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인연
궁전의 기분은 범한과 다르게 좋지 않았다. 오늘 주군이 기분 전환을 위해 나와 있는 동안 이렇게 많은 일이 터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먼저 어느 집 자제인지 모를 청년이 부하들이 세운 방어선을 뚫고 경묘로 들어온 것도 그렇고, 아가씨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별전으로 가서 뭘 먹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함부로 아랫사람들에게 큰소리를 낼 수 없었다. 주군의 얼굴이 계속 어두운 게 상당히 언짢아 보였기 때문이다. 밀봉된 편지에 안 좋은 내용이 적혀 있는 게 분명했다.
"궁전."
마차에 오른 귀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귀인은 20여 년 전부터 밴 습관 때문에 가마를 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진평평이 돌아오지 않으려고 하면 사람을 보내 붙잡아서라도 데려와."
"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궁전은 속으로 한숨 지으며 누구를 파견해야 할지 생각했다.
마차가 조용히 움직이자 궁전이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살펴보던 그는 풀이 죽어 있는 호위병들을 보니 다시 화가 치밀었다. 경묘 주변에 매복해 있던 호위병들이 청년을 막지 못한 이유는 누군가의 공격을 받아 전부 기절했기 때문이다. 청년에게는 잘된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심각한 일이었다. 더구나 호위병 중 누구도 범인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다.
궁전이 미간을 찌푸리며 5품 호위병 여덟 명을 단숨에 기절시킬 수 있는 사람이 누굴지 생각했다. 이건 4대 종사 정도의 수준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가 자객이었다면? 궁전은 머리가 쭈뼛 솟아 더는 상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돌아가면 곧장 오늘 경묘에서 벌어진 일을 면밀하게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행렬 가장 뒤에 있는, 다른 마차들보다 크기가 작은 마차의 창문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방금 범한과 경묘에서 어색하게 만났던 흰색 옷을 입은 여자가 마차 안에 앉아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여자의 기분 좋은 모습을 오랜만에 본 궁녀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으셨어요?"
그러자 여자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외삼촌을 따라 나오면 항상 즐거워. 최소한 그 어두침침한 방 안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궁녀가 입을 삐죽거렸다.
"황궁의 어의가 바깥바람을 많이 쐬면 안 된다고 했어요."
어의라는 말을 듣자 여자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면서 즐거웠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청년을 만난 것을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마음이 복잡했다.
그녀는 자연적으로 범씨 가문의 자제가 생각났다. 비록 어머니도 반대하고 본 적 없는 아버지도 반대하는 것 같지만······ 누가 외삼촌의 뜻을 거역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순간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져 급히 흰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기침을 한바탕하고 보니 하얀 손수건에 피가 묻어 있었다. 궁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또 각혈하셨어요? 어쩌면 좋아."
그러자 여자가 손을 내저었다.
"별일 아니야. 그냥 토한 것뿐인걸. 습관이 돼서 괜찮아."
놀란 표정으로 말뜻을 생각하던 여종은 순간 아가씨가 자신의 병을 잘 모르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 * *
밤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집에 돌아온 범한은 속으로 다음에 나갈 때는 반드시 등자경을 데리고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집 안에서는 일찌감치 음식을 차려 놓고 식탁에 둘러앉아 범한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범한은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사남 백작의 무표정한 얼굴과 유씨 부인의 온화한 미소를 보니 두 사람 모두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범한이 작은 목소리로 해명하자 범약약은 웃으면서 속으로 오라버니도 어리바리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녀가 마차를 찾을 수 없을 때는 다른 마차를 대여해서 오면 된다고 알려 주었다. 마차를 대여할 생각은 하지 못한 범한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범사철의 비웃음을 견뎌야 했다.
식사가 끝난 뒤 가족들이 모두 둘러앉아 마작을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범사철은 옆에 앉아 주판을 들고 모두의 점수를 계산했다.
