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오죽
다시 말해, 미끌미끌한 암석 위에 손바닥을 밀착하면 진공 상태가 되어 흡착력이 생기고 절벽에 몸이 고정되는 원리였다. 그러니 손을 떼고 싶으면 정기를 손바닥에서 사라지게 하면 되었다. 범한은 이런 방식으로 손을 번갈아 사용하며 수월하게 절벽을 기어 내려갔다.
범한이 절벽을 내려가고 있는 모습은 마치 스파이더맨 같았다.
다른 일반 무공 수련자들은 체내의 정기가 아무리 넘쳐흘러도 범한처럼 할 수 없었다. 범한이 이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독특한 수련 방법과 신체 구조, 그리고 독특한 생각 방식 때문이었다.
이 세계에서 무공 고수에게는 ‘실(實)’과 ‘세(勢)’ 두 가지만 중요했다. ‘실’은 글자 그대로 체내에 정기가 얼마나 풍부한가를 뜻했다. 그리고 마음으로 이해한 것을 뜻하는 ‘세’는 경지와 유사한 의미였다. 그래서 무공 고수들은 자연물을 이용하는 방법과 기술을 경시했다.
그런데 오죽이 생각하는 실과 세는, 실은 정기의 양과 질, 그리고 정기를 정확히 통제하는 능력의 정도였다. 그래서 범한을 10년 정도 가르쳐 3등급에서 7등급을 오가는 실력으로 만들어 놓기는 했어도, 그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봤을 때 최근 4년 동안 범한의 실력은 조금도 늘지 않은 상태였다.
무공 고수들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체내의 정기를 일회용 도구나 무기 정도로만 여겼다. 뿌려서 버린 물처럼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정기를 몸에서 쏟아 버린 후 회수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일대 대전을 치러 정기가 전부 소진되었다 하더라도 가만히 앉아 명상하면 소진된 정기가 회복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몸 밖으로 빠져나간 정기를 다시 회수한다는 생각이 이 세계 사람들에게는 허무맹랑하게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범한은 달랐다. 몸을 흐르는 정기는 순환하는 통로 자체가 달랐다. 그는 뒤쪽에 있는 설산으로 정기를 채워 넣었다. 범한에게 설산은 하늘과 땅의 원기를 받아들이는 입구였으며, 이로써 그는 내부와 외부로 이루어진 두 개의 순환 체계를 구성해 놓고 있었다. 그러므로 범한은 정기에 훨씬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범한은 여유도 많았고 성격 자체도 인색해서 몸 밖으로 내보낸 정기를 회수하는 것을 계속해서 연습했다. 그것도 무려 3년 동안이나 말이다. 범한은 힘들게 연습한 끝에 드디어 손바닥으로부터 10분의 1촌(寸) 정도 되는 거리까지 내보낸 정기를 다시 몸 안으로 회수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의 거리로는 적을 공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애석하지만 범한도 자신이 3년 동안 헛수고만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범한으로서는 쓸모없는 잡기라도 활용 방법을 생각해 봐야 했다. 그러던 중 사흘에 한 번씩 찾는 해안가 절벽을 힘들게 오르다가 정기 회수 방법을 절벽을 타는 데 응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범한은 바로 이런 면에서 이 세계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그의 사유 방식은 자신이 속한 시대의 틀에 갇혀 있지 않았으며 선입견이란 개념조차 없었다. 범한에게 세상 모든 것은 신선하고 신기했으며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고기가 흐르는 물을 헤엄쳐 내려오듯 자유롭게 절벽을 내려오던 범한이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오죽이 절벽 꼭대기에 찍어 놓은 까만 점처럼 보였다. 범한은 다시 서둘러 내려가지 않고 느긋하게 웃으며 계속 위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오죽이 절벽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오죽이 범한을 한발 앞질렀다. 그것도 마치 평지를 걸어가듯이 말이다.
