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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8화 (28/1,108)

028화 여인의 붉은 소매, 향 내음, 그리고 한밤의 홍루몽

한바탕 암류가 휩쓸고 지나간 담주 항구는 어느새 평온을 되찾았다. 불타 죽은 채소 배달부 노합과 그와 같은 집에서 죽어 있던 시체 한 구가 어떤 관계인지는 이미 사람들의 관심 밖 일이 되었다. 더욱이 관아에서 아무런 발표도 하지 않다 보니 어리석은 백성들로서는 화재가 왜 발생했는지 흥미조차 느끼지 못했다.

담주 항구의 치안은 항상 훌륭했다. 군적 관리를 위해 만들어 놓은 호적 제도가 빈틈없이 시행되고 있어 경국 북방으로 흘러들어온 범죄자와 모험가들은 담주에서 나쁜 짓을 도모할 수 없었다. 황제가 무역 중심지를 남쪽으로 이동시킨 후로 담주 인근의 일곱 개 군현의 세수를 면제시킨 이유도 있었다. 이후로 백성들은 단기간에 부를 축적하는 건 불가능해도 집집마다 식량 여유분은 구비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30년 전처럼 기근 때문에 유민으로 전락하거나 폭동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었다.

담주성 주민들은 성품이 매우 온화했다. 담주성은 바다와 접해 있지만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사나운 바다의 기질에 물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성 안에서 가장 존귀한 사남 백작가 사람들을 대할 때면 늘 그에 맞는 존경심과 조심성을 드러냈다. 이곳 주민들은 모두 범한이 사생아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꼬박꼬박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자신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상대를 얕잡아 보는 마음을 열심히 억눌렀다.

그런데 사람들의 이와 같은 태도는 오히려 범한을 괴롭게 했다.

이 세상에서 아주 조금이지만 범한이 그나마 귀족 자제로서 본때를 보여 준 이는 주 집사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박복하게 세상을 떠나자, 그 후로는 더 이상 귀족 가문의 도련님 행세를 할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담주 항구를 따라 펼쳐진 큰길을 걷고 있을 때도 친절을 베풀고 존경심을 표하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체내 정기가 서서히 쌓이고 있었다. 그러자 경락도 이상하리만큼 튼튼해졌다. 그리고 허리 뒤쪽 설산혈로 흘러 들어간 대부분의 정기는, 왜 그곳에 죽치고 머물러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용한 상태를 유지했다.

이번 생에 범한은 시종일관 점잖고 일찍 철이 든 소년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이렇게 지내는 날이 계속되자 답답하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게다가 자신의 실력으로 자객 정도는 충분히 죽일 수 있다는 걸 확인하자, 의협이 되어 의를 행하고 미녀를 구출하는 등 흥미진진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담주는 평화로워도 너무 평화로웠다.

*   *   *

서재에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 내음은 머리를 맑게 해주고 몸을 편안히 해주었다. 범한은 털을 매서 만든 붓을 들고 손바닥 네 개 크기 정도의 화선지에 진지하게 글을 써 내려갔다.

요즘 경국 문단은 금문파(본 소설에서는 현재 쓰는 언어로 글을 쓰자고 주장하는 파이다._역주)와 고문파(본 소설에서는 옛글을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파이다._역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이 글씨를 쓰는 도구 역시 거위 깃털 붓과 털로 만든 붓으로 나뉘어 있었다. 편리성을 놓고 보았을 때 거위 깃털 붓이 더 좋은지 경도의 각 관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거위 깃털 붓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개도 담주에서 범한을 가르칠 때 거위 깃털 붓을 사용했다.

그런데 거위 깃털 붓은 널리 보급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 오래 쓰면 끝이 쉽게 무뎌지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붓을 만들려면 깃털 끝을 날카롭게 다듬는 기술이 중요한데, 이는 손재주가 뛰어난 장인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반면 범한은 털을 매어 만든 붓을 더 좋아했다.

첫 번째 이유는 공교롭게도 이 세상에서도 한자를 사용하고 있어, 털로 된 붓으로 글씨를 더 멋지게 쓸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범한은 남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서예 실력을 닦아 보기로 결심했다.