그 모습에 유씨 부인이 순간 실망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녀는 자기 아들이 주판을 튕기는 모습을 못마땅해하면서도 애써 표정을 숨기며 범한을 향해 미소 지었다.
범한은 몇 차례 게임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체 실력이 좋지 못한 데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유씨 부인의 다정한 표정도 거북해서 범사철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일어났다.
그러자 범사철은 아버지인 사남 백작의 눈치만 살피며 머뭇거렸다. 사남 백작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자 그가 뛸 듯이 기뻐하면서 재빨리 걸상에 앉았다.
평소에 아버지 앞에만 서면 움츠러드는 범사철은 항상 식사한 뒤에는 공부하러 가지 가족들과 함께 마작을 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는 오늘 아버지의 기분이 좋은 것이 범한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담주에서 범한이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정원을 한가롭게 산책하고 다시 응접실로 돌아온 범한은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떻게 된 일인지 범사철의 앞에 동전이 산처럼 쌓여 있고 다른 세 사람은 패배자처럼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순간 범한의 머릿속에 낮에 마차 안에서 본, 돈에서만큼은 열정을 드러내던 범사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런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던 범사철이 돈을 버는 방면에 있어서만큼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범한이 호기심에 뒤에 가서 열두 살 소년이 하는 일을 자세히 관찰했다. 한동안 범사철의 손을 지켜보던 범한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범사철은 한 손으로는 마작을 두면서 다른 손으로는 주판을 튕기며 계산을 하고 있었다. 통통한 다섯 손가락이 주판 위에서 나는 듯 자유롭게 움직였다.
범한은 복잡한 계산도 막힘 없이 해내는 범사철을 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많은 동전을 가지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범사철을 관찰하는 범한의 모습에 유씨 부인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돈만 좋아하는 자기 아들을 보며 범한이 속으로 비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씨 부인의 생각과 다르게 범한은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범사철이 돈에 눈먼 사람이라기보다는 자신만의 확신을 가진 ‘이상주의자’로 보였다.
범한은 속으로 아우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대단한 인물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역시 경국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급제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범사철의 지금 수준으로는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나중에 집안의 작위를 물려받는다고 하더라도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등자경이 유씨 부인이 자기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고 말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시대에도 상인은 존중받지 못했다. 재정을 담당하는 호부나 황실의 상점과 다르게 민간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은 항상 차별받았다.
곧이어 마작이 끝났고 사남 백작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격상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는 오늘따라 무슨 이유에서인지 평상시와는 달라 보였다. 자리를 떠나던 그가 범한을 바라봤다.
사남 백작과 눈이 마주친 범한은 낮에 자신이 호위병을 뿌리친 일을 아버지가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아무 말 없이 웃었다. 어쨌든 이번 일로 자신이 미행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알린 셈이었다.
유씨 부인이 잠시 애정과 안타까움이 섞인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고는 몸을 일으켜 범한과 범약약에게 인사한 뒤 사남 백작과 함께 떠났다. 백작가 종들은 어르신이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과일주스를 마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유씨 부인은 조정 일로 근심이 많아 쉽게 잠들지 못하는 사남 백작을 위해 매일 직접 과일주스를 만들었다.
사남 백작과 상의할 일이 있었던 범한은 두 사람이 같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나중으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려 여전히 탁자에서 계산하고 있는 범사철을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아직도 계산이 안 끝났어? 뭘 기록한 거야?"
그러자 마작을 하느라 피곤했는지 범약약이 가볍게 손목을 돌렸다.
"매년 명절에 손님들이 오시면 같이 놀거든요. 그때마다 아버지가 사내대장부는 작은 이익에 연연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 얻은 동전을 일일이 계산하지 말라고 그러셨어요. 아버지 뜻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당시에는 금액이 얼마인지 대강 기록해 두었다가 시간이 날 때 저렇게 천천히 정산하는 거예요."
