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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5화 (45/1,108)

045화 절개란 무엇인가

하지만 범한은 다른 사람과 달랐다. 등자경과 곽씨 집안의 호위 무사의 동선이 잠깐 겹쳤을 때 그는 아무 인기척 없이 몸을 숨겨 앞으로 나가서는 단번에 빈 공간을 찾아내 주먹을 한 대 날렸다.

사람들이 생각했던 피 터지는 잔인한 싸움터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끝나 버렸다.

범한은 오른손을 거둔 후 전혀 움직이지 않은 사람처럼 싱글거리며 원래 있던 자리에 서 있었다.

곽씨 집안의 호위 무사는 범한의 주먹 한 방에 코뼈가 부러진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식당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얼핏 보니 눈물도 같이 흐르고 있었다.

범한은 이 주먹 한 방의 효과가 심히 만족스러웠다. 과연 비개가 허투루 가르쳐 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스승은 코의 그 부분이 부러졌을 때의 고통은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고 참을 방법이 없다고 했는데 과연 그러했다.

곽보곤은 자신의 집안에서 무술 실력이 가장 뛰어난 호위 무사가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진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그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범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범한은 그를 보고 무슨 영문인지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뒤에 있던 약약의 손을 잡고 당당하게 식당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당에 있던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진 황당한 광경에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싸우는 걸 보긴 했지만 귀족 가문 자제들이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아무리 운이 좋은 사람이라도 이런 보기 드문 광경을 목격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등자경도 내심 속이 상했다. 자신의 실력이 상대편 호위 무사보다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도련님이 직접 나서 버리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갑자기 조금 전 벌어졌던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생각났다. 도련님은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아주 정확한 힘과 각도로 상대편에게 제대로 한 방을 날렸다. 어떻게 보면 살짝 소름 끼치기도 하지만 이런 놀라운 능력을 가진 범한이 새삼 달리 보였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범씨 일행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식당 한편의 귀빈실에 있던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왔다. 밖이 시끌벅적하니 직접 나와서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 사람들 사이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귀티가 흐르는 화려한 차림의 사내가 범약약을 보고 눈이 반짝였다. 그 사내는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건넸다.

"약약, 오늘은 시간이 좀 있었나 보네. 오랜만이야."

그 사내는 출중한 외모에 진한 눈썹, 오뚝한 코에 가느다란 입술을 가진 한눈에 봐도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해 보였다.

흠칫 놀란 범약약도 인사를 건넸다.

"세자께서도 여기 계셨군요."

그리고 곧바로 범한을 소개해 주었다. 범한은 이 사람이 자신의 집안과 친분이 두터운 정씨 왕가의 왕세자일 줄 생각도 못 했기에 의례적인 인사만 몇 마디 건네고 말았다.

왕조와 범씨 가문은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왕세자는 범약약이 범한을 소개할 때 단번에 범한의 신분을 알아차리고는 저도 모르게 살짝 놀랐다.

그는 범한의 자연스럽고 의젓한 말투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신감을 느꼈다. 얼굴에 새겨진 부드러운 미소 때문인지 편안했다.

바로 그때, 황궁에서 편찬 일을 하는 곽보곤도 왕세자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이미 다른 사람에게 조금 전 있었던 두 집안의 작은 소란에 대해 들은 왕세자는 몹시 흥미로운 듯 범한에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지식인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 있으신가 보군요."

"책을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식인라고 할 수 있죠."

범한은 왕세자에게 예를 갖춰 대답했다.

그는 이 세계의 신분 계층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팔고문(명·청 과거 시험에 쓰였던 문체의 하나. 격식이 고정되어 있으며 매 편은 여덟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 그중 기고(起股)에서부터 속고(束股)까지의 네 부분은 매 부분이 모두 두 고(股)의 대구로 쓰여 모두 여덟 고(股)가 되므로 붙여진 이름.)을 읽어야만 지식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도 나름 책을 읽는 지식인인데 어떻게 지식인들에게 나쁜 감정을 가질 수 있겠어요. 단지······."

범한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전 그저 소위 재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는 것뿐이에요."

이 말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범한에게서 또 어떤 기발한 대답이 나올까 지켜보고 있었다. 왕세자조차도 매우 흥미로운 듯 대답을 기다렸다.

