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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4화 (54/1,108)

054화 단숨에 써 내려간 시

섭령아는 경도 수비대장 섭중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섭중의 가문은 경도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4대 종사 중 한 명인 섭류운은 그녀의 작은할아버지였다. 이처럼 뿌리 깊은 무신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무공 수준은 높았지만 우아하고 점잖은 성격은 좀 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폭한 성격을 가진 건 아니었다. 범약약에게 심한 말을 한 것도 병상에 누워 있는 임씨 아가씨가 만나 보지도 못한 남자에게 강제로 시집가는 게 안타까워서 홧김에 그런 것뿐이었다.

며칠 전, 경도 귀족들 사이에서 황궁에 있는 임씨 집안 아가씨가 담주에 사는 백작가 서자와 혼인을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소문을 들은 임씨 아가씨는 놀란 데다가 찬 바람을 쐬는 바람에 각혈했고 병세가 더 심해졌다.

당시 정주에 있는 오라버니 집에 머물던 섭령아는 그 소식을 듣고 급히 경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그때 담주에서 올라온 범한이 경도 성문 밖에서 급히 말을 타고 달려가는 섭령아를 보게 된 것이다.

이후 며칠이 지나자 경도에 또 소문이 퍼졌다. 이미 경도에 온 백작가 서자가 범사철처럼 제멋대로 행동하며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섭령아는 더욱 화가 났다. 게다가 어제 만난 임씨 아가씨는 수심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추궁해도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분명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상심에 빠진 임씨 아가씨의 모습에 조급해진 섭령아가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 혼사를 막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되레 아버지에게 야단만 맞았다. 그래서 방법이 없어진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범약약에게 혼사를 미룰 방법이 없는지 부탁했던 것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섭령아는 온화한 성격의 유가 군주를 본 뒤 다시 범약약을 바라봤다. 오늘 대화를 나누면서 평소 점잖은 성격으로 알려진 범약약이 실은 상당히 강인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범약약이 명의를 소개해 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냉담한 말투로 말했다.

"필요 없어."

범약약은 포기하지 않고 다정히 말했다.

"임씨 아가씨가 그렇게 안쓰러우면 명의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거잖아."

"황궁 어의도 치료 방법을 모르는 판에 명의가 진찰한들······."

섭령아는 자신도 모르게 어의를 힐난하는 식으로 말하다가 유가 군주를 의식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를 틈타 범약약이 부연 설명을 했다.

"비개 대인의 제자야."

그 말을 듣자 섭령아가 입을 쩍 벌리며 눈을 반짝이더니 냉큼 범약약의 손을 잡았다.

"그럼 부탁 좀 할게."

대화가 끝난 뒤 세 사람은 정자로 돌아왔다. 정자에 있던 여자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평온해진 것을 보고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이때 궁녀가 남자 쪽에서 보낸 시를 가지고 왔다.

얼마 뒤 남자들이 지은 시를 읽어 보던 사람들은 감탄하며 의견을 나눴다. 다만 범약약만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호수 맞은편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섭령아가 작품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훑어보고는 범씨가 찍힌 낙관이 없자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범 공자의 시는?"

섭령아는 범한이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시를 지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가 없다니? 섭령아의 물음에 궁녀가 범씨 가문 공자는 시를 짓지 않았다고 공손히 답했다. 유가 군주는 난간에 기대앉아 있는 범약약을 힐끗 바라보고는 당시 상황을 물었다. 궁녀가 나지막이 말하자 모두 호수 맞은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유가 군주가 미소를 지으며 범약약을 향해 다정히 말했다.

"이리 와서 시 작품을 감상하시지요?"

자신의 오라버니가 호수 맞은편에서 모욕을 당했다는 걸 안 범약약이 고개를 획 돌렸다. 그녀는 분노를 감춘 채 평온한 눈빛으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모두 시를 지으실 거죠?"

범약약이 시를 잘 짓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녀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의외였다. 범약약은 몸을 돌려 붓을 쥐고는 단숨에 시를 적었다. 그러고는 대기하고 있는 여사에게 건네주며 분부했다.

"이 시를 가져가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도록 해."

범약약의 지시를 받은 여사가 곧바로 호수 맞은편으로 갔다.

