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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3화 (43/1,108)

043화 붉은 보물 책

범한은 얼마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은전 한 냥을 내밀었다. 이 은전은 모두 담주에서 신문을 팔아 번 돈으로 그냥 시원하게 쓰고 싶었다.

중년 여인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에서 떠났다. 그제야 범약약이 범사철을 데리고 앞으로 왔다. 범사철의 손에는 찹쌀로 만든 인형이 아니라 설탕으로 만든 사람 모양 과자가 들려 있었다. 과자가 맛있는지 연신 혀로 핥느라 정신이 없었다.

"방금 뭐 했어?"

범약약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범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범사철이 나서서 비꼬아 댔다.

"나는 봤지. 저 여자한테 책을 사더라고. 어디다 숨긴 게 분명해. 이런 데서 사는 책들은 다 저속해서 볼 수도 없는 것들이잖아."

어리둥절해하는 범약약은 무슨 일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범한은 당장이라도 약약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때마침 식당에 등자경이 나타나 마련된 자리로 안내를 해줬다. 이 틈을 타서 범한은 약약의 손을 잡고 식당 위층으로 올라갔다.

순간 멍하게 있던 범사철도 얼른 뒤따라갔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3층까지 올라가고 나니 그나마 조용했다. 이미 예약이 꽉 찬 상태였는데 보아하니 등자경이 어떻게 자리를 마련한 것 같았다. 범한은 아버지에게 등자경을 붙여 달라고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탁자에 앉은 범한은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는 범사철을 한번 쳐다보고는 살짝 웃었다. 그리고 크게 개의치 않고 손에 들고 있던 붉은 책을 약약에서 건넸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약약은 책을 건네받고 속표지를 들춰 보았다. 조금 전 범한과 마찬가지로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시 책장을 넘겨 보고는 살짝 긴장한 투로 말했다.

"오라버니, 나도 처음 보는 거야."

범한은 웃는 얼굴로 약약을 안심시켰다.

"너한테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그는 처음부터 약약이 자신이 보내준 《홍루몽》을 책으로 만들어 친한 친구들과 돌려 봤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 친구들도 모두 귀족 가문 출신이라 외부로 유출됐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시장에서 팔릴 줄을 몰라서 그 점이 의아할 뿐이었다.

오늘 이곳에서 《홍루몽》을 보고서야 범한은 자신이 이곳의 불법 복제 시장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 * *

기억을 더듬던 범약약은 한 사건을 떠올렸다. 작년에 그녀가 68화 《홍루몽》을 제본하려고 규방 안에 단단한 나무로 눌러 놓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유가 공주가 놀러 와서 시간을 보내다가 때마침 이 책을 발견하고는 다시 돌려주지 않고 아예 가져가 버렸다.

하지만 약약은 오라버니의 피땀이 담겨 있는 책이었기 때문에 집 밖으로 떠돌다가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어떻게 해서든 되찾고 싶어서 유가 공주에게 사정사정하고 성질도 부려 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황비마마께 부탁해 궁 안의 여관을 시켜 며칠 내내 베껴 쓰게 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범약약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한 권이던 이 책이 열권, 아니 백 권으로 늘어나 모두가 아는 비밀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심지어 시장에서 백성들이 사고팔고 있다니 참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썼다는 건 아무도 모르지?"

범한이 다시 책을 가져다가 이리저리 넘겨 보더니 저자명에 ‘조설근’으로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안심했다.

범약약이 자책하며 말했다.

"오라버니, 명리는 뜬구름 같은 거라고 생각해.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 이 책이 나온 것도 잘못인데 어떻게 오라버니가 쓴 거라고 말하겠어."

명리는 뜬구름 같은 거라고 생각하라고? 범한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약약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는 것이 오히려 머리를 다 헝클어트리고 있었다.

"이왕 쓴 거, 사람들이 보면 좋지."

아까 중년 여인에게 주었던 은전을 생각하니 몹시 아까웠다.

"그냥 시장에서 은밀히 팔리고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봐서 그래. 생각해 보면 아깝잖아."

한참 대화를 나누다 음식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둘 다 말을 멈췄다.