오죽이 허공으로 발을 내딛자 그의 몸이 휘리릭 아래로 떨어졌다. 이후 오죽은 세 장(丈) 정도 내려갔을 때마다 손을 뻗어 절벽 위의 바위를 살며시 밀며 떨어지는 속도를 살짝 늦추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십 여 회, 오죽은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절벽 아래에 착지해 서 있었다.
이리 보니 오죽이 너무 쉽게 절벽을 내려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오죽처럼 절벽을 내려가려면 방향, 각도, 힘, 속도, 그리고 바닷바람이라는 모든 요소를 순식간에 계산할 줄 알아야 하며, 동시에 한 치의 오차가 발생해도 안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감한 결단력과 판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이 세계의 최고 고수여야만 가능했다.
그런데 오죽은 맹인이었으니 앞서 언급한 요소 중에서 두 개는 빼도 될 것이다.
범한은 그동안 이러한 광경을 여러 차례 봐 왔다. 그런데도 절로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단번에 내려오시다니 멋지세요!"
3월로 들어선 담주에 바닷바람이 따스하고 부드럽게 불어오자 곳곳에서 봄기운이 약동했다. 이름 모를 노란색 꽃이 온 산을 물들였고, 집집마다 그 꽃잎으로 차를 만들어 마시며 대문 밖에서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일까, 담주 항구 주변 마을 거리에는 은은하고 맑은 꽃 향이 기분 좋게 감돌았다.
해가 저물고 봄비가 자주 내리는 때가 되면, 빗물이 살랑바람을 타고 검은 밤에 숨어들어 와 아무도 모르게 대지를 촉촉이 적셨다. 담주성의 검은 기와와 청색 돌이 깔린 거리도 안개처럼 자욱이 내려앉는 빗물에 젖어 들었다.
살랑이는 가랑비가 잡화점 밖에 널어놓은 거적 위로 살포시 떨어졌다. 빗물이 요란스럽지 않게 살며시 먼지만 씻어 냈을 뿐인데도 잡화점은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 그런데 잡화점은 오늘도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다. 대신 안에서는 할머니에게 외출하겠다고 말만 해 놓고 슬그머니 이곳으로 내뺀 범한이 땅콩 껍데기를 까며 오죽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범한이 잡화점에 들락거리기를 좋아한다는 건 백작가에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도련님이 눈먼 남자가 빚은 술을 좋아해서라고만 알고 있었다. 범한이 술을 좋아하는 건 맞았다. 그런데 이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구실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범한은 오죽을 만날 때마다 주변의 이목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어서 조심하는 편을 택한 것이었다.
도마 위에 식칼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도마는 말라 있었고 칼날에는 식재료 조각이 붙어 있지 않았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땅콩의 단단한 외피를 까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범한이 땅콩 한 알을 입으로 톡 던져 넣고는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범한은 땅콩이 완전히 으스러질 때까지 씹었다. 그러다 땅콩 향이 코로 밀려 올라오면 손가락 세 개 정도 크기의 작은 술잔을 들어 입가에 대고는 술을 호록 마셨다.
오늘 마신 술은 황주가 아니었다. 공물로 진상된 술로 경도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살짝 높은 도수에 범한이 느끼기에는 오량액(五粮液)이란 술맛이 살짝 났다.
범한은 먼저 묻지 않고 느긋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죽은 본래 단순한 사람이었으므로 오래 뜸을 들일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죽은 범한과 마주하고 앉아 있지 않았다. 황주 한 병을 들고 어두운 구석에 앉아 있다가 깊고 그윽한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의 성은 섭이고 함자는 경미이십니다. 저는 그분 댁 종으로 아주 오래전에 아가씨와 함께 집을 나왔고요."
"섭경미라······."
범한은 어머니의 함자를 듣자마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이에 미소를 띤 얼굴로 술을 한 잔 들이켰다. 어머니께서는 어디 사셨으며 등등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만약 오죽 아저씨가 말해 줄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알려 주었을 테니.
"아가씨와 저는 몇 년 동안 동이성에서 살았습니다. 아가씨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총명해서 무엇이든 다 아셨고, 마음도 자애로우신 분이었지요. 그래서 열다섯이 되는 해에는 동이성에서 장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직 어린 나이라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고요. 대신 상점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주인 행세를 하도록 시키셨습니다."
