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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2화 (52/1,108)

052화 정왕가

그러고는 앞의 말들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만약 재상 대인께서 끝내 혼사를 허락하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범건이 냉소를 지었다.

"내가 이 일의 배후에는 아주 큰 힘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니. 재상 대인이 반대해도 너와 혼인할 아이는 임씨 집안 사람이 아니야. 폐하의 수양딸이고 황궁의 군주라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4, 5월의 초여름 날씨임에도 범한은 큰 얼음 대야에 몸을 담근 것처럼 서늘했다. 그는 아버지의 말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혼사가 거대한 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바로 황제가 나중에 거대한 사업을 누구에게 맡길지 결정하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단순한 두 집안의 혼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면에는 많은 일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결정하는 사람은 황궁 안에 깊숙이 숨어 거대한 권력을 휘두르는 인물이었다.

다만 그 인물이 황태후인지 황제인지를 모를 뿐이었다.

"재상 대인께서는 왜 반대하시나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차를 한 모금 들이켜던 범건이 인상을 쓰며 찻잔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차가 쓰게 우려져서 싫은 듯 입맛을 다시며 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에 말하지 않았니?"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재상가와 백작가의 혼사에 무언가 숨은 뜻이 있을 거라 의심하실까 두려워 반대한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이 혼사를 황실에서 원한다면 재상 대인도 두려워할 게 없지 않습니까?"

허를 찌르는 범한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힌 범건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정신을 추스른 그가 웃으며 탁자에 찻잔을 내려놨다.

"그래, 너에게 사실을 말해 주자면 장 공주가 이 혼사를 원치 않아."

범한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부모가 모두 반대하는데 굳이 혼인할 필요가 있나. 나도 사실 모두 접고 흰색 옷을 입은 아가씨를 찾으러 가고 싶은데.’

그는 차마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없었다. 장 공주와 재상이 모두 반대함에도 황실에서 혼사를 강행하고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백작가가 뒤에서 힘을 행사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장 공주는 왜 반대하시나요?"

범한은 물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정혼자도 나와 같은 사생아 신분인데 반대하는 이유가 뭐가 있지?’

"이것 역시 복잡한 맥락에서지. 황제 폐하께서는 그 아이를 친모인 장 공주보다도 아끼신단다. 이전에는 술을 드시고 무의식중에 그 아이가 혼인한다면 장 공주가 가진 모든 권력을 그 아이의 남편에게 넘겨주겠다고 말씀하셨어."

범건이 수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범한이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 공주도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이군요. 재상과 혼인해 가정을 꾸리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어요. 자신이 가진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서."

범건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만약 장 공주가 그때 임약보와 혼인을 했다면 임약보는 부마로서 부귀영화를 누렸을 테니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을 거고 재상이 되지도 못했을 거야."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부마는 관직에 나갈 수도 없는 유명무실한 작위다.

"네가 혼인을 할 그 아이는 비록 황궁에서는 군주로 불리지만 황실 족보에는 올라 있지 않아. 물론 혼인하면 네 벼슬길에 문제가 생길 수는 있겠지."

아들이 미간을 찌푸리는 이유를 짐작한 범건이 미리 설명했다.

그러자 범한이 일어나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내년에 향시가 있으니 공부에 매진하도록 해라."

범한은 씁쓸히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서 범건은 그에게 이틀 뒤 정왕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시 모임이 있으니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범한은 귀족들을 만나야 한다는 두려움보다는 어느 시를 베껴야 할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파졌다.

범건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시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비록 혼사를 황실에서 돕고 있지만 이번 시 모임에서 경도 문인들에게 실력을 인정받는다면 장 공주의 생각이 바뀔 수 있으니 최대한 실력을 뽐내도록 해라."

범한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그는 자신과 누이가 주고받았던 편지를 아버지가 몰래 봤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자신이 《홍루몽》을 썼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범한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는 범건의 치밀함이 감탄스러웠다.

* * *

이 세계는 평일과 주말이라는 개념이 없기에 일하는 날과 쉬는 날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점은 매일 영업을 했고 관아들도 매일 업무를 진행했다. 심지어 황제 폐하에게 올리는 상소문도 하루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올라갔다. 물론 모두가 바쁜 건 아니었다. 경도의 고관대작 자제들은 매일 술을 마시고 노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16년 전 대규모 전쟁이 있고 나서 북위는 분열되어 국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서쪽 오랑캐 서만은 멀리 도망가서 음산에는 풀을 뜯어 먹고 사는 천 필의 말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황제가 1 황자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서쪽 국경을 넓히라고 지시한 것도 사실은 놀이에 불과했다.

주변 나라들이 힘을 잃고 평화가 찾아오자 경국의 풍토도 바뀌었다. 과거 무예를 중시하던 것과 다르게 문예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이건 황제가 무예를 싫어하는 이유도 있었다. 권력자의 기호에 따라 나라의 유행이 바뀌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일할 필요도 없고 군대를 이끌 수도 없게 된 고관대작의 자제들은 과거 시험을 준비하며 책을 읽고 시를 짓는 고상한 취미를 즐기게 되었다.

그래서 경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놀이는 무공 고수들의 결투가 아니라 시 모임이었다.

경도에서 가장 유명한 사교 모임으로는 정왕가의 시 모임과 황태자의 시 모임이 있었다. 날씨 불문하고 매달 한 번씩 열리는 시 모임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세상에 이름을 날릴 수 있어 가난한 집안의 자제들에게는 출세할 수 있는 통로였다.