한편 호수 맞은편에서는 곽보곤이 은근슬쩍 범한의 신분을 밝히는 바람에 시끌벅적했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정왕 세자의 눈이 순간 분노로 번뜩였다. 자신의 시 모임 분위기를 이렇게 만든 곽보곤을 슬쩍 노려보며 그는 속으로 황태자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체통이 없다고 욕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곽보곤을 훈계해야 할지 고민하던 정왕 세자는 범한을 보고는 마음을 접었다. 당사자가 가만히 있는 와중에 자신이 나설 수는 없었다.

사남 백작이 범한을 시 모임에 참석하게 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시 모임에서 1등을 차지해 명성을 얻으면 장 공주의 ‘환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조금도 급할 게 없었고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알게 할 생각도 없었다.

시를 지어 호수 맞은편 정자에 보내고 얼마 뒤 여사가 범약약이 지은 시를 세자에게 전해 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시를 받아 든 정왕 세자가 갑자기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대단하군!"

옆에 있던 문객이 다가와 시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훌륭하군요. 다만······."

문객은 시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지만 백작가와 정왕가의 관계를 생각해 입을 다물었다.

호기심에 모두가 몰려와 유려한 해서체로 적힌 시를 읽었다.

"8월의 호수는 평평해서 허공을 담아 하늘과 뒤섞였구나. 기운이 운몽택을 찌고 거센 물결이 담주성을 흔드네. 건너고 싶어도 배와 노가 없어 한가로이 집에 있으니 천자에게 부끄럽다. 앉아서 낚시꾼을 보니 괜히 물고기의 마음이 부러워지는구나."

"정말 좋군. 과연 백작가 아가씨가 지은 시라고 할 만해."

사람들 사이에서 시를 읽던 하종위가 감탄하고는 호수를 향해 소리쳤다.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을 통해 자연을 노래하다니 좋은 작품입니다!"

그때 곽보곤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다 말했다.

"옆에 있는 작은 호수를 바라보며 안개를 떠올리는 건 쉽지 않은데. 하물며 운몽택은 남쪽에 있고 담주는 바닷가에 인접해 있지 않습니까. 시는 아름답지만 결연성은 떨어지는군요."

한편 정왕 세자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건너고 싶어도 배와 노가 없어 한가로이 집에 있으니 천자에게 부끄럽다. 앉아서 낚시꾼을 보니 괜히 물고기의 마음이 부러워지는구나.’라는 구절은 분명 작가가 자신의 답답한 심경을 토로한 것이었다. 이것은 범약약의 삶과는 대조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고민하던 정왕 세자가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범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설마······ 범 공자가 쓴 것인가?’

하지만 사람들은 시를 칭찬할 뿐 곽보곤이나 정왕 세자와 같은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곽보곤의 의문을 맞은편에 전달했고 이에 시에 대한 범약약의 설명이 도착했다.

‘호수도 물이고 바다도 물입니다. 제 오라버니가 담주에 계실 때 호수와 바다를 생각하며 쓴 시인데 문제가 될 게 있습니까? 저희 오라버니가 열 살 때 지은 시를 오늘 제가 베껴서 여러분에게 보여 드린 것입니다.’

이 시는 범약약이 아니라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범한이 지은 것이었다. 이로써 모든 의문이 명백해졌다.

모두가 범한을 바라봤다. 멸시하던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놀라우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열 살 때 이런 시를 지었다고? 천재인가.’

무수히 많은 시선이 범한에게로 쏠렸다. 두 손을 모으고 어색하게 웃는 그의 모습은 예술 감성이 풍부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왕 세자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범한이 열 살 때 이 시를 지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아마 모두를 놀라게 할 생각으로 어젯밤에 미리 시를 지은 뒤 동생을 시켜 보여 준 것이겠지.’

그런데도 정왕 세자는 반감이 생기기보다는 오히려 흥미를 느꼈다. 자유롭고 소탈한 사람처럼 보이는 범한이 이런 시를 지었다는 게 놀라웠다.

한편 범한은 정왕 세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이전에 베낀 맹호연의 시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했다는 점에 만족했다.

범한을 놀리던 곽보곤은 달라진 주변의 시선에 화가 났다. 그는 볼품없어 보이는 범한이 이런 시를 지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처럼 훌륭한 시를 쓰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열······살 때 쓰신 작품이라고요?"

