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55화 (55/1,108)

055화 정왕

햇살이 강하게 내리쬈지만 나무 그늘에 있으니 쾌적했다. 조용한 정원에서 둥지로 돌아온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싱그러운 풀잎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재미없는 시 모임에서 벗어나 정원을 한가롭게 걸으며 기분이 좋아진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선녀를 만날 수는 없겠지?"

"누구십니까?"

그때 식물 사이에서 누군가가 불쑥 일어나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범한이 놀라 멍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봤다. 이렇게 가까워질 때까지 사람이 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만약 상대가 자객이었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제야 범한은 경도에 온 뒤로 자신의 경계심이 느슨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상대방을 바라봤다.

상대방은 황족도 아니었고 자신이 꿈에서도 잊지 못하는 하얀 옷을 입은 여인도 아니었다. 그냥 나이가 사오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평범한 농민이었다. 농민은 손에 호미를 든 채 놀란 눈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옆에는 바구니도 놓여 있었다. 아마도 범한의 용모를 보고 약간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손을 모아 인사했다.

"놀라셨나 보군요. 오늘 정왕가 시 모임에 참석한 사람입니다.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길에 텃밭이 너무 좋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농민은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며 손을 닦다가 정원이 너무 좋다는 범한의 칭찬에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주변을 둘러본 범한은 다른 사람은 없는 걸 확인하고는 아예 바위에 앉아 농민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거리낌 없이 농민이 건네준 물을 마시며 텃밭 가꾸는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누던 범한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설명하는 농민에게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농사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데다가 농민의 설명이 계속되자 한숨을 쉬었다.

범한의 한숨 소리를 들은 농민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시 모임이 너무 지루해서요."

범한은 농민을 힐끗 바라보곤 속으로 저택의 종이니 시 모임 같은 건 모르리란 생각에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농민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를 짓고 노는 건 한가로운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지요. 밥벌이도 못 하는 바보들이나 하는 쓸모없는 짓입니다."

범한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 바보에 나도 들어가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는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바보지요."

그러고는 무언가를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 모임에 대해서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날 밤 시 모임이 끝난 뒤 경도 전체가 발칵 뒤집힐 사건이 터졌다.

시 모임을 끝낸 정왕 세자는 취선거에 가서 놀 생각이었다. 하지만 늙은 집사가 집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전했고 어쩔 수 없이 누이와 함께 식탁에 앉아 부왕의 훈계를 기다렸다.

식탁에 앉은 정왕은 오후에 텃밭에서 범한과 대화를 나누던 농민의 복장 그대로였다.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화를 냈다.

"네놈은 바보다! 매일 노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지 않으냐!"

정왕 세자 이홍성은 부왕에게 바보라는 말을 듣는 게 익숙했기에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며 답했다.

"오늘은 또 무엇 때문에 화가 나신 것입니까?"

정왕이 콧방귀를 뀌고는 물었다.

"오늘은 또 무슨 시 모임을 연 것이냐?"

이홍성이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아버지가 문인들을 모아 연회를 즐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2 황자를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문인들과 교류하며 우호를 쌓아야 했다. 다만 의외였던 점은 정왕이 화를 내기보다는 호기심을 가지고 물었다는 것이다.

"오늘 시 모임에서 옅은 갈색 홑옷을 입고 왔던 공자는 어느 집 아들이냐?"

이홍성은 시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많아 쉽사리 기억해 내지 못했다. 정왕이 답답한지 미간을 찌푸리고는 고민하다 다시 물었다.

"얼굴이 여자처럼 예쁘장한 공자 말이다."

이홍성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백작가 자제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왕이 놀라 눈썹을 추켜세우며 소리쳤다.

"뭐라고? 그 공자가 담주에 살던 범건의 아들이라고? 범건의 얼굴에서 어떻게 그렇게 예쁜 아들이 나올 수 있어!"