황태자가 문예를 좋아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정왕은 황제의 친동생이었지만 권력에는 욕심이 없었다. 그래서 목표가 뚜렷한 서생들은 황태자 시 모임에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물론 정왕가의 시 모임에서 인정을 받는다면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그래서 시 모임이 열릴 때마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부유해서 가마나 마차를 타고 오는 사람도 있었고, 가난해서 두 발로 걸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정왕가의 나이 든 집사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신분만 확인하고 받아들였다.

한편 가마를 타고 시 모임에 가는 범한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을 꾹 틀어막으며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구토를 참았다.

청색 발이 달린 가마를 타고 가자고 말한 사람은 범한이었다. 그는 성대한 시 모임에 가는 만큼 그에 어울리는 가마를 타고 가야 한다고 누이에게 제안했다. 그런데 담주에서 배를 타도 하지 않았던 멀미를 가마 안에서 하게 될 줄이야. 속이 울렁거려 어쩔 줄 몰라 하던 그가 청색 발을 들추고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등자경에게 물었다.

"아직도 멀었나?"

등자경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 내렸다.

"저 갈림길만 지나면 도착합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고쳐 앉은 범한은 양손을 무릎에 올리고 엄지와 약지를 붙인 뒤 정기를 운용해 장기를 진정시키려 했다. 이에 기분은 좀 전환되었지만 멀미는 가라앉지 않았다.

범한은 마음속에 있는 풀리지 않는 의문들에다가 몸까지 좋지 않으니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요 며칠간 본가에서 지내면서 아버지와 자신이 상상했던 것만큼 닮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문이 들었다. 더구나 서자인 자신에게 아버지가 왜 그토록 신경을 쓰는지도 의문이었다.

‘친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나에게 정성을 쏟는 걸까?’

그는 고개를 돌려 가는 청색 발 너머로 보이는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그림자를 주시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등자경이 자신의 편에 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사람인 만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한숨을 쉬며 마음속으로 믿을 수 있는 부하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죽은 귀신같은 사람이라서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었다.

범한은 자신의 어머니가 경도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아버지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슨 이유로 이 세상을 떠난 것인지 알고 싶었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그리움이 아니었다. 과거의 일을 알아야만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왕가 문 앞에서는 몇 명의 문객들이 황송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앞의 청년에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 정왕이 문 앞에서 직접 손님을 맞이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청색 발이 달린 작은 가마 두 대가 천천히 다가오자 정왕 세자가 답답함을 못 이기고 자신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문객들을 내버려 둔 채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문객들은 정왕 세자가 자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온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챘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집사의 안내에 따라 후원으로 갔다.

문 앞에 있던 하인들도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귀빈이길래 정왕 세자가 직접 문밖으로 나와 맞이하는지 궁금했다.

마침내 첫 번째 가마에서 연노란색 비단 치마를 입은 백작가 아가씨가 나오자 하인들도 이해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왕가는 백작가와 사이가 좋을 뿐만 아니라 유가 군주와 범약약의 우애도 깊었다. 그런 백작가 아가씨를 위해 정왕 세자가 직접 밖으로 나와 맞이하는 것도 당연했다.

"어서 오십시오."

정왕 세자의 본명은 이홍성으로 경도에서 기생집을 줄기차게 드나드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범약약 앞에서는 몸을 낮추며 상당히 예의 있게 행동했다.

범약약이 살짝 몸을 숙여 인사한 뒤 안부를 묻고는 말했다.

"유가 군주가 오늘 어떤 주제를 내는지 아시나요?"

정왕 세자가 범약약의 말에 웃으며 힐끔힐끔 뒤에 있는 가마를 바라봤다.

‘한참이 지났는데 왜 안 나오는 거야.’

두 번째 가마에서 손님이 나오지 않자 하인들이 다가와 청색 발을 슬며시 걷어 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가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왕가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범약약이 살며시 웃으며 설명했다.

"오라버니는 뒤에 오고 계세요."

이에 모두 범약약의 뒤를 바라봤다. 열여섯에서 열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 숨을 헐떡거리며 몸종을 끌고 뛰어오고 있었다. 연한 갈색 옷을 입은 그는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않은 경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표정만큼은 밝고 친근했다.

"죄송합니다."

범한이 세자 앞에서 예를 갖춰 인사했다.

"가마 안에서 멀미가 나서 내려서 걷고 있었는데 마침 길거리에서 음료를 팔고 있어 마시고 오다 보니 늦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이홍성이 이전에 만났던 범한을 보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범 공자가 이렇게 오시니 좋군요."

세자의 말을 들은 범한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망설이다가 옅은 미소를 보였다.

"정왕가 밖에서 파는 음료가 다른 곳보다 맛이 좋아 저절로 발길이 가더군요."

세자 이홍성은 범한의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범한은 담주에 있을 때부터 누이가 시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가 감상적이고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 세계에도 좋은 시는 있었다. 다만 시 모임에 참석하는 젊은 문객 중에서 강인한 뜻을 가진 작품을 쓰는 경우는 드물었고 그건 범약약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범한은 이런 장소에서 누이가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궁금했다. 더구나 《홍루몽》을 외부로 유출해서 해적판을 팔게 만든 유가 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홍성을 따라 후원에 도착한 그는 비로소 개방적인 경도에서도 남녀가 구분되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여자들은 호수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정자에 앉아 있었다. 정자에 걸린 하얀 천은 바람에 따라 나풀나풀 춤췄다.

범한은 실망한 표정으로 세자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나풀거리는 흰색 천을 바라보던 그는 자연스럽게 경묘에서 만난 여자를 떠올리면서 첫사랑에 빠진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후원에 도착하자 세자는 범한이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과 인사할 수 있게 해줬다. 그런데 그중에는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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