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감찰원
하급 관리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오른손으로 그의 어깨를 쳤다.
"그래요."
하급 관리가 어깨를 치자 범한은 닭살이 돋았지만 아무 내색 하지 않았다. 상대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나요?"
범한은 그의 친절한 모습에 순간 이전 세계에서 손님을 안내하는 카운터 직원을 떠올렸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잡생각을 떨쳐 내고는 상대에게 슬쩍 은전을 건네며 말했다.
"비개 대인 계십니까?"
범한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하급 관리가 입을 쩍 벌리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말없이 이전과 다른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잠시 뒤 그가 두려움 섞인 목소리로 공손히 말했다.
"비개 대인을 찾으십니까?"
이 말을 하는 동시에 그는 재빨리 범한이 건네준 은전을 다시 돌려줬다. 상대방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범한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처럼 은밀하면서도 정확한 손동작은 최소 몇십 년은 수련해야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감찰원에서는 평범해 보이는 하급 관리까지도 상당한 실력을 가진 고수인 셈이었다.
범한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급 관리가 자신의 오른손을 박박 닦는 모습을 지켜봤다.
"비개 대인은 안 계십니다."
하급 관리는 공손하게 대답하면서 슬쩍 뒷걸음질을 쳐서 범한과 거리를 벌렸다.
"비개 대인께서는 현지 감찰을 하러 나가셨습니다."
그제야 범한은 감찰원 원장이 경도에 돌아오려면 최소 3개월은 걸린다고 한 등자경의 말이 떠올랐다. 게으른 비개의 성격상 자신을 감시하는 상사가 없으니 농땡이를 부리러 간 게 분명했다.
할 말을 마치고 은근슬쩍 떠나려고 하는 하급 관리에게 범한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왕계년이라 합니다."
왕계년이란 이름의 감찰원 관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짓고 있는 범한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겁 없이 감찰원에 들어와 비개 대인의 성함을 서슴없이 말할까.
자신과 멀찍이 떨어져 거리를 유지하는 왕계년을 보며 범한은 자신이 독약을 사용할까 봐 두려워서 경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비개 대인이 돌아오시거든······ 제자가 경도에 왔다고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개 대인의 제자라고?’
왕계년은 순간 자신의 오른손을 잘라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무턱대고 만지길 좋아하는 자신의 성격을 원망했다. 그러고는 범한에게 알겠다고 답했다.
감찰원 입구를 나오자 길가에 심어진 가로수 그늘이 범한을 감쌌다. 햇볕은 따가웠지만 가로수 그늘 안에 있으니 덥지는 않았다. 서쪽을 향해 걸어가던 그가 강가 난간에 기대서서 팔짱을 끼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볼일은 마쳤지만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저택에 친절한 누이가 있지만 새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과 비교당하며 공부를 강요받는 아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분고분 아무 욕심 없는 척 행동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그는 이 세계에서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다른 세계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는 그는 여전히 이 세계가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그는 감찰원에 와서 비개를 찾는 일을 아버지인 사남 백작에게 숨겼다. 물론 사남 백작도 비개와 범한의 사이를 알고 있지만 범한이 자신보다 비개를 더 신뢰한다는 사실은 몰랐다. 범한은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마음을 주고받은 비개에게 상당한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다.
비개가 경도를 비우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생긴 범한은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것저것 고민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돌아다니던 범한이 다시 감찰원 입구로 돌아왔다. 감찰원 앞에서 정신이 든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행인들은 감찰원에서 나오는 음습한 기운이 무서운지 입구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걷고 있었다.
범한이 실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순간 옅은 구름이 흩어지면서 금빛 햇살이 비췄다.
눈부심에 두 눈을 비비던 그는 감찰원 입구에 세워진 비석을 발견했다.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모양을 한 비석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비석을 살펴보던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비석에 새겨진 문장이 어디선가 본 것같이 익숙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낯설면서도 친근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섭경미?"
놀란 범한이 자신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말했다. 그는 감찰원 입구에 세워진 비석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발견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는 애써 침착함을 표정을 유지했지만 가슴이 두근두근 떨리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이름이 왜 감찰원 비석에 새겨져 있는 거지?’
