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혼자 걷는 길
범한은 하종위가 경도에서 뛰어난 인재로 이름을 날린 이상 유명 가문의 여식과 혼인해 처가의 힘을 빌리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가 누이에게 마음이 없다면 굳이 술집에서 뛰쳐나와 자신에게 인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 했던 것일까.’
그렇게 짧은 시간에 자신의 신분을 파악하고 자신을 말을 중시하는 누이의 마음까지 간파해 낸 것을 보면 쉽게 볼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하던 중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범한이 창밖을 보고 있는 범사철을 바라봤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범약약에게 말했다.
"동생을 데리고 먼저 집에 돌아가도록 해. 나는 경도를 좀 더 구경할 테니까."
범한의 말에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범사철이 고개를 돌려 멍한 표정을 지었다.
범사철의 얼굴을 바라보던 범한은 자신이 열두 살 때 독살당할 뻔했던 일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범사철과 같은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그런 위험한 일을 당한 것이다.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너는 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범사철이 무서워하며 범약약의 등 뒤로 숨었다. 그도 담이 큰 편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범한의 온화한 미소를 보면 오금이 저렸다.
"무슨 말이에요?"
범한은 술집에서의 일이 정왕 세자에게 자신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범사철이 일부러 꾸민 일이라고 의심했다. 훗날 백작가 상속에 정왕가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만큼 이런 의심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더구나 술집을 선택한 사람도, 소란의 빌미를 제공한 사람도 모두 범사철이었다.
하지만 지금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범사철을 보니 범한은 의심이 흔들렸다. 그렇다면 오늘 술집에서 있었던 일이 모두 우연에서 비롯된 것일까.
마차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범한은 오늘 따라온 호위병 중에서 최소 두 명은 유씨 부인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범약약도 줄곧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집안의 이러한 일들이 고민스러웠다.
마차가 저택 대문 앞에 이르자 범약약이 범사철을 데리고 저택에 들어갔다.
범한은 혼자 계속 경도를 구경했다. 범약약도 같이 가고 싶어 했지만 혼자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웃으며 거절했다. 헤어지기 전 범한은 범사철에게 《홍루몽》에 대한 일은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아우가 자신의 말을 들을지는 알 수 없었다.
등자경이 마차 안에 앉아 자신의 작은 주인을 바라봤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등자경은 자신이 따르는 열여섯 살 청년의 미래가 전도유망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담주의 아름다운 봄 날씨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일 수도 있었고, 앞에 있는 청년에게 감화되어 확신을 품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두 사람 사이에서 모종의 협의가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었다.
범한이 턱을 괴고 골똘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내가 아버지께 너를 달라고 하는 바람에 출셋길이 막혔다고 원망하지는 마."
등자경이 웃으며 공손하게 말했다.
"도련님은 평범한 분이 아니시니 분명 저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범한이 웃었다.
"내가 평범하지가 않다고? 아까 술집에서 철없는 모습을 보였는데도 그런 말이 나와?"
등자경은 말의 의미를 잠시 생각한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련님께서 작은 도련님을 의심하시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봤을 때 작은 도련님은 오늘 일과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마차가 멈춰 서자 바람이 소리 없이 불어왔다. 상쾌함이 느껴질 만큼 시원한 바람이었다. 범한이 등자경을 바라보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아우가 이 일과 관련이 없기를 바래."
범한이 등자경을 바라보다 인상을 구겼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나는 이번에 처음 경도에 왔기 때문에 누구와 부딪힐 일이 없거든. 그런데 아우가 식당에서 나서는 바람에 충돌이 일어났고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정왕 세자가 있었어. 누가 일부러 꾸미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 딱 맞아떨어질 수가 있겠어?"
등자경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작은 도련님에게 거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나쁜 생각을 가지실 분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마님도 계획할 수 없으십니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마님께서는 작은 도련님이 공부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무예도 잘하지 못하면서 매일 노는 데만 빠져 있어 굉장히 못마땅해하십니다."
