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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3화 (33/1,108)

033화 한가로운 날들

섭류운이 왔고 다시 떠나갔다. 마치 세상을 자유로이 떠다니는 구름처럼 그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담주성의 주민들은 섭류운이 다녀간 줄도 몰랐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존경스러운 4대 종사 중 한 사람이 이곳에 와서 술도 마시고 대결도 하고 노래도 불렀는데 말이다.

오죽에게는 작은 걱정거리가 생겼다. 이 세상에서 자신과 아가씨와의 관계를 아는 많지 않은 사람 중 하필 한 사람이 섭류운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섭류운은 종사라는 호칭에 걸맞지 않게 입을 잘 놀리는 걸로 유명했다.

섭류운이 담주에 나타난 것 자체가 너무 수상했다. 게다가 자신과 만나자마자 그냥 떠나다니, 오죽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반면 범한은 섭류운이 평범한 여행객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오죽의 어깨를 토닥이며 안심하라는 듯한 말을 건넸다.

"아저씨, 고수님이라고 불리는 사람도 여행은 하지 않을까요?"

범한은 순전히 자신의 직감을 믿고 한 말이었다.

범한의 직감은 항상 정확했다. 그리고 늘 경도에 있는 아버지는 무언가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감찰원, 자객, 그리고 호랑이보다 악랄한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 등등만 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 사남 백작이 표면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그리 단순한 인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강희 황제의 하인인 조인보다는 훨씬 대단한 인물일 것 같았다.

하지만 범한은 완전히 잘못 짚고 있었다.

범한은 자신을 방치한 아버지가 이전 황제인 성왕의 사생아일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옛날에 노부인이 성왕부에서 유모로 지내면서 지금의 황제를 직접 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지금 사남 백작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배다른 형제는 용좌에 앉아 있는데 자기는 겨우 백작 정도에만 봉해져 한스러워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에 사남 백작이 몸을 최대한 낮춘 채 암암리에 감찰원 등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반대 세력과 결탁했으며, 몰래 힘을 키우며 황제의 가산을 몽땅 빼앗을 망상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범한은 자신의 어머니가 위대한 인물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머니는 가문의 이익 때문에 혼인한 사람이었으므로 자신은 아버지가 일으킬 반역 대업에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범한은 한가할 때 위와 같은 자신의 추론을 오죽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오죽이 이번에는 참지 않고 쥐고 있던 칼을 도마 위에 살벌하게 내리꽂았다. 소년의 미친 상상력을 향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오죽은 범한을 두고 잠시 담주를 떠나 있기로 결정했다.

광란의 십 대인 범한은 장차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수줍어 머뭇거리면서도 호기심으로 가득 찬 얼굴로 웃으며, 자신의 상상이 빚어낸 사남 백작의 반역에 언제든 동참할 작정이었다. 게다가 이 황당무계한 생각이 초래할 위험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죽은 대체 무엇이 두려운 걸까.

오죽은 이제껏 자신의 생사와 안위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오로지 범한의 안위만 걱정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범한의 매우 변태적인 행동들, 예를 들어 다섯 살 때 술을 마신 것과 같은 행동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자신은 안전만 책임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인과 종, 제자와 사부 관계에 있는 이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 둘은 서로에게 게을렀고 또한 전혀 무서울 것이 없었다. 즉 상대는 음모를 못 꾸민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언제든 자신의 무공으로 음모를 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대방이 음모를 꾸민다고 말해도 ‘할 테면 해 봐라. 뭘 할 수 있는데?’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이다.

이른바 둥근 보름달과 도도히 흐르는 강물, 맑은 바람과 높은 언덕처럼 자연법칙과 같은 순리를 따르며 상대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이었다.

* * *

사실 범한은 둥근 보름달이라기보다는 수줍은 초승달이었다. 범한은 오죽처럼 절세의 무공을 지니고 있지 않아 극한의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자기 뒤에 감찰원의 비개가 있고 눈먼 종이 곁을 지켜 주고 있으니 죽고 싶어도 쉽게 죽지는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바다 위에서 오죽 아저씨와 4대 종사인 섭류운이 겨룬 사건은 범한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드디어 다도나 서예와 마찬가지로 무도도 멋진 일이며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 후로 범한은 《홍루몽》을 표절하는 작업을 잠시 중단하고 무공 연마에 몰두했다.

오죽은 고명한 검법이나 권법 같은 것을 중시하지 않았다. 대신 사람을 빠르고 정확하고 직접적으로 악랄하게 죽이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래서 범한에게도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부드럽게 에둘러 들어가야 제대로 공격할 수 있고 물러설 때도 수비할 수 있다는 말을 믿지 마세요. 상대를 공격하려거든 직진하세요. 최단 거리에서 최대한 빨리 공격해야 상대에게 회복 불가능한 치명타를 줄 수 있습니다."

오죽의 조언에 범한은 그날 오죽 아저씨가 절벽에서 뛰어내린 장면을 떠올렸다. 정말로 최단 거리에서 공격을 개시했었다. 순간 범한은 자신이 오죽 아저씨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려면 대체 얼마나 더 오랜 세월 연마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절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채 써는 방법을 배운 날이었다. 범한이 살짝 시큰거리는 오른쪽 어깨를 돌리며 자신과 등지고 있는 오죽에게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예전에 말씀하신 대로라면 지금 제 실력은 몇 등급이나 될까요?"

"정기는 7등급, 통제 능력은 3등급입니다."

범한은 재빨리 암산을 해보았다.

"평균을 잡아 보니 5등급이네요. 4등급보다는 높으니까 졸업장 받을 때가 되었어요."

소년은 득의양양해졌다. 아름다운 눈동자에 살짝 오만함이 깃들어 있었다.