섭경미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여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황제도 누리지 못하는 대우를 받았을 리 없었다. 더구나 섭경미의 죽음에는 경국 귀족들이 관련되어 있었다. 오죽은 10년 전 소란 중에 적들을 모두 죽였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친척이 여전히 조정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에 섭경미는 지금 경국에서 금기시되는 이름이었고, 섭가의 재산도 전부 황궁의 금고로 들어가 황실의 사업으로 변해 있었다.
오죽은 섭경미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얼마 없다고 말했지만 경국의 권력을 독차지한 황실 사람들은 알고 있을 터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감찰원 입구에 당당히 세워져 있다니. 범한은 진 원장이 황가의 눈치도 보지 않을 만큼 배짱이 강한 인물일 거라 생각했다.
낮은 비석을 바라보던 범한의 머릿속에 담주에서 오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섭경미란 함자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아가씨라고만 불렀거든요. 그런데 섭경미란 함자는 지금도, 그러니까······ 경도에서는 꽤 유명한 이름입니다.
범한은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경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감찰원 입구에 비석이 서 있으니 섭경미란 이름도 눈에 잘 띄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복잡한 마음을 추스른 그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동쪽을 향해 걸어갔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태연한 모습이었다.
비석을 본 범한은 자연적으로 자신과 혼인하게 될 재상의 딸이 생각났다. 사남 백작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어머니는 섭가의 재산을 거둬들여 관리하는 장 공주였다. 그는 마땅히 자신이 물려받아야 할 재산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니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범한은 이미 등자경을 통해서 자신의 정혼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있는 장소는 경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기에 몰래 들어가 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비개를 찾아가 감찰원 신분을 이용해 병상에 누워 있는 정혼자의 병을 진찰해 달라고 부탁해 볼 생각이었다. 그럼 자신도 정혼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을 것이었다.
범한은 비개가 경도를 비우는 바람에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자 짜증이 났다. 정말 혼례식을 올리고 신방에 들어갈 때까지 상대방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야 한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범한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무슨 수를 써서든 몰래 들어가 정혼자의 얼굴을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만일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혼인 전날에 도망칠 생각이었으므로 서둘러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던 범한은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 경도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탓에 천하대도를 두 차례 왔다 갔다 했음에도 마차가 서 있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한 아이가 탕후루를 손에 쥐고 지나갔다. 시큼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냄새에 범한이 재빨리 뛰어가 아이의 탕후루를 뺏어 맛보았다. 분명 자신이 아까 사 먹은 것과 같은 게 분명했다. 범한이 어디서 산 거냐 물으려 하자 탕후루를 뺏긴 아이가 겁에 질려 울먹거렸다. 당황한 범한이 동전 두 개를 쥐여 주며 달래자 아이가 마지못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아이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던 범한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가 틀린 방향을 알려 줘 자신에게 복수한 게 분명했다. 주변이 완전히 낯선 것이 자신이 찾던 곳이 아니었다. 주변 풍경을 보니 경도성 외곽까지 걸어온 것 같았다. 범한은 이곳까지 걸어온 자신의 튼실한 다리에 자긍심을 느끼며 한편으론 틀린 길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아둔한 머리에 슬퍼했다. 지금까지 온 거리를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돌아가려 주변을 살펴보던 범한의 눈에 사원이 보였다.
번화한 경도성에서 이처럼 인적 드문 장소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주변은 황량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깨끗했다. 사원은 처마와 기둥에 먼지 한 점 볼 수 없을 정도로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 검은색 목조 건축물을 바라보던 범한의 머릿속에 이전 세계에서 봤던 베이징의 천단이 생각났다. 눈앞의 사원은 그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웠다.
짙은 검은색으로 칠해진 장엄한 사원 위에는 ‘경묘’라고 적힌 납작한 직사각형 현판이 걸려 있었다.
혓바닥으로 이빨에 붙어 있는 설탕을 떼면서 현판의 황색 글자를 올려다보던 범한의 마음속에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일렁였다.
