렸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리리는 정말 경도를 떠났습니까?"
송세인은 공당에 있었을 때와는 다르게 공손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자 범한이 그의 두 눈을 노려보며 물었다.
"선생께서 하신 일입니까, 아니면 상서가에서 한 일입니까?"
송세인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공자께서 사리리를 경도에서 쫓아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어젯밤에 정말 취선거에 계셨던 겁니까?"
범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제가 정말 곽 공자를 때렸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이것으로 소송은 일단락되었다.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은 뒤 송세인이 몸을 돌려 떠나자 범한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물었다.
"이미 미움을 받았는데 무엇 하러 제게 용서를 구한 걸까요?"
"송세인은 영리한 사람입니다."
정탁이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어째서 저에게 어젯밤 정왕 세자와 취선거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하마터면 놀라 자빠질 뻔했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될 줄 몰라서 말씀을 안 드렸습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되든 도련님은 이제 상서가의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미움이야 받으면 그만이죠."
"도련님이······ 화류계와 문예계에서 동시에 이름을 날리셨으니······ 오늘 안에 이 소식이 경도 전체에 퍼지겠군요."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대단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 * *
깊숙한 황궁의 황색 기와가 햇볕을 받아 금빛을 내뿜었다. 주변에는 붉은색 담이 위압감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 있었다.
황궁 후원에서 인자한 모습의 노부인이 눈을 반쯤 감고 옆에 궁녀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귀부인이 두 명 앉아 있었고, 중앙 탁자에는 기이한 과일과 채소들이 놓여 있었다. 그중 한 귀부인은 가늘고 길게 위로 째진 눈에 붉은 입술이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그녀가 과일을 깎아 조심히 노부인에게 먹여 주었다.
"황후가 이런 일까지 하나?"
노부인이 눈을 떠서 자신에게 과일을 먹여 주는 귀부인을 보고는 웃었다.
"이런 일은 저기 애들에게 시켜야지. 후궁을 통솔하는 천하의 어머니가 이런 일을 해서 되겠어?"
그러자 귀부인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저 효도하려는 것뿐입니다."
과일을 먹여 주는 귀부인은 현재 경국의 황후였고, 그녀가 시중을 드는 노부인은 황제의 생모이자 성왕의 아내인 황태후였다. 그리고 다른 귀부인은 어떤 신분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황후와 나란히 앉아 있는 걸 봐서는 신분이 높아 보였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다."
황태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궁녀들에게 지시했다.
"너희들을 이만 물러가거라."
궁녀들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황태후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백작가 아들이 쓴 시를 어떻게 생각하니?"
황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문장을 잘 모르는 제가 들어도 좋았습니다."
황태후가 웃으며 말했다.
"좋기만 할까? 물고기의 마음이 부러워진다는 구절과 만 리 쓸쓸한 가을에는 언제나 나그네가 된다는 구절은 아무 서생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지. 다만······."
황태후가 말을 멈추자 황후가 물었다.
"다만 무엇입니까?"
황태후가 한숨을 쉬었다.
"다만 문장에 슬픔과 근심이 짙게 묻어 있으니 말이야. 어린 나이에 이렇게 어른스러운 문장을 쓰는 걸 보니 그 아이도 박복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또 다른 귀부인이 갑자기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후가 급히 위로하며 말했다.
"황태후께서는 그저 감상을 이야기하셨을 뿐입니다. 설마 범 공자가 정말 박복한 운명을 타고났으려고요.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황태후는 훌쩍이는 소리가 듣기 싫은 듯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자식을 셋을 낳았는데 하나는 황좌에 앉아 있으니 말할 필요가 없고, 이치는 지나치게 놀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즐겁게 살고 있으니 걱정이 없다. 그런데 저 계집애는 몇십 년 동안 울기만 하고 있으니 도대체 뭣 때문에 저렇게 우는지 정말······."
황태후는 평생 의지할 곳 없이 살아온 자신의 친딸에게 심한 말을 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귀부인이 엉엉 울면서 말했다.