옆에서 부왕의 말을 듣고 있던 유가 군주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녀도 범약약이 계속 존경을 표하던 범한의 용모가 어떤지 궁금했다. 이홍성은 아버지의 거친 말에 약간 당황하면서도 옆에 종들이 없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종들도 정왕의 입이 거칠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뭘?"

그러고는 정왕은 잠시 끙끙대며 고민했다. 오후에 우연히 범한을 만났을 때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듯했지만 어디서 봤는지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게다가 시 모임을 싫어하는 범한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텃밭 가꾸는 일을 들어 줘서 호감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청년이 범건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화가 치밀었다.

"너는 앞으로 그 아이······ 걔 이름이 뭐냐?"

"범한이라 합니다."

"그래, 범한을 본받도록 해라. 비록 출신은 좋지 않지만 좋은 식견을 가지고 있더구나."

정왕이 잠시 한숨을 쉬며 자기 아들을 바라보다 말했다.

"지나치게 신분을 따지는 너와 다르게 범한은 농민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더구나. 자만한 성품은 지금 네가 하는 일과 맞지 않아."

정왕 세자는 아버지가 자신과 2 황자가 교류하는 일에 대해 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겉으로는 거칠해 행동하지만 누구보다도 총명한 분이기에 그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식사가 끝난 뒤 세자가 부왕을 기쁘게 할 생각에 서재로 가서 책을 읽으려 했다. 그 모습을 본 정왕이 물었다.

"조금 전에 취선거에 간다고 하지 않았냐?"

취선거는 그냥 술집이 아니라 기생집이었다. 이것의 차이는 상당했기에 세자는 당황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정왕이 버럭 화를 냈다.

"사내대장부는 모름지기 간다면 가는 거다. 그런 배짱도 없는 놈이 무슨!"

그러고는 사람을 불러 이홍성을 내쫓았다.

취선거 별실에 앉은 이홍성은 가장 어린 기생인 원몽을 안은 채 오늘 부왕의 기분이 갑자기 변한 이유를 생각했다.

한편, 그날 밤 정왕가에서 씁쓸한 표정으로 혼자 술을 마시던 정왕은 욕을 내뱉었다.

"개 같은 놈, 기생집 드나드는 걸 그렇게 좋아하더니 예쁜 아들을 얻었군. 곧 있으면 예쁜 손자도 얻겠지."

* * *

한편 시 모임이 끝나자 범한은 일찌감치 가마에 올랐다. 가마 옆에는 등자경과 몇 명의 호위병들이 서 있었다. 시 모임이 끝난 뒤에도 범한의 시에 대한 말들이 분분했다. 몇몇 사람들이 범한의 가마를 보고는 인사를 하러 다가오자 그가 급히 나와 웃으며 담소를 나눴다. 사람들을 배웅한 뒤 범한이 호위병 몇 명에게 누이와 함께 저택에 돌아가라고 분부했다.

가마 앞에 온 범약약이 범한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범약약이 떠나자 등자경이 와서는 보고했다.

"곽보곤은 상서부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대략 사흘에 한 번 간격으로 입궁을 해서 황태자와 함께 책을 읽습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황태자께서는 올해 몇 살인데 아직도 함께 책 읽을 사람이 필요한 거지?"

"황태자는 황후의 친자이지만 황자들 중에서는 세 번째로 태어나서 올해 열여덟 살이십니다."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열여덟 살이면 성인이니 같이 책 읽을 사람은 필요 없잖아."

등자경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놀 사람이 필요해서 그러는 것이지요."

"황제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시는 건가?"

"그건······ 소인도 모릅니다."

며칠 전 식당에서 충돌이 발생한 뒤 범한은 곽보곤이 홧김에 자신을 괴롭히려 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등자경을 시켜 곽보곤이 가는 곳과 거주하는 곳을 파악하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오늘 시 모임에서 곽보곤에게 창피를 주었기에 범한은 겉으로는 기분 좋은 척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화가 났다. 그는 오늘에야 비로소 곽보곤을 염탐하게 한 것은 곽보곤이 자신을 괴롭힐까 두려워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곽보곤을 괴롭히고 싶은 마음에 그런 지시를 한 것이었다.

