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29화 (29/1,108)

029화 글 도적

범한은 전생에 ‘여인의 붉은 소매, 향 내음, 그리고 한밤의 독서’ 장면을 꿈꾸곤 했었다. 그래서 아까도 사사를 억지로 곁에 둔 채 한참 동안 글을 쓴 것이었다. 실내에 감도는 향 내음과 여인의 체취, 그리고 부드러운 붓이 매끄러운 화선지를 스칠 때 느껴지는 감촉. 범한은 그 속에서 이상하리만큼 편안했으며 그 미묘한 기분을 즐겼다.

하지만 이제 혼자서 몰래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혹시라도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까 걱정이 된 까닭이었다.

범한은 훗날 경도에서의 삶을 대비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미리 준비를 해 둬야 한다고 항상 생각했다. 아름다운 장편 소설인 《홍루몽》을 표절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짧은 시와 문장을 베끼는 것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그리고 연회 석상에서 언제든 《홍루몽》 구절을 술술 읊기 위해서는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 두어야만 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미래가 경국의 중심, 즉 담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경도와 분명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확신했다.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어쩌면 조정의 현 고관대작인 아버지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아직 어린 누이 때문일 수도 있으며, 또 어쩌면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이름조차 모르는 수수께끼 같은 친어머니 때문일 수도 있었다.

범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붓을 들어 보옥과 진종 사이에 벌어진 은밀한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먹물이 마르자 이 종이를 서한용 봉투에 넣어 경도에 있는 누이 범약약에게 부칠 준비를 했다.

담주 항구에 위치한 사남 백작가 별저(別宅)에는 범한이 쓴 원고가 단 한 편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범한이 매번 글을 쓴 후 모두 경도로 부쳤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생에 경험한 아름다운 일들을 이 세상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고, 또 그 욕망을 억누르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더군다나 아무도 본 적 없는 멋진 보석을 얻었다고 생각해 보라. 침대 밑에 숨겨 두고 두고두고 혼자서만 본다면 언젠가는 분명 온 세상에, 아니 적어도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그 보석의 가치를 알리고 싶어 마음이 근질근질할 것이다.

명화를 소장하고 있는데 평생 단 한 번도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면 그 소장자는 변태 아니면 그 그림을 훔친 도둑일 것이다.

그런데 범한은 자신이 변태가 아님을 확신하고 있었다. 비록 도둑질을 하고 있지만 참으로 묘하게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글이 훔쳐 온 거란 사실을 아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누이동생의 나이를 무시하고 매달 《홍루몽》을 베껴 써서 그녀에게 보냈던 것이다. 누이에게는 이 이야기가 조설근이란 작가가 쓴 《석두기》라고 일러두었다. 《석두기》는 범한이 전생에 살던 세계에서 《홍루몽》을 일컫는 다른 제목이었다.

또한 범한은 우연히 작가를 알게 되어 매달 그에게 원고를 받아 보기에 누이에게도 보내 준다는 등등 이런저런 설명도 덧붙였다.

앞서 보낸 《홍루몽》에는 진가경이 꿈에서 보옥을 만나고 보옥이 첫 운우지정을 나누는 등 수위 높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동안 자신의 편지를 읽어 온 누이는 그런 내용들을 해로운 호환 마마로 치부하거나, 자신을 음란 마귀로 여기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범약약은 조설근의 글에 담긴 의미와 묘미도 모른 채 무턱대고 읽어 나갔다. 그러다가 조금씩 그 맛을 알아 나갔고, 특히나 대옥이라는 인물이 가부(價府)로 들어간 후로는 글이 주는 묘미에 눈을 떠 버렸다. 그 후로 범약약은 매달 오빠에게 조설근 공에게 다음 내용을 더 많이 써 줄 것을 부탁해 달라는 독촉 편지를 보냈다.

범한은 독촉 편지를 읽고 고민에 빠졌다. 아직 써 놓은 원고도 없을뿐더러 다음 내용을 너무 빨리 써 보내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칠팔십 장(章) 정도에서는 주인공을 환관으로 전락시킬 생각이었다.

