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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2화 (32/1,108)

032화 기울어진 배

패도의 기를 수련하기 전 범한은 인간의 육체가 돌보다 단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전 바위에 새겨진 자신의 손바닥 자국을 보고는 그러한 생각을 버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람이 수십 장 높이의 절벽에서 뛰어내리고도 멀쩡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뛰어내린 후에 속도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죽이 범한의 생각을 바꾸어 주었다. 게다가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공포감까지 선사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최강 고수의 실제 수준이 이렇게나 엄청나다니, 범한은 공포감에 전율이 흘렀다.

*   *   *

눈을 덮고 있는 검은 천이 빠른 낙하 속도 때문에 흡사 검은 실처럼 팔랑거렸다. 이때 오죽의 몸은 마치 쏜 살처럼 곧장 작은 배 위로 향하고 있었다.

오죽은 경공을 쓴 게 아니었다. 대지의 만유인력을 이용해 자신의 몸을 자유 낙하시켰을 뿐이다. 수십 장의 거리를 낙하하는 동안 계속 가속도가 붙었다. 배에 착지하기 직전에는 누가 봐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게다가 그의 몸이 바람을 뚫고 공기를 가르는 동안 웅웅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오죽에게서 휘몰아치고 있는 힘이 그의 몸보다 먼저 배에 도달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있던 사람의 삿갓을 날려 버렸다. 삿갓이 멀리 바다 위로 떨어지고 노래를 부르던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소박한 외모에 가을날 맑은 물처럼 깨끗한 눈동자를 지닌 자였다. 이자의 눈동자는 하늘에서 날아오고 있는 오죽의 두 발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동공이 수축되면서 눈빛이 번쩍하고 빛났다!

이자가 백옥 같은 두 손을 소매 밖으로 꺼내어 가볍게 움직였다. 마치 고목나무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이자, 그 손가락 끝에서 무수한 기의 파장이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바닷물 위로 발사되었다. 그러자 물보라 위에서 출렁이고 있는 배가 오죽의 두 발이 배에 닫기도 전에 두어 발자국 정도 뒤로 밀려났다.

겨우 두 발짝 정도 뒤로 밀어낸 것뿐이었다. 하늘에서 운석처럼 떨어진 오죽은 뱃머리만 무자비하게 부수어 놓았을 뿐 노래를 부르던 사람 근처에는 닿지도 못했다.

오죽의 두 발은 바람 소리보다도 빨리, 그리고 매섭게 뱃머리 위로 올라섰다. 이 작은 배는 애당초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불어난 힘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배에서는 쩌걱, 하고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죽이 떨어진 지점 아래쪽으로 배가 밀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배의 뒷부분이 번쩍 들리더니 이내 배가 바닷속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사공은 배가 들리자 반작용으로 하늘로 솟구쳤다. 그 순간 공중에서 두 팔을 펼쳐 들었는데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사방에서 물보라가 일고 뱃머리는 충격으로 산산조각이 나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순간 검은 그림자가 수면 아래서 솟구치더니 하늘 가득 물방울을 흩뿌리며 공중에서 두 팔을 펄럭이고 있는 사람에게 향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손가락을 검처럼 모아 들고는 그자의 목을 겨누었다.

사공은 두 손으로 잽싸게 오죽의 공격을 막아 냈다. 건물을 지탱하는 대들보처럼 안정적이면서 멋진 자세로 오죽이 날리는 필살의 일격을 가까스로 봉쇄했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기운이 충돌하며 작은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었지만 두 절대 고수는 벌써 몇 초식을 겨룬 상태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의 거리가 급속히 멀어졌다. 그리고 이내 해안 절벽을 따라 둘러쳐진 비좁은 모래사장 양쪽에 착지했다.

바다 위에는 부서진 배 파편이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기 시작했다. 탕약을 끓일 때 탕기 위쪽으로 약재 찌꺼기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반 토막 나 꼬리 부분만 남겨진 배는 처량하게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   *   *

"암살에 실패했으니 내 뱃값이나 받아 가야겠소!"