바로 그때, 범사철의 한마디로 침묵이 깨졌다. 그는 살짝 흔들리는 범한의 눈빛을 바라보며 어눌하게 부러운 듯 말했다.

"그 책······ 네가 쓴 거야?"

이 말을 들은 범약약은 그제야 동생이 두 사람의 모든 대화를 듣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혹시라도 유씨 부인에게 말한다면 범한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그녀의 차가운 얼굴에 순식간에 걱정이 드리워졌다.

범사철의 눈빛은 어느새 놀라움에서 약간의 존경심으로 변했다.

"왜?"

범한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범사철은 결국 착한 척하는 것을 그만두고 원래 모습대로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냥 놀랐을 뿐이야, 그 책을 쓴 게 너라니."

범한이 물었다.

"너도 이 책 봤어?"

범한은 이전 세계의 사람들 중 스무 살쯤 《홍루몽》을 보고 좋아하게 된 사람들이 나중에 커서 여자를 꾀는 문학청년이 되곤 했던 것을 떠올렸다.

"아니."

범사철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주 조금 봤는데 재미가 없더라고."

이 말을 하고 나서 어떻게든 자존심을 내세워 보려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우리 선생님이 보시더니······."

범사철은 잠깐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있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아주 감탄하시더라고. 이 작가의 문체가 특이하고 마음속에 분노가 쌓였다나 뭐라나."

아주 그럴싸한 평가였지만 범한은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그래서 너도 감동받았다는 거야?"

"나 말고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그리고 잠깐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네가 쓴 책을 좋아하시더군."

갑자기 그의 눈에서 탐욕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내가 읽어 보진 않았지만 지금 시장에서 그 책이 권별로 팔린다는 건 알고 있어. 한 권에 은전 여덟 냥에 팔린다고 하더군."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치 우상이라도 바라보는 것처럼 범한을 올려다봤다.

"몇 글자 써서 이렇게 큰돈을 벌다니 정말 대단해. 누나가 왜 그렇게 널 우러러보는지 이제야 조금 알겠어."

"난 큰돈을 번 적이 없는걸."

범한은 범사철의 말을 바로 잡아 주었다. 분명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것 같다. 그런데 자신의 재능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난데없이 책으로 돈을 버는 것을 부러워하다니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아버지 사남 백작이 경국 황제의 재정을 관리하는 사람이니 그게 범사철에게까지 이어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어린아이가 은전 한 냥에 이토록 열광할 리 없었다.

범사철이 흥분해서 말했다.

"앞으로 언돈을 벌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투자해 줄 테니 말이야."

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범사철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런 아이와 자신이 서로 이익을 위해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타까울 뿐이었다. 사실 범한 자신은 범씨 집안의 가업에 별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유씨 부인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범한의 존재가 자신의 아들을 위협할까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별안간 그는 마음을 바꿔 시도는 해보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피가 섞인 형제지간이니 비참한 상황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다.

"왜 날 따라온 건지 아직 대답 안 했다. 오늘 학교 안 가도 돼?"

이미 마음을 정한 범한은 배다른 동생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나름 즐기기로 했다.

범사철은 나이는 어리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는 아니었다. 방금 자기도 모르게 드러낸 대수롭지 않은 생각이 상대방에게 좋게 작용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어머니가······ 형님이 뭐든 다 잘하니 옆에서 보면서 잘 배우라고 해서······."

범한은 귀여운 척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연신 귀여운 척하는 범사철을 보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제야 범한은 범사철이 자신을 따라온 게 유씨 부인의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자신이 호의를 가져도 상대는 호의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이다. 마치 아버지가 자신을 이용 수단으로 생각해서 억지로 혼인을 시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범한은 게 눈 감추듯 접시를 싹 비워 냈다. 젓가락질이 얼마나 정확한지 집는 음식마다 쏙쏙 입으로 들어갔다. 동생들은 눈만 껌벅거리며 할 말을 잃은 채 멀뚱히 앉아 있었다.

범한은 입술을 한번 쓱 핥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경도는 음식도 끝내주는구나."