"공자께서는 왜 재자들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왕세자는 예의를 갖췄다. 하지만 범한은 범씨 가문의 본래 호적으로 입적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장소에서는 공자라는 호칭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의 성은 언급하지 않았다.

범한은 이 사회의 규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언짢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가 재자들을 무시하는 이유는 요즘 풍조 때문이죠. 책을 본다는 사람들이 기생집이나 드나드니 책 냄새를 풍겨야 하는 이들에게서 여인들 분 냄새만 풀풀 나지 않습니까. 학식을 쌓아야 하는 이들이 그러고 다니니 앞으로 이 나라가 어찌 될지 걱정이 돼서 그런 겁니다."

그의 말에 가시가 있긴 했지만 악의는 없어 보였다.

왕세자가 하하하 웃자, 식당에 있는 사람들도 다 같이 웃었다. 한낮에 벌어진 소란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어디서 나타났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씨 집안 도련님은 왕세자와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반대로 힘에서도, 말에서도 범한에게 모두 밀린 곽보곤은 할 수 없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범한은 왕세자의 술자리 초대를 완곡하게 거절하고 하는 수 없이 다른 날로 약속을 잡기로 했다. 범씨 집안 일행은 그렇게 자리를 떠났다.

식당을 나와서 마차에 오르기 바로 직전에 하종위라는 서생이 급히 뒤따라왔다. 그는 범한을 바라보고는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뭐가 고맙다는 거죠?"

범한이 웃으면서 물었다. 하종위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전 원래 귀족이라는 사람을 깔보고 무시한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오늘 공자께서 한마디로 꼬집어 주신 덕분에 깨달았어요. 저도 그런 분위기를 즐겼다는 걸요. 여전히 진부한 예법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범한은 하종위의 태도가 너무 빨리 돌변하자 살짝 인상이 찌푸려졌다.

너무 강직해 보이는 이 사람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오늘 소란은 사실상 하종위가 범한이 ‘《홍루몽》 작가’라고 여기고 이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면서 시작된 것이므로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았다.

"사람마다 약한 부분이 있는 법이죠. 때로는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 약한 부분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오늘은 제가 이것저것 되는 대로 지껄인 것이니 너무 책망치 마시죠."

하종위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옆에 있던 범약약에게 인사를 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범한은 하종위의 얼굴빛이 살짝 불그스레해진 것을 눈치채고 그가 왜 웃으면서 옆에 있는 누이를 바라봤는지 이해가 갔다. 하지만 범약약은 그가 왔다 간 사실도 모르는 듯 여전히 무표정하고 평온해 보였다.

역시 하종위의 짝사랑이었다. 범한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누이의 남편 될 사람은 재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드시 서로 마음이 맞고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범한이 떠난 후 곽보곤과 하종위도 얼굴을 들고 있을 수 없었는지 얼른 자리를 떠났다. 일석거 3층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지만 식당에 있는 사람들은 조금 전 있었던 소란에 대해, 특히 범씨 집안의 도련님에 대한 끝없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들 사남 백작에게 저런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들어 본 적이 없기에 범약약과 사촌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물론 정왕 세자는 범한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바깥사람들에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저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다들 황태자가 문학을 좋아해서 그런 자들과 친하게 지낸다고들 하는데, 내 오늘 보니 그 사람들 중에 제대로 된 사람이 하나도 없었구나."

옆을 지키고 있던 막료(장군을 보좌하는 참모관)가 입을 열었다.

"하종위라는 자는 사람이 어떠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증문상의 제자이니 내년 과거에는 합격할 것입니다."

정왕 세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종위는 소질을 있는데 성품이 좀······."

사실 정왕 세자는 조금 전 벌어진 모든 상황을 다 듣고 있었다. 그때 또 범한이 절개에 대해 말한 부분이 생각나서 하하 웃었다.

"말 그대로 절개가 부족해."

막료도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범건 대인이 십수 년간 서자 아들을 숨기고 있다던데 정말이지 흥미롭네요."

정왕 세자가 부채를 치며 뭔가를 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아까 범한이 곽보곤을 조롱하던 말이 생각나자 얼른 부채를 탁자 위에 다시 두었다.