"주인이 치욕을 당한 건 어떻게 생각하지?"

범한이 등자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등자경은 망설이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저를 죽이십시오."

"쓸데없긴. 너를 죽이면 나한테도 좋을 게 없어. 다른 사람을 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나?"

등자경은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곽보곤은 황태자와 돈독한 사이일 뿐만 아니라 상서의 아들이었다. 그러니 그를 건드는 것은 상당히 무거운 죄이기에 만일 사남 백작이 일을 막아 주지 않는다면 자신은 오랜 세월 경도를 떠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눈앞의 젊은 청년을 믿었기에 조금의 망설임 없이 이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범한이 장차 신분의 제약을 극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믿음은 범한의 학식과 성품 그리고 자신의 직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범한은 등자경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나 보군."

범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등자경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반드시 때려야겠어. 그러지 않으면 내 마음속에 있는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아."

범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햇빛처럼 찬란한 미소에 등자경은 오금이 저렸다.

"누구를 어떻게 때리고 싶으신 겁니까? 형벌은 걱정하지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나도 내 손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너나 집안 호위병들이 대신 움직이면 관아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하인 몇 명 때문에 상서가와 사이가 틀어지길 원치 않으실 거야."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반면 내가 나선다면 쉽게 해결될 수 있어. 아버지나 황궁의 그분 모두 빨리 혼인을 치르고 싶어 하시니 내가 형벌을 받게 놔두지는 않으실 거야."

등자경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께서 직접 나서시는 것은 절대 안 됩니다. 물론 귀족 자제분들의 다툼이 작은 일로 여겨지는 건 사실이나 백작가와 황실의 도움을 받으려 하시다가 자칫······."

등자경이 말을 얼버무리자 범한이 이어서 말했다.

"더 큰 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거지?"

그가 빙그레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만일을 가정해서 말한 거야. 아예 상대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더 좋겠지."

그 말을 들은 등자경은 범한이 살인 사건을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등자경의 생각을 예측한 범한이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었다.

"정왕 세자께 오시라 말씀드렸지?"

"네, 드렸습니다."

"예약한 곳이 어디라고?"

"취선거입니다."

"술집 이름치고는 참 고상하네."

"저······ 도련님. 취선거는 기생집입니다."

범한이 놀란 표정을 짓더니 씁쓸히 웃었다.

"마대는 준비가 됐나?"

* * *

경도 서쪽에는 유정강(江)이 흘렀다. 유정강의 맑은 물이 창산 앞으로 흘러가 만든 거대한 호수는 거울처럼 맑고 아름다웠다. 매일 밤이면 화려하게 치장한 놀잇배들이 초롱을 달고 호수를 유람했다. 어두컴컴한 밤을 배경으로 놀잇배들이 호수를 떠다니는 모습은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백성들은 그곳이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풍속이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취선거는 비록 가장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놀기 좋기로 유명했다. 2층으로 된 취선거는 정교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을 뿐만 아니라 경도 화류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리리가 일하는 곳이었다.

사리리는 외모와 성격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재주도 좋았다. 문인들이 좋아하는 서예, 그림 등을 잘했을 뿐만 아니라 악기에도 능통했다. 물론 전문적인 실력까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경도의 인재들이 칭찬하는 바람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사리리가 경도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이 된 이유는 근거 없는 소문 때문이었다. 바로 사리리의 성이 ‘사(司)’가 아니라 황실의 성인 ‘이(李)’라는 소문이었다. 경도에는 사리리가 개국 초기 어느 황족의 자손이며 집안이 몰락해서 기생이 되었다는 풍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물론 소문을 들은 황족들은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고 사람들도 마음속으로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리리가 해명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거짓이라 생각하면서도 소문을 믿었다. 더구나 황제 폐하도 기생에 대한 소문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조정에서 황제에게 굽신거리는 관리들은 사리리를 품에 안고 폐하의 ‘먼 친척’이라 생각하며 희열을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