듣고 있던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기 아들이 부족하니까 나를 함정에 몰려고 했을 수도 있잖아. 새어머니께서는······ 백작가 서자가 무능하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길 원할 거야."
그러자 등자경이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오늘 같은 일은 작은 도련님이 출타하실 때마다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굳이 마님께서 일을 꾸미지 않으셔도 두 분이 같이 나간 이상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네 말은 내가 아우와 같이 나간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눈에는 똑같이 비쳤을 테니 굳이 이런 일을 꾸밀 필요가 없었다는 거군."
"맞습니다."
등자경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작은 부인께서는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길 좋아하십니다."
범한이 소리 내 웃었다.
"새어머니께서는 정말 재미있는 분이셔. 자기 아들이 못났으니 다른 사람도 못나 보여야 한다는 거잖아. 정말 재미있어."
"다만 정왕 세자가 술집에 있었던 건 누구도 예상치 못했겠지요. 그리고 도련님의 행동도 아주 적절했습니다. 비록 일부 서생들에게는 미움을 받겠지만 본인의 기개를 보여 주신 건 잘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건방지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이 무능하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사람들 생각이 그렇게 중요한 건가?"
범한이 바깥을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정말 백작가를 좋게 보고 있을까. 그리고 새어머니는 정말 단순한 여자일까."
그러고는 등자경을 바라보았다.
"이건 고민해 볼 문제이긴 하지만 내 문제는 아니야."
등자경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도련님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범한이 고민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문제는 오늘까지도 나와 혼인할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또 무슨 죽을병에 걸린 건지도 모른다는 거야."
* * *
마차가 천하대도 옆 골목 어귀에서 멈춰 섰다. 멀리 보이는 관아는 처마가 높이 뻗은 것이 하늘로 날아오르려 하는 봉황처럼 보였다. 그리고 가장 멀리에는 아무 특징 없이 음침해 보이는 네모반듯한 건물이 서 있었다.
범한은 등자경을 남겨 두고 혼자 길을 나섰다. 비록 상대방은 이미 자신을 따르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지만 범한은 아직 그를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등자경은 아버지의 측근이므로 그에게 모든 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노점에 가서 감찰원으로 가는 길을 물은 그는 새콤달콤한 탕후루를 하나 사서 먹으며 걸어갔다. 다 먹은 뒤 길에 있는 서점에 들어간 그는 안을 둘러봤다. 서점에는 경서와 사서 등 평범한 책들만 진열되어 있었다. 다가오는 점원에게 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석두기》는 없나?"
그러자 점원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가게 구석 작은 방으로 범한을 데려간 점원이 책 한 권을 건네줬다. 오늘 아침에 책 장수에게 산 것과 같은 책이었다. 범한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은전을 건넸다.
"책은 두었다가 잠시 뒤 범씨 가문에서 사람이 오면 주도록 하게."
아침에 산 책은 누이가 저택으로 가져갔고 이 책은 가지고 있다가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 나중에 종을 시켜 가져오게 할 생각이었다. 점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느 범씨 가문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까?"
"백작가에서 온 사람에게 주면 되네."
범한은 속으로 ‘범씨 일가가 많은 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는 알지 못했지만 사실 범씨 가문은 경도에서도 규모가 상당히 큰 명문가였다. 사남 백작 집안은 원래 범씨 가문 중에서 변방에 속했지만 10여 년 전 노부인이 재물을 쌓은 덕분에 지금은 범씨 가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점원이 공손히 답하고는 책을 계산대에 두었다.
이후 책 판매가 어떤지 물어본 범한은 답변을 듣고는 속으로 해적판을 판매하는 책 장수를 욕했다. 점원은 손님이 책을 산 뒤에도 떠나지 않자 할 수 없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으며 범한은 청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인기척을 살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태연히 점원과 대화를 하면서 정기를 천천히 운용해 일시적으로 청력을 더욱 민감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귓가에 무언가가 들렸다.