경묘는 황가에서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사원이자 베일에 싸여 있는 신묘와 소통할 수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었다.
비개가 담주에 있었을 때 경묘가 경도 황궁 외삼리(外三里)에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범한은 단순히 황궁에서 3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고 생각했을 뿐 정말 ‘외삼리’라는 지명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범한이 입을 쩍 벌리고 경묘를 바라봤다. 경도에 오기 전에 그는 신묘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만큼 차라리 경묘에 찾아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라면 자신이 16년 동안 품고 있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 세계에 온 것일까?’
이전 세계에서 봤던 소설 《심진기》에서 주인공은 차원 여행을 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다른 작품의 차원 여행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범한은 자신에게도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전 세계에서 분명히 죽었던 자신이 지금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 이유를 알고 싶었다.
탕후루를 뺏긴 아이 때문에 우연히 경묘를 찾게 되자 범한은 약간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신묘와 자신 사이에 신비로운 연결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범한은 탕후루가 자신과 경묘를 연결해 준 거라고 굳게 믿었다.
범한이 신묘로 다가가는 동안 주변은 고요했다. 성큼성큼 문 앞으로 걸어간 그가 오랜 세월 열리지 않은 것 같은 육중한 문을 밀었다.
"멈춰!"
그 순간 어디선가 큰 고함이 들려왔다.
조용한 곳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리자 범한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경묘 안에 있는 사람이 보였다. 매부리코에 두 눈이 푹 꺼진 중년 남자가 앞을 가로막고는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에 범한은 기분이 불쾌해졌다. 경묘는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런데 문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거칠게 자신을 막아서자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뭐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당당한 거야?’
생각하던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큰 소리로 사람을 놀라게 하면 어떡합니까."
그러자 중년 남자가 무서운 표정으로 범한을 밀며 조용히 말했다.
"지금 안에서 기도 올리는 분이 계시니 방해하지 말고 얼른 돌아가."
중년 남자는 귀족 밑에 있는 종인 것 같았지만 말투나 행동은 고위직 관리처럼 거만했다.
당황한 범한은 이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비개와 함께 무덤을 파며 독약에 대해 배운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만지는 것에 지나치게 민감했다. 중년 남자의 손이 다가오자 인상을 쓰며 양손을 교차해 상대방의 손목을 막았다.
그 순간 퍽 소리가 낮게 울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놀라며 서로를 바라봤다. 기량이 거의 같아 두 마리의 뱀이 엉킨 것처럼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어!"
중년의 남자가 낮게 소리치며 눈을 크게 떴다. 작은 시냇물이 큰 강으로 흘러가듯 그의 손목의 힘이 범한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여기서 고수를 만나 대결하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범한이 끙 소리를 내며 버텼다. 등 뒤가 불에 댄 것처럼 뜨거웠다. 오랜 기간 평안하게 있던 난폭한 정기가 순식간에 반응하면서 단전이 아릴 듯 아팠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때 붕~ 소리와 함께 돌계단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흙먼지는 기이한 둥근 모양으로 뭉치더니 곧 사라졌다.
두 사람이 놀라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입을 막고 몇 번 기침하는 중년 남자와 다르게 범한은 무표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충격을 받지 않은 듯 보였다.
중년 남자가 범한을 노려봤다.
"어린놈이 그렇게 사나운 정기를 가지고 있다니. 너 어느 가문의 자제냐."
"내가 누군지 알 필요가 있습니까. 나는 그냥 경묘에서 기도를 올리려는 것뿐인데 왜 막는 겁니까."
범한도 상대방을 노려봤다.
"안에 귀인이 계시다니까. 그럼 너는 좀 기다려."
중년 남자는 범한의 기량이 자신과 비슷한 것을 보고 경도의 귀족 가문 자제일 거라 짐작하며 서서히 살기를 거뒀다.
범한이 입꼬리를 올렸다.
"경국 법률에 줄을 서서 기도를 올려야 한다는 규정은 없잖아요."
중년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성기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범한을 밖에 남겨 둔 채 도포를 털며 경묘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