술을 마시려고 잔을 들고 있던 범한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궁금한 마음에 질문부터 하고 싶었다.
"장사하는 것과 자애로운 게 대체 무슨 관계랍니까?"
범한은 왜 어머니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했으며, 열다섯이란 나이에 장사로 돈을 벌려 했는지부터 물어야 했다. 하지만 그동안 자신의 어머니는 분명 일반 상식으로는 가늠이 안 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오죽이 매우 쌀쌀맞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가씨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을 자주 하셨지요. 동이성에서 물난리가 났을 때도 아가씨는 가장 많은 죽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아가씨께서는 어떻게든 그 돈을 벌려 하셨던 거고요."
범한은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사가 잘되자 사람들이 상점의 진짜 주인이 아가씨란 사실을 눈치채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다른 생각을 품기에 제가 그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지요."
오죽은 과거 일을 매우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범한은 당시 상황이 매우 긴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죽 아저씨가 단순히 장사가 잘됐다고만 했지만, 분명 엄청나게 잘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난 사람은 늘 시샘의 대상이 된다는 말처럼, 겨우 열다섯 살밖에 안 되는 소녀가 그리도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으니 이는 불량한 무리들의 야욕을 자극했을 게 뻔했다.
범한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붕 떠 버렸다. 하지만 오죽이라는 절대 고수가 어머니의 호위 무사였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어떤 일이 생각난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머니의 성이 섭씨였다면 당시 장사하실 때 쓰던 상호가 ‘섭가’였나요?"
"그렇습니다."
"역시 섭가였군요!"
놀라움으로 가득 찬 얼굴로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다른 사람 입에서 그 상호를 들었어요. 10여 년 전에는 ‘섭가’가 천하제일 가게였다고 하던데 그게 어머니 가게였을 줄이야!"
"섭가가 얼마나 크게 장사를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오죽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장사는 제가 할 일이 아니었거든요. 아가씨께서는 제가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동이성에서 하던 장사를 접고 경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경도 생활이 시작된 거지요."
범한은 무언가 많은 게 빠진 것 같다고 느꼈다. 동이성에서 운영하던 가게를 처분하고 경국으로 왔다면 분명 그보다 더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오죽이 계속해서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경도에 오신 후에도 장사를 시작하셨습니다. 물론 그 장사도 무척 잘되었지요. 나중에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셨고 사남 백작님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두들 아가씨 말을 잘 들어주는 거 같았습니다. 아가씨 생각대로 어떤 일들도 준비해 주고 일들을 바꾸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경국의 왕족들, 귀족들과 이익을 두고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오죽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한번은 경국과 서쪽 변방이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경도가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됐는데 그때 하필이면 제가 없는 상황에서 다른 큰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 아가씨께서 믿고 있던 권력자들에게도 문제가 생겼고. 결국 이익을 두고 다투던 자들이 자객을 보냈고 아가씨는 살해당하셨어요. 그때 서둘러 태평 별저로 갔지만 도련님만 구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길로 도련님을 품에 안고 담주로 피신해 왔습니다."
그날의 일은 범한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10년 전 ‘원수’들이 모조리 살해당한 사실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범한은 그때 복수를 주도한 사람이 분명 자신을 방치한 아버지, 그리고 감찰원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인물일 거라 생각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밖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유난히 또렷해졌다.
"그게 다예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머니의 일생이 이렇게나 짧은 설명으로 완결되다니. 어머니께서 도대체 어떤 사업들을 하셨기에 경국의 왕족들과 귀족들에게 견제를 받은 것이며, 왜 유명한 감찰원의 비개 스승님도 어머니에 대해서는 무한한 존경심을 드러내고 있는지 못 들었는데 이게 다라고?
"대략적인 건······ 다 말씀드렸습니다."
오죽이 잠시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죽 아저씨는 역시나 말재주가 없다고 생각하니 곱상한 얼굴 위로 쓴웃음이 배어났다. 범한은 이제 궁금한 건 직접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