일반 사람들과 다른 숨소리를 가진 사람을 두 명 발견한 것이다.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숨소리였지만 정기를 수련한 인물임이 분명했다. 범한은 아버지가 보낸 호위병이거나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일 거라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점원은 손님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자 속으로 아름다운 사람은 인상을 써도 아름답구나,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자신이 말을 잘못한 건 아닌지 눈치를 살폈다.
* * *
잠시 뒤 서점 뒷문으로 나온 범한은 자신을 미행하던 사람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하자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 시절 비개에게 독약을 사용하는 방법 말고도 미행을 따돌리는 방법과 여러 가지 것들을 배워 두길 다행이었다.
범한은 사람들을 따라 천하대도 돌길을 걸어가면서 양쪽에 서 있는 건물들을 바라봤다. 고풍스러운 건물들 앞에 잔잔한 물이 흘렀다. 관아에 가려면 거기 놓인 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물이 맑아서 주변 가로수 가지까지 전부 비쳤다. 물 위에 비친 나무다리와 주변 풍경이 아름다웠다. 이따금 바람을 타고 날아온 복숭아 꽃잎이 물 위에 떨어져 잔잔히 흘러갔다.
다리를 건너던 범한은 발밑에 졸졸 흘러가는 물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봄 풍경을 감상하니 근심들이 모두 날아가면서 홀가분했다.
감찰원 입구에 도착한 그는 석회암으로 지어진 건물을 바라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관아치고는 볼품없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들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비개의 못생긴 얼굴을 떠올리고는 어쩐지 이해가 되면서 건물과 사람도 닮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렇게 건물로 들어간 범한은 감찰원 관리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께름칙했다.
그는 자신의 차림새가 잘못됐나 싶어 슬며시 고개를 숙여 옷차림을 확인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범한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참다못한 범한이 옆을 지나가던 하급 관리를 붙잡았다. 생기 없는 얼굴을 보자 범한은 긴장되면서도 비개의 동료를 찾은 것 같아 반가웠다. 그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생기 없는 얼굴을 한 하급 관리가 감찰원 안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한참 범한을 살펴봤다.
"네, 안녕하세요."
상당히 투박한 말투였다. 범한이 침을 꿀꺽 삼킨 뒤 웃으며 물었다.
"저······ 실례지만 사람들이 모두 저를 쳐다보는 이유를 아시나요?"
범한의 질문에 하급 관리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쑥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범한이 재미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낯선 사람은 들어오지 않는 장소에 갑자기 낯선 사람이 등장했다면 저절로 눈길이 가지 않겠어요?"
범한은 자신을 쳐다보는 이유를 알았음에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
"감찰원도 관아잖아요? 조정의 기구인데 공무를 처리하러 오는 사람이 없는 건가요?"
하급 관리가 문밖을 가리켰다.
"저기를 보세요."
고개를 돌린 범한은 아무도 없음을 발견했다. 심지어 몇몇 행인들은 감찰원 앞을 지나가는 게 무서운지 멀리 돌아가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하급 관리가 크게 웃었다. 입꼬리를 따라 양 볼에 자글자글 주름이 생겨 다소 무서워 보였다.
"경도 사람들은 감찰원에 오는 걸 싫어하지요. 더구나 감찰원은 조정의 기구이면서도 내부 업무만 처리합니다. 황제께서 감찰원이 다른 6부 관아에 개입하는 걸 허락하지 않으셔서 우리는 다른 관아와 업무를 주고받을 수 없거든요."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군요. 제가 허락도 없이 함부로 들어왔네요."
하급 관리가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감찰원이 뭐 하는 곳인지 모르시나요?"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그는 감찰원 제3부를 주관하는 비개의 제자였기에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약간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들어올 생각을 하시다니."
하급 관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은 이곳을 속세의 지옥이라 생각해요."
범한이 무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염라대왕을 본 적이 있어서 겁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