범약약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몸을 반쯤 돌려서 열심히 《홍루몽》을 보고 있었다. 범한과 범사철은 한창 맛있게 식사 중이었다. 범사철은 먹으면 먹을수록 답답했다. 아무리 먹어도 범한보다 많이 그리고 빨리 먹을 수 없는 게 무척이나 한스러웠다.

범약약의 미간에 생긴 주름이 점점 짙어졌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홍루몽》와 자기 방에 있는 책에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단지 속표지에 일부러 글의 자극적인 부분을 따서 적어 놓은 것 때문에 경도 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음란한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 같은 그녀의 표정을 감지한 범한이 젓가락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이건 그러니까 책을 팔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야. 기분 나쁠 거 없어."

그때부터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범약약은 판매 수단이라는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하긴 했지만 범사철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얼떨떨했다.

"여기 책 한 권이 있어. 사람들은 이 책을 사기 전에 먼저 무슨 내용인지 살펴볼 거 아니야. 그래서 여기 서문이랑 목차 같은 것들이 있는 거야.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책의 내용을 다 알려 주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야 한다는 거야."

범한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네가 화가 난 건 양심 없는 책 장수들이 이 책의 자극적인 부분을 가장 앞부분에 두어서 일 거야.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이 이 책의 모든 걸 설명하지는 않잖아. 하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은 충분히 끌 수 있지. 안 그래?"

범약약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오라버니의 책이 멋대로 팔리고 있는 것에 대한 화가 다 풀리지는 않았다.

"근데 책 장수들은 그렇게 해야 해."

범한은 약약의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만약에 나라면 난 그 사람들보다 더했을 거야. 한 권에 10회가 들어 있다면 난 매회 표제를 만들었을 거야. 유혹적인 말들로 사람들이 반드시 사 가게 만들었을 거야."

"예를 들어?"

"예들 들어 많은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

"어떻게 쓸 건데?"

범약약은 이미 오라버니의 생각을 간파한 듯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책의 한 부분을 짚었다. 바로 23회로, 〈서상기(西廂記. 원(元)대 희곡 대표작의 하나로, 왕실보가 지음)〉, 〈모란정(牡丹亭. 중국 명나라 때에 탕현조가 지은 희곡)〉에 나오는 시들이었다.

범한이 히히거렸다.

"기왕 염곡(艳曲. 은밀한 사랑 노래)이라는 말이 들어갔으니까 당연히 잘 써야겠지. 나라면 말이지, 어디 보자. 여기 이 부분은······ 정원에 있는 많은 여인들, 혼돈의 세계, 천진난만한 웃음소리, 마치 보옥의 마음과 같네. 보옥의 마음도 여기가 아니라 저 멀리 정원에 있으니 그저 떨어지는 잎사귀만 바라볼 뿐이네."

범약약은 고개를 숙인 채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역시나 아무 말이나 둘러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전 회의 제목에 ‘염곡’이라는 두 글자로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내다니 다른 사람이 봐도 억지로 꾸며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뭐야, 오라버니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범사철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오, 능력 있는데."

범한이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차를 내뿜었다.

바로 그때, 옆방에서 몹시 건방진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이렇게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거야. 온통 외설투성이인데 이게 재능 있다고?"

범씨 남매들이 자리를 잡은 ‘일석거’라는 식당은 경도에서 손꼽히는 고급 식당으로 매일 점심시간만 되면 관리들과 인재와 미인들이 와서 술과 음식을 즐기곤 했다. 하지만 재자들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또 미인들이 어쩌다 여기까지 나오게 됐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여하튼 3층은 제일 조용하고 좋은 자리여서 그에 걸맞은 신분이 아니면 절대 올라갈 수 없었다.

일석거 3층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신분이 보장된 사람들만 가능했기 때문에 서로 다툼이 일거나 문제가 발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경도가 작은 곳은 아니지만 관리 사회라는 게 누구와 얽혀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방금 범한이 노점 문학가라는 평가를 반박한 사람은 명실상부한 재자임이 분명했다. 성은 하, 이름은 종위. 뛰어난 재명으로 경도 사람들에게 극찬을 받아 온지라 그야말로 뼛속까지 오만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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