*   *   *

글 도적질을 마친 범한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서재에는 다양한 책이 있었다. 모두 경도에 있는 백작가에서 보내준 것이었다. 범한은 매번 이 책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떠올릴 때마다 여태 만나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약간은 좋아졌다. 적어도 아버지란 사람은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성인용 동영상도 인터넷 소설도 없는 이 세계에서 범한이 무료함을 물리치는 방법은 몇 가지밖에 없었다. 매일 체내에 있는 패도의 기와 숨바꼭질을 하거나, 어린 여종들이 민망함에 얼굴을 화끈거리도록 만들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재에서 이런저런 다양한 서적을 읽는 것뿐이었다.

범한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었다. 농사법에서부터 경국의 법률까지 분야를 망라했다. 그리고 서재에는 이 세상의 경전들도 있었다. 이 경전들은 마치 벽돌을 쌓아 올린 듯 서가를 꽉 채우고 있었다.

이 서가는 범한이 원하는 대로 만든 것이었다. 서가의 겉모양은 매우 단순했고 각 층에는 요주 지역에서 온 운향초를 놓았다. 운향초는 책이 좀먹는 걸 막는 데 최고였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이 효능을 아는 이가 별로 없었다. 그저 일반 향신료를 사용할 뿐이었다.

몇 해 동안 책들을 읽다 보니 표현 방법은 약간 달랐지만 그래도 자신이 전생에 배웠던 것들과 닮은 내용들을 꽤 많이 발견했다. 이에 범한은 한비자, 순자, 노자, 손자 등을 표절해 학술 대가로 거듭나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독(毒), 수행, 독서 등 범한은 분야를 막론하고 진지하게 공부해 나갔다. 아울러 현생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침착함과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쉼 없이 지식을 쌓아 갔다.

범한은 자신이 특별히 뛰어난 사람이 아니며 평균 지능이 50밖에 되지 않는 세상에 온 것도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뛰어나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지구에서 오랫동안 축적된 지식 덕분이며,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일찍 각성한 덕분임을 잘 알고 있었다.

등잔에서 작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불꽃이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주변이 어슴푸레 밝아 왔다. 엎드려 책을 읽기 시작한 범한은 이내 점점 잠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다음 날 새벽, 범한은 세수와 양치를 마치고 노부인의 침소로 찾아가 문안 인사부터 드렸다. 대청에 들어 아침 식사를 하는 건 그다음이었다.

범한은 자객 사건 이후로 다시 노부인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행동을 하게 되었다. 우선 그동안 해 오던 새벽 문안 인사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늘 인자한 노부인과 한담도 나눴다. 그때마다 범한은 재밌는 이야기로 노부인을 즐겁게 해 드렸다.

"듣자 하니 언젠가 황제 폐하께서 재상, 원로회 영사 대신, 감찰원 원장, 궁중의 우두머리 태감, 그리고 고관들을 대전에 모아 놓고 국정을 논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필 하늘에서 유성 하나가 황궁 지붕 위로 떨어졌고, 지붕이 부서지면서 바닥에 꿇어앉아 있던 대신들이 모두 다쳤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다급히 어의를 부르셨고 신하들이 치료받는 내내 병상 밖을 지키셨다고 합니다. 얼마 후, 병실에서 나온 어의에게 폐하께서 다급히 "어의, 재상은 구하였는가?"라고 물으시니 어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재상은 구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중요한 다음 대목을 앞두고 노부인의 얼굴에 잔뜩 궁금한 기색이 돌았다. 아직 어린 손자가 왜 경도에서 발생한 일을 언급하는지 의아했기 때문이다. 이 노부인은 숱한 권력 암투를 직접 겪어 본 터라 항상 조심 또 조심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그렇다면 영사 대신은 어찌 되었는가?"라고 물으시자, 어의가 죽을상을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역시 구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폐하께서 "태감 홍 공공은 구하였는가?"라고 물으셨고 어의가 이번에도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폐하께서 대로하여 호통을 치시며 "그렇다면 누구를 구하였단 말이냐!"라고 말씀하시자, 정신이 바짝 든 어의가 "황제 폐하 만세! 경국을 구하셨나이다!"라고 했답니다."

노부인은 마지막 구절을 듣고 나서야 궁금증이 모두 풀렸다. 너무 웃겨서 몸은 들썩이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힌 채로 아무 죄 없는 범한을 가리키며 농담처럼 질책했다.

"이런 장난꾸러기 같으니. 이곳이 경도였다면 이 정도 농담만으로도 감찰원에 잡혀 들어갔을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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