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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8화 (38/1,108)

038화 경도 성문 입구에서

범한은 당연히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물론 경도로 들어가면 좋은 일은 별로 없을 거란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유하면서도 한가로운 삶이 범한에게서 강호로 뛰어 들어갈 용기마저 빼앗아 갔다고는 해도, 그의 성격으로는 그 황폐하고 낡은 사당 같은 곳에서의 삶은 맞지 않았다.

원래 범한은 안락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었다.

그런데도 범한은 경도에도 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따라서 사남 백작이 자신을 데리러 사람을 보냈을 때 담주에 남아 있으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뒤에 숨겨진 사정까지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마차를 가득 메운 얼음 같은 적막감을 이기지 못한 등자경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도련님, 이번에 급히 경도로 모시고 가는 이유는 어르신께서 도련님의 혼사를 준비하고 계셔서입니다."

범한은 한동안 등자경만 바라보다가 한참 후 겨우 입을 뗐다.

"혼사라고요?"

"그렇습니다."

등자경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등자경은 과거 두 번째 집사가 당한 비극적인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아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반쪽짜리 주인에게 유난히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냉정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는 평범한 소년이 자신의 혼사 이야기를 듣고서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절대로 아니었다. 범한이 느릿느릿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와 혼인할 상대가 누구일지 무척 궁금하군요."

범한은 이미 만 열여섯 살이었다. 그러므로 권문 귀족들은 일정을 정해 두고 혼사를 진행한다는 것 정도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지금까지 이 사생아를 잊지 않고 계셨으니 언젠가는 이런 일이 닥칠 거란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이번 혼사가 너무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등자경이 범한의 궁금증에 대답했다.

"그건······ 저도 정확히 모릅니다. 다만 부인이 되실 아가씨는 어질고 현명하며 정숙하고, 덕을 고루 갖추어 경도 안에서도 평판이 좋은 분이라 합니다."

등자경은 매우 조심스럽게 설명했지만 도리어 범한의 궁금증만 꼬리에 꼬리를 물도록 만들었다. 범한은 아무리 자기 부모님의 배경이 좋다고는 해도 여전히 신분이 나쁜 서자인 자신에게 딸을 시집보내려는 벼슬아치는 없을 것이란 의문이 들었다.

범한의 표정을 보고는 등자경이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그 아가씨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최근에 병을 얻어 서두르는 중이라고······."

범한은 그제야 전후 사정을 다 알 것만 같았다. 자신이 액막이용 제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등자경은 조심스레 범한 도련님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범한은 전혀 화를 내지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았지만 살짝 얼이 빠진 상태 같았다. 이를 본 등자경은 ‘곧 죽게 될 아내를 맞이하게 될 텐데 정말로 전혀 화가 안 나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의아해했다.

범한은 전생에 이와 같은 상황을 너무 많이 보아서 그런지 그로서는 전혀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화를 내도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건강하지 않다는 이유로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남자와 강제로 혼인해야 하다니, 범한은 오히려 병상에 누워 있다는 그 여인을 동정했다.

그렇다면 병약한 정혼자가 생긴 범한의 심경은 어떨까. 범한은 일단은 자신이 서출이라고 해서 괴롭거나 울적하지 않았다. 범한은 항상 남성 우월주의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남녀 간의 일에서 손해를 보는 쪽은 항상 여자이고, 남자는 항상 이득을 보는 쪽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 세계에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아야 하는데, 좋은 여인을 아내로 맞게 되었으니 자신으로서는 큰 이득을 본 셈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쨌거나 결혼을 물리치고 도망가는 일은 지금 당장 실행으로 옮기기보다는 경도로 들어가 정혼자부터 만나 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다시 말해 범한은 모든 건 일단 지켜본 후 결정하자는 주의였다.

먼저 정혼자가 예쁜지, 사랑스러운지, 아니면 귀여운데 성숙한 외모인지부터 확인한 다음에 말이다.

* * *

"도련님, 왜······."

등자경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 보았다.

"왜 화를 내지 않느냐고요?"

범한이 웃는 얼굴로 바라보고는 다시 부드럽고 조용히 말을 이어 갔다.

"첫째, 내가 경도에 들어가는 것과 이 혼사를 받아들이는 결정은 별개예요. 둘째, 만약 내가 이 혼사를 받아들인다면 정혼자가 마음에 들어서겠죠. 셋째, 정혼자가 병상에 누워 있다지만,나는 그 사실을 굴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넷째, 아마 모르셨을 거예요. 나는 정말 끝내주는 의원이거든요."

등자경은 범한이 제시한 네 가지 이유가 정말로 너무 터무니없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네 번째 이유, 도련님이 의술을 안다고? 등자경은 이 비극적인 혼인이 희극으로 반전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아가씨의 집안에서도 쉬이 치료하지 못하는 병을, 그것도 황가의 어의마저도 치료 못 한 병을 도련님이 치료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마차는 쉼 없이 경도로 향했다. 등자경은 범한의 마차에서 나와 맨 앞에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이렇게 범한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범한은 적막감을 견디지 못하고 마차의 가림막을 열어 쌩쌩 불어오는 바람을 얼굴에 쏘였다. 실눈을 하고 사방에서 휙휙 지나가는 푸른 산과 석판이 깔린 도로를 바라보자니 주변 환경이 비디오 화면을 되감아 보는 것 같았다.

마치 16년 전 같았다. 처음 이 세계로 왔을 때 마차 위에서 봤던 장면과 똑같았다.

