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화 담주를 떠나며
"사사, 무슨 생각 해요?"
범한이 편지봉투를 여종 앞에 대고 펄럭였다.
정신을 차린 사사가 수줍어하며 곤란하다는 듯 대답했다.
"별일 아닙니다. 아가씨께 보내는 편지지요? 이리 주세요!"
범한이 편지봉투를 든 손을 뒤로 빼며 매우 궁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그래요?"
사사는 한참을 생각한 끝에 용기를 내어 물었다.
"도련님, 경도에 가시게 되어 기쁘신가요?"
범한이 몸을 고쳐 바로 앉더니 웃는 얼굴로 사사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도련님, 경도 사람들은 정말 못됐대요."
사사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뗐다.
"게다가······ 도련님은 정실 소생이 아니시잖아요. 경도 저택에서 두 번째 마님이 도련님을 못살게 굴까 염려됩니다."
범한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내 걱정하고 있었구나. 피해 다니면 돼요. 나중에 경도에서 살기 힘들면 의원이 되어 먹고살면 되죠. 백작가에서 멍하니 지내는 것만 아니면 되니까요, 뭐. 나는 말이지요, 그냥 경도 구경이나 하고 싶은 것뿐이거든요."
사사가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서는 평생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사시면 안 돼요. 책도 많이 보셨잖아요. 내년에 과거를 보시면 꼭 합격할 거고 나중에 높은 관직에 올라 조상님과 집안을 빛내실 거예요."
진지한 사사의 태도에 범한은 살짝 웃으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범한은 조상과 집안을 빛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할머니와 이별하는 건 마음이 아프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경도에 있는 자신을 방치한 아버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도련님께서는 왜 저를 경도로 데려가지 않으시는 거죠?"
진짜 걱정거리였다. 사사가 불쌍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경도에 있는 여종들은 분명 두 번째 마님의 말을 들을 겁니다. 도련님 곁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으면 어떡합니까?"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사는 자기보다 두 살이 많았다. 다시 말해, 사사는 다른 가문에서 일했다면 벌써 시집을 가 그곳을 떠났을 나이다. 그런데도 범한이 전생의 경험과 기억 때문에 나이에 비해 훨씬 성숙하고 진중한 내면을 보이자 사사는 그런 도련님을 믿고 따르던 터였다.
범한이 사사를 향해 정색하며 말했다.
"내가 경도에서 어떻게 지낼지 몰라 데려가지 않는 거예요."
사사도 범한이 그렇게 말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이제 도련님과 멀리 떨어져 지내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었다. 사사는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지자 얼른 고개를 돌려 방 안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분주해진 사사의 뒷모습을 보니 범한은 암담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자기가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경도는 풍광이 멋질 수도, 재밌는 사람과 사건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경도에서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칼을 맞거나, 어두운 곳에서 활에 맞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한데 범한은 이 자잘한 위험들을 무릅써 보고 싶었다.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으니 이 작디작은 담주에서 조용히 늙어 죽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기 사람을 보호할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사를 데려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범한은 슬그머니 별저를 빠져나가 잡화점으로 향했다.
등자경은 내세울 것 없는 신분의 범한 도련님이 경도 두 번째 마님의 등쌀을 견디지 못할 게 두려워 어떻게든 담주에 남으려 할 거라 예상했었다. 그래서 백작 대인이 내린 임무를 이렇게나 순조롭게 완수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 도련님이 이렇게나 순순히 백작 대인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인 것도 그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등자경은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노부인이 담주에 남기로 결정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근본을 알 수 없는 큰 도련님만 자신들과 함께 경도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노부인은 바닷가를 좋아하니 계속 담주에 남아 노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백작 대인도 별저에 있는 사람들을 반드시 이번에 모두 데려오란 분부는 없었으니 말이다.
별저 정문에 검은색 마차 세 대가 서 있었다. 마부가 앉는 자리에는 파랑과 검정이 교차된, 볼수록 멋진 파란색 깔개가 놓여 있었다. 문 앞은 백작가의 이사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일찌감치 모여든 담주성 주민들로 북적였다. 이들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고 나서야 백작가 도련님이 오늘 경도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담주 항구 주민들도 사람인지라 떠나가는 범한을 보고 질투를 하거나, 신랄한 비난 등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10여 년 동안 도련님처럼 보이지도 않는 범씨 도련님이 거리를 거닐고, 지붕 위에서 소리치는 모습을 자주 보아서인지 몰라도 범한에게 정이 들기는 했나 보다. 그가 이제 곧 번화한 경도로 떠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들은 범씨 도련님이 다시는 담주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문 앞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범한이 마지막으로 별저 문턱을 밟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온화하게 웃음 짓고 있던 곱상한 얼굴은 한참을 기다려도 볼 수 없었다.
* * *
후원에서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반면 범한은 미소를 지은 얼굴로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여종 몇 명이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중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칫솔, 칫솔이 빠졌어!"
그러자 다른 여종이 한참 동안 칫솔을 찾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 세계로 온 후 범한은 거대한 발명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대신 칫솔은 조금 더 편하게 개량해 두었다. 여기에서는 주로 말총으로 만들어 쓰는 칫솔을 범한은 돼지털로 바꾸었다. 베개도 원래 딱딱했는데 솜을 넣어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목욕용 샤워 분무기 꼭지도 침소 뒤편에 걸어 두었다.