이 시를 범한이 썼다는 걸 믿기 어렵다는 말투였다. 범한은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나를 괴롭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 걸까.’ 하고 생각했다. 사실 이 세계에서 시나 문장으로 자신을 이길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이백, 두보, 소식과 같은 명문장가의 작품을 포함해 5천 년 동안의 명작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이에 그가 웃으며 답했다.

"제목을 짓지 못한 채 두었던 시입니다."

당당한 모습에 곽보곤이 이를 악물었다.

"그럼 우리가 솜씨를 감상할 수 있게 지금 한번 지어 보시지요."

범한이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곽보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단숨에 시를 써서 내놓고는 하인의 안내를 받아 화장실로 갔다.

시를 본 모두가 감탄했다. 명백한 범한의 승리였다. 한참을 감탄한 뒤에도 모두 여운이 가시지 않는지 시를 음미했다. 놀란 곽보곤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정왕 세자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뭐라고 평론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손에 있는 부채를 접고는 시를 다시 읽었다.

"바람은 거세고 하늘은 높으니 원숭이가 슬피 울고, 맑은 하천가 하얀 모래섬에 새들이 날아돌아 오네. 끝없이 아득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무궁한 큰 강은 세차게 흐른다. 만 리 쓸쓸한 가을에는 언제나 나그네가 되어 평생 많은 병을 앓으며 홀로 높은 곳에 올랐구나. 고난과 힘겨움에 어느새 머리는 하얗게 새어 버려 초라한 심정에 마시던 탁주 잔을 새로 멈춘다."

"슬픔, 고독과 같은 감정뿐만 아니라 아득함, 무궁함, 만 리, 가을, 나그네, 인생, 병, 천고의 근심까지 모든 인생사를 탁주 한 잔에 투영하다니, 대단하군! 정말 좋은 시야!"

큰 소리로 감탄하던 정왕 세자는 순간 유유자적한 겉모습과 다르게 실의에 빠져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안쓰러워 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마음을 추스른 정왕 세자는 범한이 인생의 고통과 세월의 고단함을 아는 게 놀라웠다. 젊은 나이에 인생의 깊이를 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시를 감상하던 사람들이 저무는 석양을 바라봤다. 순간 인생이 무상해지면서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다들 시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 범한의 삶이 이 시와 부합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누구도 범한이 다른 사람이 쓴 시를 도용했을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시는 대가만이 쓸 수 있는 시였고, 이 정도 실력을 갖춘 대가라면 황제가 대신 쓰라 명령해도 응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서자에 불과한 범한이 도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범 공자의 시를 보니 이제 더 시를 쓸 필요가 없겠군요."

정왕 세자가 탄식하며 말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자신이 이보다 좋은 시를 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범한의 시 한 편에 떠들썩하던 시 모임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시를 쓴 사람이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사실 범한이 베낀 두보의 시는 오늘 시 모임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범한은 자신을 깔보는 곽보곤에게 한 방 먹여야 했다. 게다가 지루해서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화장실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모두를 잠재울 수 있는 두보의 시를 베낄 수밖에 없었다.

급히 화장실로 들어간 범한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허리띠를 고쳐 맨 뒤 하인이 건네주는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다시 후원으로 돌아가던 범한이 주변 텃밭을 바라봤다. 연녹색 새싹들과 짙푸른 나뭇잎, 그리고 앙증맞은 꽃들이 석양 아래서 생기를 내뿜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한동안 텃밭을 둘러보던 범한이 뒤따라 오던 하인에게 구경해도 되냐고 물었다. 범한이 백작가 자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하인은 평소 범약약과 범사철도 이곳을 자유롭게 다녔으므로 범한에게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 말에 범한은 하인을 먼저 보내고는 혼자 텃밭에 들어가 식물을 감상했다. 편하게 감상하던 그는 기이한 화초들뿐만 아니라 이름 모르는 식물들도 심어 있다는 걸 알아챘다. 모양이 조잡스러운 걸 봐서는 아마도 산나물이거나 농작물인 것 같았다.

텃밭 식물들을 살펴보던 범한은 정왕가가 다른 황족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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