* * *

사월이 끝나가는 어느 날이었다. 경도성 밖 도롯가에는 키 큰 풀들이 보이지 않았다. 산책을 나와 여기저기서 풀을 밟는 젊은 남녀들 탓에 꾀꼬리가 놀라 후드득 날아올랐다. 성 밖 해자를 따라 두 줄로 늘어선 버드나무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 있었다. 그리고 이 흔들흔들 유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버드나무는 각지에서 올라온 백성들을 도도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세 대의 마차로 이루어진 행렬이 저 멀리서 달려와 성문 앞에 당도했다. 마차 행렬은 성문에 다다르자 도로 위에 일렬로 서서 입장할 차례를 기다렸다.

마차 가림막을 젖히자 햇살처럼 웃는 말간 얼굴 하나가 밖으로 드러났다. 그는 먼저 경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휙 둘러보더니 다시 시선을 옮겨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가 편안하고 즐거워하는 표정의 사람들을 바라보고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경도는 이런 느낌이구나."

이 사람은 당연히 범한이었다. 일행이 수십 일이라는 험난한 여정 끝에 드디어 경도에 도착한 것이었다. 경도까지 오는 동안 범한은 전부 낯설었지만 그래도 더 낯선 경국의 천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는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그의 욕망을 충족해 주기에 충분했다. 또한 등자경을 포함한 호위가 동행해 준 덕분에 범한에게는 낯선 풍경들이 훨씬 친밀하게 다가왔다.

범한은 활짝 웃는 게 습관으로 밴 된 귀여운 소년이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호감을 주기 마련이었다.

범한이 마차에서 내려오려 하자 등자경이 그의 손을 잡고 부축해 주었다.

범한의 두 발이 길 위를 밟고 올라섰다. 범한은 천으로 된 신발 밑창이 땅 위에 더 밀착되도록 살며시 발목을 돌려 발바닥을 비볐다. 마치 경도의 땅이 다른 지역과 얼마나 다른지 느껴 보려 하는 사람처럼.

경도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꽤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성문 앞 경비는 삼엄했고 성문으로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이들의 줄도 제법 길었다.

기다림에 지쳐 무료해진 범한이 눈앞에 둘러쳐진 성벽을 가리키며 등자경에게 이 말 저 말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범한은 사남 백작이 자신을 마중하도록 누군가를 보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아버지에게 자신은 공개적으로 내세울 만한 자식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범한이 한가롭게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별안간 뒤쪽이 소란스러워지면서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넓게 비켜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무리의 기마병이 비키라는 말도 없고 잠시 멈추지도 않은 채 성문을 향해 질주했다.

말을 탄 사람 중 맨 앞에 있던 사람은 소녀로, 옅은 색의 유군(襦裙)이라고 불리는 긴치마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봄기운이 가득한 날 흰 사슴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어 제법 활기차고 멋져 보였다.

짙은 검정 눈썹에 맑게 빛나는 눈동자를 지닌 매우 아름다운 소녀였다. 말을 몰고 있는 표정이 조금 다급해 보이는 걸 보니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범한도 길가로 비켜서서 기마병의 행렬을 훑어보고 있었다. 내내 웃는 얼굴로 보고 있던 범한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경도에는 멋진 사람이 참으로 많구나."

그러자 어느새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졌다.

옆에 서 있던 등자경이 가볍게 두어 번 기침 소리를 냈다.

범한은 자신이 추태를 부린 것도 아니고 그저 감탄사만 내뱉었을 뿐인데 등자경이 뭘 그리 걱정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웃으며 등자경에게 물었다.

"경도의 분위기는 생각처럼 폐쇄적이지는 않은 것 같군요. 치마를 입은 아가씨가 말을 타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이상하다고 지적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등자경이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해 주었다.

"조금 전 지나가신 분은 경도를 수비하시는 섭중 대인의 무남독녀십니다. 그러니 아무도 함부로 지적하지 못하는 겁니다."

범한은 "아!" 하고 한마디 내뱉고는 마차 위에 올라서서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 과연 기마병들은 성문 앞에 도착했는데도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명패만 보여 주고는 곧장 성안으로 들어갔다.

범한의 차례가 되었다. 성문을 들어설 때 범한은 일부러 성문 밖을 지키는 관병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자신에게는 분명 공무를 처리하는 표정이었다. 범한은 자신이 타고 온 마차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명확히 알게 되었다.

세 대의 마차에는 범씨 가문임을 알리는 표식이 없었다. 이제 보니 범한 자신은 대대적으로 환영받으며 경도로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범씨 가문의 저택은 경도 동쪽에 위치해 있는 데다가 천하대로와도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서 황궁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고위급 관리들이 살고 있어서 일반 백성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동네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다른 곳보다는 조용했다. 한산한 거리 양옆으로 열 장 정도의 대저택 문들이 줄지어 있었고 모든 저택의 문 앞에는 사자 석상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가만히 앉아서 거리를 지나가는 마차를 쳐다보고 있는 수십 마리의 사자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따분해 보였다.

큰길 입구에서 검은색 마차가 천천히 들어오는데도 여느 때처럼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범가 저택에 다다른 마차는 옆으로 나 있는 골목으로 겨우 들어가더니 저택 쪽문 나무 그늘에 멈춰 섰다.

범한이 마차 문을 열어젖힌 후 등자경의 손을 잡고 내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살펴보더니 뭐라도 아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삐걱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종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호칭은 어찌 불러야 할지, 예는 어디까지 갖춰야 할지 몰라서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감히 꺼내지 못했다.

범한은 그저 웃고만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곤 등자경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종들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마차에 가득 실려 있는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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