범한은 이 밖에도 훨씬 많은 것을 개선해 놓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경도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시간이 얼마나 더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어느덧 몇 개의 커다란 짐을 마지막 마차 안에 빼곡히 채워 넣은 후였다. 드디어 범한이 노부인을 부축한 채 만면에 미소를 띠고 느긋하게 백작가 별저에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범한은 문 앞에 몰려든 담주의 마을 어르신들을 향해 두 손을 맞잡고 가슴까지 들어 올려 인사를 올렸다. 그런 후 인파 속으로 눈을 돌리니 예상했던 대로 사사가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사사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어 있는 걸로 보아 범한은 그녀가 밤새 울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범한은 오늘 관례를 깨고 장삼을 입고 있었다. 범한이 앞섶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려 할머니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절을 올렸다.
바닥에서 일어난 후에도 또 이곳의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취했다. 할머니를 와락 끌어안고는 그녀의 주름 진 이마에 있는 힘껏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시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할머니, 사사를 꼭 좋은 집으로 시집보내 주세요. 적어도 동아만큼 잘 살도록 해주셔야 해요."
별저의 종들은 도련님의 이상한 행동을 모두 못 본 체했다.
깜짝 놀라기는 노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일찍 철이 들어 항상 침착한 손자에게 이런 이상한 구석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범한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때리고 혼을 냈다.
"이게 웬 야단법석이니! 그 일은 내가 엄연히 알아서 잘하겠지!"
범한은 눈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들을 쓱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미소를 짓고 두 손을 모아 가슴까지 올려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그동안 저 때문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도련님이 예를 차려 공손히 인사하자 종들은 감히 그 인사를 받을 수 없어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노부인이 갑자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 떠나거라, 경도에 있는 네 아비를 기다리게 하지 말고. 사사 일은······ 나중에 네가 경도에서 무탈하게 잘 지내면 내, 너에게 보내마."
너무 놀란 범한은 말문이 턱 막힌 채로 정신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천천히 담주성에서 멀어져 갔다.
밝은 햇살, 파란 하늘, 그리고 비단결의 뽀얀 구름까지 그날따라 하늘은 유달리 아름다웠다.
마차는 이미 담주성 앞에 있는 잡화점을 지나쳤다. 두부 좌판으로부터 멀리 떠나왔을 무렵 범한이 마차 안 가림막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두부를 파는 젊은 아낙과 그녀 곁에서 이리저리 뛰노는 계집아이가 보이자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띠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범한이 앉아 있는 자리 밑에는 낡고 오래된 검은 가죽 상자가 놓여 있었다.
* * *
담주성에서 가장 장사가 안 되던 잡화점도 드디어 문을 닫았다. 그러자 담주성 사람들은 무심코 몇 마디 말을 던졌다. 어떤 이들은 눈먼 주인장이 가난하게 홀아비로 늙어 죽을지도 모른다며 동정했다. 그러다가 화제를 돌려 얼마 전 이 작은 마을을 떠난 범씨 도련님의 신상을 두고 이런저런 추측들을 내놓았다. 그중에는 백작 대인이 자신의 서자를 경도로 데려가 어떤 관직을 주려 할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담주 사람들이 범한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고 있을 때, 범한은 대열 중간에 위치한 마차 안에 누워 있었다. 범한은 널따란 마차 안에 직접 준비한 침구를 푹신하게 깔고 그 위에 누워 있었다. 그 덕분에 범한은 마차가 운행하면서 생기는 진동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편히 가고 있었다. 그러자 자연히 왜 아버지께서 자신을 경도로 불러들이려는 건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범한은 호위대장인 등자경을 자신의 마차로 들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등자경 굳은 얼굴로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눈처럼 하얀 침구가 더럽혀질세라 발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범한과 마주한 등자경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범한은 패가망신할 방탕아로 보였고, 경도에 있는 어린 도련님과 비교해 더 착해 보이는 구석도 없었다.
범한이 보기만 해도 시원하게 허리를 쭈욱 뻗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상스러운 느낌은 없는 중년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등 대장, 이미 담주로부터 멀리 떠나왔으니 아버지께서 왜 나를 경도로 불러들이시려는지 말해 줄래요? 대체 왜죠?"
등자경은 잠시 머뭇거렸다. 마치 할 말은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범한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맑고 순수한 눈으로 등자경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 출신을 잘 알잖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조금 걱정이 되네요."
등자경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도련님,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는 겁니다. 어르신께서 이번에 도련님을 경도로 부르신 건 당연히 도련님의 앞날을 위해 그리하신 겁니다."
범한이 손을 내젓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 마차 안에 우리 둘밖에 없으니 숨기지 말고 이야기해 줘요."
범한이 뜬금없이 웃기 시작했다.
"만약 정말로 아무 말도 안 해주면 잠시 후에 마차에서 뛰어내려서 도망갈 겁니다."
등자경이 웃기 시작했다.
"도련님께서는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등자경의 말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범한이 차갑게 말허리를 끊었다.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등자경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속으로 ‘설마 방금 한 말이 진심이었어?’라며 놀란 상태였다. 범한이 정말로 경도로 들어갈 생각이 없다는 건 전부 추측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담주성에 있을 때 그리고 큰마님 앞에서는 왜 싫다고 하지 않았던 걸까. 등자경은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이 아름답고 유순해 보이는 소년이 보면 볼수록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