"곽보곤도 자기 아버지의 권력과 황태자와의 친분을 믿고 날뛰는 게 범한의 눈에는 별 볼 일 없어 보였나 보군. 그렇게 말하기도 사실 쉽지 않은데 말이야."

황족인 정왕 세자는 현재 황제 폐하와 백작가 사이가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참모의 말을 들었다.

"범한이란 사람은 무엇에 쫓기는 것처럼 급히 경도로 올라오더니 오늘 술집에서······ 느닷없이 소란을 일으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걸 보면 경거망동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정왕 세자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젊은 사람이면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자신도 갓 스무 살을 넘긴 청년이라는 걸 망각한 듯 어른스러운 말투였다. 세자는 백작가 서자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게다가 백작가는 현재 혼사를 준비하는 중이니 당사자인 범 공자가 너무 조용하게 있는 것도 좋을 게 없어. 오늘 일로 내일이면 경도 모든 사람이 백작가 서자를 알게 될 것 아닌가."

그러더니 순간 무언가 깨달은 듯 이마를 치고는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자네의 말도 맞는 것 같군. 조정 일에 관심 없는 아버지를 둔 아들이 하마터면 불효를 저지를 뻔했어.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신경 쓰지 말고 마시자고, 자!"

그가 웃는 얼굴로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향해 술잔을 들어 보이고는 단숨에 마셨다. 사람들은 재빨리 따라 마시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세상에 관심이 없다면 어째서 백작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2 황자와 가깝게 지내는 것인가?’

* * *

마차를 타고 조용히 가던 중 범약약이 피식 웃자 범한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

범약약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호흡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오라버니가 아까 한 말이 너무 직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무슨 말이?"

범한은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지내려 한 계획과 다르게 오늘 술집에서 소란을 피워 마음이 무거웠다.

"그······ 종일 노느라 피골이 상접해서는 기개랍시고 부채나 흔드는 거냐고 했잖아요."

범약약은 범한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하고는 웃음 지었다. 옆에 앉아 있는 범사철도 천진한 표정으로 웃다가 두 사람이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자 이내 시무룩해했다.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기개를 중시하는 거야 좋지만 그것이 책 읽는 자들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지. 게다가 뛰어난 인재라는 사람이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더라고. 매일 하는 일 없이 놀면서 쓸모없는 공론만 늘어놓는 사람은 과거 시험을 보러 가서는 안 돼. 더구나 그 곽보곤이란 사람이 조정에 들어가 조언을 한다면 국가의 앞날이 밝을 수가 없잖아."

이 말을 들은 범약약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오라버니의 말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랐기에 자신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정왕 세자 옆에서는 말을 조심했잖아요."

범약약은 자신의 오라버니야말로 지식인에 대해서 진실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심했다기보다는 부드럽게 했을 뿐이야."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가지 않지만 인재로 알려진 사람이 기생집에 드나드는 걸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아. 다만 오입쟁이는 오입쟁이일 뿐이지. 기생집을 드나들면서 뛰어난 인재라고 떠벌리는 건 매춘부가 열녀문을 세운다는 것만큼 터무니없는 거야."

범약약이 쑥스러워했다.

"오라버니는 너무 직설적이에요."

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오라버니야말로 인재라 불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끼리 있으니까 하는 소리지."

그러던 중 범한이 무언가 떠오른 듯 정색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동생아, 너는 절대 스스로 인재라 떠벌리는 사람과는 혼인하지 말아라."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던 범약약이 인상을 구겼다.

"무슨 터무니 없는 소리예요!"

"그 하종위이란 사람이 뭐 하는지 아니?"

범사철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태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에요. 집안은 가난하지만 머리가 좋아서 집현관 대학사 증문상의 제자라고 들었어요. 공부도 잘하고 시도 몇 편 지었는데······ 모두 내년 과거 시험에서 최소 3등 안에는 들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누이를 향해 말했다.

"겉보기에는 진실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참을성이 지나치고 태도가 진실하지 않아. 나는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은 별로야. 너도 앞으로 조심하면서 되도록 교제하지 말도록 해."

범약약이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범약약에게 범한은 오라버니이자 스승이자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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