"제 자식이 이미 박복한 운명을 타고났는데 황제인 오라버니께서 박복한 백작가 서자에게 시집보내려 하시니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신아의 병세가 좋아지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가녀린 어깨를 들썩이며 애달피 울고 있는 귀부인은 장차 범한의 장모가 될 장 공주였다.
그 모습을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황태후가 참지 못하고 야단을 쳤다.
"신아의 병의 근원은 어미인 네가 복을 주지 못해서야. 아직도 저렇게 복이 달아날 말만 하고 있으니! 백작가 아들이 어때서? 혼인하면 액막이를 해서 신아의 병세가 좋아질 수도 있는 거잖아. 그리고 사남 백작 범건이 황실과의 정을 생각해 담주에 있는 아들을 데려와 신아를 받아 주겠다고 했으면 잘된 거지. 명성도 능력도 없는 신아가 백작가에 시집가는 건 경사야."
일찌감치 뒤로 물러선 궁녀는 소리치는 황태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황태후가 답답해하며 가슴을 두드리자 황후가 급히 부축했다. 그러자 황태후가 황후의 손을 뿌리치고는 화를 누그러뜨렸다.
"신아의 신분에 조정 명신의 아들에게 시집을 갈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니니? 그 범······ 범, 뭐라고 그랬지?"
황후가 재빨리 대답했다.
"범한입니다."
"그래, 범한. 너도 들어 봤을 거 아니냐. 분명 능력이 많은 아이니 신아 배필로 손색이 없어."
황태후가 한참 씨근덕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폐하께서 추진하시는 일이니 나에게 와서 하소연하지 말거라.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겠니?"
장 공주는 선왕의 유일한 딸로 지금의 황제가 즉위한 뒤 장 공주로 봉해졌다. 장 공주는 성왕가에서나 황실에서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음에도 성격이 거만하기보다는 소심한 편이었다. 봄이든 가을이든 항상 우울해하면서 날아가는 나뭇잎을 보고도 눈물을 흘렸다. 물론 이런 모습을 아무한테나 노출하지는 않았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만 드러냈다.
장 공주가 원망하는 눈초리로 황태후를 바라보았다.
"황제 오라버니가 어느 집안 자제와 짝을 맺어 줘도 싫어요. 이건 분명 백작가와 재상 대인이······."
"너희들, 먼저 가보도록 해라."
장 공주의 말에 황태후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어두운 얼굴로 말하자 주변에 있던 궁녀들이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곧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장 공주의 얼굴에 붉은 손자국이 찍혔다. 그녀가 두려움 섞인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 황태후가 이를 갈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내 앞에서 그놈에 대해 언급하지 말거라! 너는 체면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우리 황실은 체면을 신경 써야 해! 그때 네가 그놈을 보호해 주지만 않았다면 내가 진작에 죽였을 거야! 그동안 그놈에게 신아를 보여 주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놈이 하는 짓을 방해하지도 않았어."
황태후가 서슬 퍼런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방금 황후에게 보였던 자상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그놈이 너와 혼인하고 싶어 했는데도 네가 그놈의 앞길을 막을까 봐 혼인하지 않은 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네가 바란 대로 나도 그놈의 앞길을 막지 않았고 이제 모든 관리의 우두머리가 되지 않았니. 네가 원하던 대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너와 그놈이 다시 연관되는 건 허락할 수 없어. 신아는 임씨 집안의 딸로 혼인하겠지만 그놈이 아비랍시고 나서는 꼴은 보지 않을 거야. 알겠니?"
눈물을 닦은 장 공주가 애써 웃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요."
황태후가 몸을 돌려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제께서 정무로 바쁘시니 이런 일은 황후가 신경을 써야 해. 우리 집안의 혼사인 만큼 신경을 써서 일을 준비해라. 그리고 황제께서 이미 신아를 백작가에 시집보내겠다고 결정하신 만큼 이것에 대해서는 더는 왈가불가하지 말거라."
"네, 알겠습니다."
방금 일로 놀란 황후가 겁먹은 표정으로 재빨리 대답했다.
"그리고 이 늙은이를 돌보는 데 신경 쓸 필요 없어. 시간이 나면 황제를 보필해 근심을 덜어 주도록 해."
