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화 부자(父子)
당시 경국은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었다. 지난 10년간 좋은 기후가 이어져 풍년이 계속되면서 백성들도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천고의 명군이요, 천고의 통치로 극찬을 받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천고의 부패 관리, 천고의 간신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범한과 혼인할지도 모르는 소녀의 아버지인 임약보는 재상 자리에 앉은 간신으로 유명했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귀족 집안의 자제도 아니었다. 과거 시험을 보고 관직에 올라 소주(蘇州)의 평사(評事)를 시작으로 곧 경도의 살림을 돌보는 첨사부(詹事府)의 주부(主簿)로 일하다가 또다시 궁궐 호위병인 남아(南衙)로 일하다가 감찰원에서 도장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 했다. 그리고 다시 한림원(翰林院)의 학사로 지내다가 지난번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육부(六部)로 옮겨 가 핵심적인 업무를 담당하며 각 부의 장관급인 시랑과 상서(尙書)직을 맡았다. 이렇게 그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한 사람의 아래, 만 사람의 위’에 선 문관의 우두머리인 재상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여태껏 재상이 지낸 관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문관과 무관에 그치지 않고 문학 시종 대신의 사제와 감찰관까지 지내 오면서 수차례 기복은 있었다. 그래도 경국의 모든 관직을 지내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면서 그의 지위도 더디지만 안정적으로 높아져 갔다.
들리는 소문으로 임약보는 황궁 내부와 관련된 세력도 없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계도 없이 그저 경국의 관리 사회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며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이 점은 몹시 의아했다.
임재상은 겉으로는 청렴해 보이지만 음흉한 속내를 품고 있어서 뇌물도 많이 받았다. 게다가 문관 출신과 귀족 가문의 싸움에서 적지 않게 미움을 받아 권력가들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고 백성들에게도 미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10년 동안 열심히 공을 들여 일찍부터 경국의 문관 출신에 무수히 많은 잔가시를 뻗치고 있었기에 쉽사리 쓰러지지 않고 굳건히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어사(御史)를 지낸 재상을 탄핵하여 끌어내렸는데, 이에 대해 아무런 대응책이 없던 재상은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경도의 관리들은 그를 무척이나 미워했으나 앞장서서 그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경도에서 오직 황제만이 재상의 생사를 쥐락펴락할 수 있을 뿐,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라는 인식이 관리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오직 감찰원 진 원장만이 재상의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있을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럴 용기도 없다는 것이 권력자들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난번 감찰원장이 침을 뱉었다가 3년 치의 월급을 바치는 대가를 치러야 했는데 이는 황제가 친히 내린 처벌이었다.
재상에 대한 황제의 신임이 하늘을 찌르자 청렴함을 자처하던 관리의 자제들은 절망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갑자기 신문에 재상 임약보에게 사생아 딸이 있다는 소식이 실렸다.
이 소식의 출처는 다름 아닌 황궁이었기에 경도의 관리 사회에서도 적지 않은 파장이 일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재상에 대한 황제의 마음이 변하여 새로운 사람을 앉히려는 것이라는 등의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예상을 벗어나 황제가 직접 이 사건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 소문은 점점 사그라졌지만 사람들의 이목은 재상의 사생아 딸에게 쏠리고 말았다.
* * *
범한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결혼할 여인에게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의 출신과 같다니 이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바깥의 움직임이 소란스러워졌다. 두 사람 모두 누군가 저택에 돌아왔음을 눈치 채고 눈빛만 주고받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범한이 누이에게 한가한 시간에 자신을 데리고 시내 구경을 시켜 달라고 부탁하면서 눈빛을 보내자 범약약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등불이 켜졌다. 아직 어둑어둑하지 않아서인지 등불이 희미하게 보였다.
한 상 차려진 거실 탁자에 다섯 명이 둘러앉아 있었고 많은 종들이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유씨 부인은 여염집 부인들처럼 먼저 가장의 시중을 들지 않고 중년 남성 옆에 앉아서 자유롭게 행동했다.
‘저기 중년 남성이 아버지인가?’라는 생각이 들자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이마에 보기 좋게 주름살이 생겼다.
사남 백작은 근엄하고 단정한 외모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턱수염도 멋지게 나 있었다. 딱 봐도 진지하고 엄격해 보여서 쓸데없는 말을 하거나 웃을 것같이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서재로 향했다. 사남 백작이 앞장서고 범한이 그 뒤를 따라갔다.
처음으로 아버지라는 사람을 일대일로 만나는 자리였지만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몰려오지는 않았다. 아마도 지금까지 한 번도 앞에 있는 이 사람을 진짜 아버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사남 백작은 자기 앞에 서 있는 청년을 가만히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부드럽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엄마를 정말 많이 닮았구나."
범한은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이제야 만난 아버지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무척이나 많았다. 그래도 예법상 먼저 질문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간 담주 생활은 어떠했느냐?"
"그런대로 잘 지냈습니다."
"너라면 이미 등자경의 입을 통해 내가 이번에 널 경도로 부른 이유를 알아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습니다."
"혹시라도 불만이 있느냐."
"아닙니다."
범한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여기까지 마차를 타고 와서 괜찮습니다. 그리고 임씨 가문의 그 여인과 반드시 혼인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범한의 말이 끝나자 서재는 순식간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사남 백작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이 혼인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느냐?"
"그건, 우리 집안이 끝없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데서 그치지 않고 조정에서도 막강한 권력을 자랑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 아닌가요?"