범한은 꼼꼼히 기록해 둔 범사철의 수첩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었다.
"계산에 상당한 재능이 있구나. 앞으로 커서 무슨 일을 하고 싶어?"
범사철은 어렸을 때부터 장부를 기록할 때는 집중하느라 주변 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범약약은 사실을 모르는 범한이 말을 무시당했다고 불쾌하게 생각할까 봐 대신 해명하려 했다. 그런데 범약약의 예상과는 다르게 범한은 활짝 미소 지으며 장부를 기록하는 범사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부 기록이 끝낸 뒤에야 범사철은 범한의 질문이 생각난 듯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다 말했다.
"그야 공부를 열심히 해서 관직에 올라 가문을 빛내야죠."
범한이 웃으며 물었다.
"정말 그러고 싶어?"
그러자 범사철이 입을 삐죽거리며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께 혼난단 말이에요."
"여기에는 우리 세 사람밖에 없으니 진심을 말해도 되잖아?"
범한이 슬쩍 떠봤다. 범사철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관료의 자제들은 아버지가 엄격하고 어머니는 인자한 편이다. 그런데 자신은 아버지도 엄격하고 어머니도 엄격했다. 게다가 아버지가 누나에게 교육을 맡기면서 누나도 엄격해졌다. 그래서 형제간의 우애 같은 건 경험해 보지 못해서 범한의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진심을 말해도 된다는 말에 범사철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보다 네 살 많은 ‘형’이 무섭기보다는 엄마처럼 다정하게 느껴졌다.
"저······ 저는 돈을 버는 게 좋아요."
"이익만 따지는 상인이 뭐가 좋다고."
범약약이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범한은 자신과 함께 편지를 주고받았으면서도 아직도 낡은 사고방식에 갇혀 있는 범약약이 실망스러웠다. 자신을 노려보는 범한의 눈빛에 잘못을 깨달은 범약약이 입을 꾹 다물었다.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범사철에게 말했다.
"돈 버는 일이든 뭐든 잘하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그러니 나는 너를 응원해."
"응원하는 건 아무 소용 없어요."
범사철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잖아요."
"그럼 몰래 해봐."
범한이 악마처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범사철을 유혹했다. 그 순간 범사철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눈을 반짝였다.
"형님이 쓴 글을 저에게 주시면 제가 책을 팔아서 돈을 벌어 드릴게요!"
그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형님이란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었다. 범한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책을 팔아 돈을 버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손해를 볼까 봐 걱정되시나 봐요. 그냥 한번 해볼 수 있잖아요."
범사철이 얕보는 눈빛으로 말했다.
자신을 얕보는 아우의 눈빛에 화가 난 범한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좋아! 그럼 먼저 계획서를 가져와!"
"무슨······ 계획서요?"
범사철이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누나를 바라보자 범약약이 설명했다.
"네가 하려는 일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라는 거야."
범사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서부터 웅대한 목표를 세워 온 범사철은 다른 귀족 자제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범사철이 어려서부터 세운 목표는 바로 세상에서 가장 부유했던 섭가를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그는 섭가를 다시 일으켜 천하의 부를 거머쥘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응원하는 범한이 섭가와 관계가 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잠시 뒤 유모가 범사철을 씻기러 데려가자 응접실에는 남매만 남게 되었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응접실을 나오자 범약약도 조용히 뒤를 따랐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복도를 걸어가던 두 사람이 범약약의 규방 앞 얕은 연못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범약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도 신분에 따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사철이가 상인이 된다면 무척 고생하며 살아야 할 거예요."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는 신분이 있을 수밖에 없지. 내가 이전에 말했잖아, 억지로 무언가를 바꿀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세상에 이런 부분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자신의 적성을 외면해서는 안 돼."
범약약이 눈을 크게 뜨고 범한을 바라보았다.
"적성이 뭔데요?"
"적성은 무슨 특별한 게 아니고 간단하게 말해서, 그러니까······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말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