사공이 웃으며 오죽의 눈을 덮은 검은 천을 응시했다.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오죽을 향해 손을 뻗고는 마치 돈을 내놓으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는 오죽과 세 장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단순히 손을 뻗는 동작임에도 오죽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아주 재빨리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나 상대방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피해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사사삭 소리와 함께 오죽 앞 모래사장 위로 빽빽하게 구멍이 뚫렸다. 그야말로 ‘빗물이 모래를 때리니 만 개의 구멍이 생기네.’란 시구를 연상시키는 광경이었다.

떨어진 곳에서 가볍게 손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그 기운이 모래사장을 뒤엎어 버린 것이었다. 현재 이처럼 엄청난 실력을 지닌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지?"

오죽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표정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훨씬 신중한 표정인 것만은 확실했다.

"16년 전 그대와 겨룬 후로 대적할 만한 상대를 찾지 못했다네."

사공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작년에 경도에 돌아갔을 때 섭중을 만났다네. 그런데 그 녀석이 몇 년 동안 그대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고 하더군. 그때는 정말로 그대가 섭씨 아가씨를 따라 저세상으로 가 버린 줄로만 알았지. 가슴이 아파 술 두 동이를 마시다가 한 동이를 땅에 붓는데 눈물 두 방울이 떨어졌어. 한데 올해 여행차 나왔는데 바다 위 먼 곳에서 강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겠나. 누구일까 궁금해 좀 살피러 왔는데······ 바다 위에서 생각이 났어. 바로 오죽 그대라는 걸 말일세."

그가 한탄과 노기를 섞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10여 년 동안 못 만난 옛 친구여, 왜 보자마자 날 죽이려 하였소? 그대는 분명 내 죽어도 그대를 죽이지 못할 걸 알 것이며, 그대 역시 죽어도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걸 알 터인데.

오죽은 고개를 갸우뚱한 채 생각만 했다. 상대방의 말을 인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노래를 부르던 사람은 이 눈먼 자의 성격이 조금 괴팍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상대가 정말로 자신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제대로 된 공격을 했을 게 뻔했다. 그래서 절로 미소를 지은 채 오죽에게 물었다.

"아가씨가 돌아가신 후 그대가 신묘로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네. 그런데 왜 담주 항구에 와 있는 건가?"

"내가 왜 당신을 죽이려는지 잘 알 텐데."

오죽은 뱃사공의 물음에는 대꾸하지 않고 차갑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이 세상에서 날 아는 자는 몇 없다. 그중에서 당신은 입이 가장 싼 사람이야."

사공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난처했다.

오죽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당신을 죽이고 입막음만 할 수 있다면 내 참으로 기쁠 것이야."

사공이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탄식하며 말했다.

"그 무서운 성미는 아직도 못 고쳤나 보군. 나와 비슷한 경지에 이르고도 여전히 죽이려고만 들다니 참으로 희한한 사람일세."

오죽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나는 결과만 따진다. 수단 따위는 중요치 않아."

오죽이 돌연 이맛살을 찌푸렸다.

"궁금했던 사람도 만났으니 이제는 그만 가 보시지."

참으로 시원시원하고 간단명료한 상황 정리였다.

사공은 말할 기회를 빼앗기자 이내 길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바로 두 손을 맞잡고 가슴 위로 끌어 올려 인사했다.

"사실 나는 쓸데없이 말 많은 사람이 아니라네."

그는 말을 마치자 양 소맷자락을 펄럭였다. 그리고 뒷짐을 진 채 반 토막 난 배 위로 멋지게 날아갔다. 배는 반파되었는데도 희한하게 바다 위에 떠 있었다. 그는 부서진 배 위에 서서 양손으로 노를 젓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그 부서진 배를 엄청난 내공으로 저으며 담주성 방향으로 떠나갔다.

오죽은 떠나가는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그의 눈을 가린 검은 천이 더욱 암담해 보였다.

*   *   *

"누구입니까?"

절벽 꼭대기에서 기어 내려온 범한이 물었다. 범한은 절벽 아래 모래사장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을 듣지 못한 터였다. 그래서 여전히 두 고수의 대결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섭류운입니다."

"과연······."

범한이 감탄하며 오죽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도 담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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