오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도련님께서 운이 충분히 좋으시다면 7등급 수준인 자를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운이 조금만 나빠도 3등급의 좀도둑 때문에 바로 골로 갈 수 있으세요."

범한은 웃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 귀여운 아저씨는 말을 참 직설적으로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저씨 말대로 자신은 줄곧 운이 좋았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죽은 후 이 세계로 넘어올 리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 * *

섭류운이 담주에 다녀간 후 범한은 정말로 편안한 나날을 보냈다. 자신을 해하려는 자객이 찾아오지도 않았고, 듣기로는 두 번째 부인이 큰 병을 앓은 후로 많이 온순해졌다고 했다. 경도에 있는 누이 범약약은 언제나처럼 매달 서한을 보내왔다. 범한은 이 자그마한 바닷가 마을에서 두부나 먹고 《홍루몽》을 베꼈다. 그러다가 가끔씩 예쁘게 옷을 입고 노부인을 찾아봬 즐겁게 해 드렸다. 잡화점에 가서는 술을 마시다가 안주로 무채나 썰며 지냈다. 범한에게는 정말 무료하고 한가로운 하루하루였다.

어느 날 바다에서 신기루가 나타났다. 주민들은 너도나도 뛰어나가 시끌벅적하게 구경했다. 해수면 위에 신선이 사는 섬처럼 생긴 것이 가물가물하게 등장하자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보며 산 이들도 유난히 흥분되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오죽도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잡화점 문을 닫고 멀리 외딴 해변으로 걸어가서는 혼자서 절벽 위로 올라가 그곳에서 조용히 신기루가 나타난 장면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무언가 기분 나쁜 일을 떠올린 사람처럼 보였다.

신기루는 얼마 안 돼 금방 사라졌다. 하지만 오죽은 신기루가 나타났다 사라진 곳을 여전히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채 바라보는데도 전혀 눈먼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범한은 웃통을 벗고 절벽 위로 기어 올라갔다. 탈의한 상반신을 보니 예전의 마르고 앙상했던 몸이 이제는 제법 균형이 잡혀 있었다.

절벽 위로 올라가니 오죽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범한은 오죽을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아 자신도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태양에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오죽이 차가운 목소리로 불쑥 질문을 던졌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범한은 칠흑같이 검은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대충 둘둘 말아 묶었다. 예쁘장한 얼굴이 드러났다. 여전히 앳되고 곱상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제법 영웅의 기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범한이 웃으며 답했다.

"열여섯입니다."

오죽은 기이하고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오죽의 삶이 처량하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서른 살 정도인데도 여태 아내도 없었고 대화를 나눌 사람도 자기 말고는 없어서였다. 그래서 담주 항구 근처에 사는 주민들 중 일부는 오죽이 맹인이자 벙어리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게다가 오죽의 눈을 덮은 검은 천은 절대 벗겨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범한은 분명 검은 천 아래에 누구에게도 내보이고 싶지 않은 끔찍한 상처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범한은 스승 비개가 오죽을 부를 때 ‘대인’이란 단어를 붙인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러니 오죽 아저씨도 옛날에는 경도에서 관직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아저씨의 행동을 보면 ‘관리’의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속적인 느낌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의 삶과는 동떨어진 곳에 사는 신선처럼 보인다고나 할까.

오죽이 신선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범한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오죽에게로 향했다. 오죽은 조금 전 나이를 물은 후로 줄곧 침묵하는 중이었다. 그는 차분하게 바다 위를 물들인 노을만 바라보고 있었고 붉은 노을에 물들어 있었다. 특히 검은 천 주위를 감싼 노을빛은 마치 일렁이는 불 같았다.

범한에게 불쑥 매우 무서운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래서 한참을 생각해 보다가 웅얼거리며 오죽에게 물었다.

"아저씨, 조금 전 신선의 산처럼 보이는 걸 멍하니 보고 계셨잖아요. 아저씨는 혹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인가요?"

범한이 이런 이상한 삶을 살게 된 이유는 내공이란 것을 받아들이고 하늘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내심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0여 년 동안 곁을 지켜 준 이가 뜬금없이 하늘에서 쫓겨 와 인간 세상에 온 신선이라고 밝힌다면? 시공간을 넘어왔는데 이번에는 선협(仙俠)이라니 분명 범한은 놀라 까무러칠 것이 뻔했다.

오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단지 아가씨와 함께 길을 떠나올 때 거친 곳들이 기억났을 뿐입니다."

"신선이 아닌 게 확실하신가요? 제 어머니도 선녀가 아니시고요?"

"이 세상에 신선이 있었나요?"

"신묘가 아니고요?"

"신묘에 사는 사람이 신선이었나요?"

"아저씨, 뭐 기억나는 거라도 있으세요?"

"아니! 무언가를 잊은 거 같습니다. 전혀 중요치 않은 일들 말이죠."

* * *

오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다 저편을 바라보며 어딘가를 향해 작별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시죠. 도련님에게 해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과거 자신에게 한 약속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범한이 살며시 웃었다. 오죽은 범한이 만 열여섯 살이 되면 어머니와 관련된 일들을 말해 주기로 약속했었다.

범한은 절벽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어 체내의 정기가 천천히 몸 안에서 돌도록 했다. 그러고는 다시 온몸을 절벽 위에 붙인 채 정기를 손바닥까지 이동시켜 밖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종잇장 두께만큼 밀려 나갔던 정기가 손바닥 가장자리를 타고 슉, 하며 도로 몸 안으로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미세하게 함몰된 정기의 접촉면이 만들어졌다. 이는 모두 무형의 정기가 손바닥 가장자리를 완벽히 감싸 밀폐된 공간을 만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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