황태후가 온화한 목소리로 황후를 격려했다.
그러자 황후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이 든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황태후는 황후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짐작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봐라."
황후가 눈물을 닦고 있는 장 공주를 슬쩍 바라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홍 태감이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해 왔는데 오늘 경도부 관아에서 재판이 열린답니다."
"뭐라고? 무슨 재판인데? 재미있겠는데 얼른 말해 봐라."
황후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경도 사람들 모두 재미있어하는 사건이라 합니다. 이 사건 때문에 새벽부터 경도부가 시끄러웠는데 이제야 끝이 나서······. 제가 들은 바로는 예부 상서 곽유지의 독자 곽보곤이 어젯밤에 백작가 자제가 자신을 폭행했다며 고소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시를 하나 읊었는데 그 시가 황태후께서도 보셨던······."
"뭐라고?"
황태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만 리 쓸쓸한 가을에 나그네가 되는 사람이 곽보곤을 때렸단 말이야?"
그 말에 황후가 입을 가리고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옆에서 울고 있던 장 공주도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정말 말을 재미있게 하세요."
황태후도 웃었다.
"내가 재미있는 게 아니라 범한이 재미있는 거지. 경도에 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상서 대인의 아들을 때리니. 재판이 어떻게 되었는지 빨리 말해 봐라."
대답을 독촉하던 황태후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경도부에서 고문을 사용하지는 않겠지? 몸이 상하면 10월에 혼인하기 힘들 텐데."
그러자 황후가 피식 웃었다.
"황태후께서는 걱정이 지나치십니다. 비록 범한이 적자는 아니지만 어찌 됐든 사남 백작의 혈육이 아닙니까. 게다가 시문을 짓는 재능도 보통이 아니고요. 일찌감치 수재가 되어서 고문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합니다."
"그럼 다행이군."
황태후가 안심했다.
"범한에게 맞았다고 하는 곽보곤은 매일 황태자와 같이 지내는 사람 아니니?"
그 말에 황후가 순간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황태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놈은 승건이에게 매일 사냥이나 노는 방법만 가르치는 음흉스러운 놈이 아니냐. 더 말할 것도 없다. 범한이 그놈을 때린 건 잘한 거야. 내 속이 다 시원하네."
그 말을 들은 장 공주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복잡해졌다. 황태후가 백작가 서자가 곽보곤을 때린 걸 잘했다고 말하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방금 뺨을 맞아서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행히 황후가 장 공주를 대신해서 물었다.
"나라의 인재로 알려진 곽 편찬이 길거리에서 구타를 당한 건 쉽게 간과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황태후는 황후의 말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가벼운 목소리로 화제를 바꿔 물었다.
"재판 결과는 어떻게 되었니?"
"범한이 정왕 세자를 증인으로 세워서 경도부에서도 계속 재판을 진행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판을 일단 미뤄 둔 상태입니다."
"홍성이를 증인으로 세웠다고? 사람 사귀는 재주도 있나 보군."
황태후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하자 황후는 속으로 기뻐했다. 황태후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 백관들과 황족들이 긴밀한 관계를 맺는 걸 가장 싫어했다. 황후가 황태후의 기분을 살피며 말했다.
"곽 편찬이 구타를 당한 어젯밤, 범 공자가 세자와 함께 유정강에······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이 사건과는 관련이 없을 것입니다."
순간 황궁 후원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황태후가 일어나며 말했다.
"좀 피곤하구나."
밖에 있던 궁녀들이 급히 달려와 황태후를 부축했다. 황태후의 여가가 천천히 떠나는 걸 보며 황후와 장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눈을 마주쳤다. 황후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황태후께서는 범 공자가 기생집에서 놀았다는 게 못마땅하신가 봅니다. 6개월 뒤에 신아와 혼인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군요."
그러자 장 공주가 한숨을 쉬었다.
"제가 걱정되는 건 범한의 인품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강가 수양버들처럼 유약한 눈빛으로 황후를 슬쩍 보고는 가볍게 말했다.
"백작가와 정왕가의 사이가 좋으니 황후께서도 조심하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