두 번째 이유는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이 이야기는 반드시 털로 만든 붓으로 써야만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특히 붓을 사용해 모든 글자를 수려한 해서체로 베껴 써야만 《홍루몽》을 향한 존경심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범한 곁에서 여종 사사가 가녀린 두 손가락으로 먹을 잡고 벼루에 천천히 갈고 있었다. 사사의 시선이 도련님 앞에 펼쳐져 있는 종이로 옮겨 가고 그 위에 있는 내용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서 지능 혼자 찻잔을 씻고 있다는 걸 안 진종, 뛰어와 지능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지능이 발을 구르며 꾸짖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다시 이런 짓을 한다면 소리칠 것입니다! 그러자 진종이 애걸복걸했다. 착한 그대여, 내 애가 타 죽겠소. 오늘도 나를 따르지 않겠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 자진할 것이오. 그러자 지능이 말했다. 대체 어쩔 셈입니까? 나는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이들 떠나야만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자 진종이 말했다. 그거야 쉬이 해결할 수 있소이다. 다만 멀리 있는 물로는 갈증을 해결할 수 없는 법······.’

사사가 계속 봐 주기 민망한 구절을 읽고는 두 뺨이 발그레해져 범한을 꾸짖었다.

"이 지능이란 자는 어찌 이리도 염치가 없답니까?"

여종의 원성이 귓가를 울리자 범한은 궁금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사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누나는 왜 지능이 염치없다고 생각해요?"

범한은 자신의 방에서 그리고 다른 이들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지 않을 때면 여종들을 누나라고 불렀다. 동아에게 처음으로 누나라고 부른 후로 습관으로 굳어진 터라 여종들도 그런 범한을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노부인도 나무라지 않자 여종들은 몇 년 동안 범한이 하는 대로 그냥 두었다. 그리고 이제는 범한이 자신들을 누나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사사의 얼굴에서 홍조가 사라지고 아침 구름처럼 말갛게 변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얼굴로 사사가 잠꼬대하듯 대꾸했다.

"이 비구니는······ 말과 행동이 맹랑하고 경망스러운데······. 그런데 도련님, 비구니가 뭡니까? 만두암은 또 어떤 곳입니까?"

범한이 피식 웃었다. 잠시 후 진종과 지능의 간통 장면까지 가야 사사가 망측해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비구니가 무엇이냐는 사사의 질문에 그제야 이 세상에 불교라는 종교가 없으며, 그러니 자연히 스님과 비구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범한은 붓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비구니는 고행하는 승려와 같은 사람이고 만두암은 신묘 같은 곳이에요."

설명을 들은 사사가 깜짝 놀랐다.

"도련님, 그렇다면 그리 험한 글을 쓰시면 안 됩니다. 신묘는 저 멀리 천상에 있는 곳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가엽게 여기기는 해도 세상일에 간섭하지는 않습니다. 그처럼 신성한 곳에서 어찌 그런 난잡한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범한은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그냥 웃으며 몇 마디로 얼버무렸다.

"알았어요. 글을 쓸 때 그 점을 조심할게요."

범한은 몇 자를 더 써 내려가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사사를 밖으로 내보냈다. 뒤이어 나올 미성년자 관람 불가 내용을 여자인 사사가 보고 할머니께 일러바칠지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바꾼 내용으로 자주 동아를 놀렸었다. 그런데 그 모든 내용을 줄곧 서석 선생에게 배운 거라 생각한 동아가 돌연 어느 날 할머니께 일러바치고야 말았다. 그 결과 범한은 며칠 동안 책을 외워 쓰는 벌을 받아야만 했다.

사사는 신신당부하는 차원에서 몇 마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갈고 있던 먹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문밖을 나서면서 살짝 몸을 비트는 사사의 자태에 범한의 심장이 살짝 뜨거워졌다.

범한은 붓을 쥔 채 깊은 사색에 잠겼다. 범한에게 《홍루몽》을 베끼는 작업은 선현들의 시와 글을 표절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일이었다. 그래서 일 년 정도 지났는데도 아직 15회까지밖에 옮기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다행히 요즘 들어 머리가 이상하리만큼 맑아졌다. 게다가 전생의 기억도 전혀 잃어버리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오히려 더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조설근이 쓴 《홍루몽》에서 아름답지만 외우기 어렵다고 정평이 난 판결문과 꿈 이야기들도 모두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등장인물이 처한 시대와 상황 배경은 이 세상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이에 범한은 사람들이 《홍루몽》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까 염려되어 필요한 부분은 여기 상황에 맞춰 조금씩 내용을 바꿔서 쓰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범한은 전생에 YY 전자책 사이트에서 읽은 《홍루몽》 내용을 여전히 높이 신뢰하고 있었다. 다른 지역의 소를 베이징까지 끌고 갔을 때 그 소가 다른 동물로 변해 버리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홍루몽》은? 범한에게는 이 세계에 소개한 《홍루몽》도 똑같은 《홍루몽》이며, 본질적으로 거대한 소 그 자체임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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