범한이 살짝 꼬아서 대답했다.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이 사람에게 감정이라곤 없었기 때문에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자식의 혼인을 정치적 계략에 사용하려고 하는 모습에 며칠간 잘 참고 있던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좋다, 아주 좋아. 너도 화를 낼 줄 아는구나."
사남 백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살며시 웃음이 번졌다.
"담주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난 네가 화를 낼 줄 모르는 아이라고 생각했단다. 이제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감정을 숨긴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인데 말이야."
"그게 뭐 어때서요?"
범한은 이상하다는 듯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 무엇인가 결정한 듯 보였다.
"먼저 아버님께 한 가지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냐?"
"전······ 그렇게 잘 제어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범한이 매우 솔직하게 말했다.
"난 너를 제어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비록 네가 내 아들이라도 말이다."
사남 백작 범건은 차가운 눈초리로 청년의 눈을 쳐다보았다. 범한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그는 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재상 집안과의 혼인은 반드시 그리해야만 한다. 이 일에 타협 같은 건 결코 없다."
고개를 숙인 범한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해보시죠."
그 웃음에는 강한 자신감과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화가 난 사남 백작은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의자 손잡이를 꽉 부여잡았다. 잠시 후 화를 누그러트리고는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 네가 이해를 잘 못 하는 것 같은데, 임씨 집안 그 아이는 온화하고 교양도 있어서 아주 잘 어울릴 거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 집안이 자식들 혼인으로 입지를 다질 필요가 있겠니? 임약보 같은 작자가 우리 집안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범한은 아버지의 진지함에 경악했다. 재상이라는 사람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왜 저렇게까지 혼인을 성사시키려고 하는 걸까. 단지 그 집 딸이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사람이라서? 이유가 어떻든 범한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왜 꼭 혼인을 해야 하는 거죠?"
범한이 잔뜩 인상을 쓰며 묻자 사남 백작이 살짝 미소를 보였다.
"너와 혼인할 그 아이의 어머니가 공주마마시거든. 그러니까 황제의 친누이지. 이분은 여태 혼인도 안 하고 암암리에 황실의 상호를 관리하면서 경국 전체와 황궁에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자금을 제공해 주고 계시지."
범한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과 결혼할 사람이 공주마마의 딸이라니! 그럼 재상과 공주마마의 관계가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아주 친밀한 사이라는 말인가. 어쩐지 재상의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돌아보니 그렇게 순조로울 수가 없더니, 다 이런 숨겨진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되지 않았다. 범한의 아버지도 황제와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사이가 아니었다면 결코 몰랐을 사실이다. 불현듯 범한은 아버지가 이렇게 중요한 비밀을 처음부터 알려 줄 의도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남 백작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도 잘 알겠지만 이 얘기는 절대 밖으로 흘러나가선 안 된다. 누구라도 이 사실을 발설하는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게다. 그러니 너도 지금 들은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하려무나. 내가 너에게 이 비밀을 알려 준 까닭은 나중에 그 여인을 만났을 때 혹여나 실수하지 않도록 하라는 이유에서다."
순간 범한은 오죽이 예전에 해줬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마마가 관리한다는 황실 상호가······ 원래 섭씨 집안 사업 아니었나요?"
"그렇지, 맞다."
사남 백작은 자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 청년이 문제의 핵심을 너무나 잘 꿰뚫어 보자 마음에 쏙 들었다. 그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공주마마에게 있는 하나뿐인 딸인 데다가 황제께서 황실의 모든 상호를 공주마마가 관리하도록 하셨다. 그러니 그 집안에 장가가는 사람이 공주마마의 사위가 되는 동시에 미래의 황실 상호를 관리하는 사람이 되는 거지."
너무 많은 말을 해서 사남 백작은 살짝 피곤하긴 했지만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범한을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 명확하게 말했다.
"그 상호는 원래 네 어머니 것이었다. 그러니 네가 원래 네 것을 되찾아 와야 하지 않겠니?"
잠시 적막이 흘렀다.
"아버지의 주도면밀하고 원대한 계획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범한은 아버지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는 다시 물었다.
"상대가 공주마마가 아니고 황실과 관련된 자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어머니의 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이 방법은 약간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당연히 그다음 수도 있지. 네 아버지가 호부 시랑이라는 걸 잊지 말거라. 나도 돈 관리를 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범건은 흐뭇하게 범한의 냉철한 두뇌와 태도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너에게 해줄 얘기가 있다. 임약보 이 영감은 이 일에 대해 크게 발언권은 없다. 하지만 우리 두 집안의 혼인에 대해서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모양이니, 경도에 있는 동안 부디 잘 지내 주길 바란다."
"왜요?"
범한은 의심스러웠다. 비록 임약보가 재상이라는 높은 위치에 있지만 그 또한 경도에서 범씨 집안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을 터. 그러니 이렇게 든든한 집안과 혼인을 맺으면 좋은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왜 여전히 반대를 하는 것일까. 만약 출신 때문이라면 임씨 집안의 그 여인도 같은 처지이다.
"사람마다 각자의 위치가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고민을 하는 법이지."
범건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범씨도 경도에서 제법 큰 집안이고 임약보는 문관의 수장으로 큰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이런 두 집안끼리 혼사가 성사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세력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거란다. 황제께서도 그의 저의가 무엇인지 살피고 계시고 또 임약보를 따르는 문관들 중 젊은 관리들이 혹여나 다른 마음을 품을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야."
그러자 범한이 한숨을 내쉬며 비웃는 투로 말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는데 보아하니 이쪽에서만 안달이 난 상황이네요. 우리 집안의 일방적인 생각이었군요."
"그렇단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너를 마음에 들어 하도록 방법을 생각해 보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