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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26화 (26/1,108)

026화 양털 담요를 덮은 노인

3분 뒤 김이 나는 생선을 접시에 담고 남쪽에서 온 귀한 간장과 호박즙을 뿌리자 그럴싸한 요리가 완성되었다. 증기에 익힌 생선과 소스가 어우러지면서 주방에 맛있는 냄새가 가득 퍼졌다. 범한은 저녁에 남긴 밥을 찾아서 준비한 생선 요리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다음 날 새벽 노부인에게 문안 인사를 하는 범한에게 주 집사가 어젯밤 주방에 도둑이 들었다고 보고했다. 범한은 곧장 무슨 일인지 이해하고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가 노부인의 어깨를 주무르며 주 집사에게 말했다.

"어젯밤에는 내가 음식을 해 먹은 것이니 걱정할 것 없어."

주 집사는 멍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어린 도련님이 아랫사람을 시키지 않고 몰래 주방에 들어가 음식으로 장난을 치다니, 만일 불이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어.’

범한은 주 집사의 생각을 읽고는 노부인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최근에 책에서 생선찜 요리를 하는 방법을 읽어서 한번 해 보고 싶었습니다. 맛이 괜찮아서 할머니께 해 드린다면 분명 좋아하실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종들이 놀랄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분명 일리 있는 말이라 평범한 사람이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노부인은 범한의 말을 듣더니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하든 상관없지만 다음에는 무슨 일이든 정리정돈을 잘하도록 하렴."

노부인은 항상 범한에게 엄격해서 이처럼 온화한 목소리로 말한 적이 거의 없었다. 순간 범한은 불안해졌다.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자신을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자신을 안쓰럽게 여기는 걸까.

노부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어제 일은 나도 알고 있다. 더구나 네가 한밤중에 주방에 들어가 위험한 일을 하는데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건 주 집사의 일 처리가 야무지지 못하다는 뜻이겠지. 이런 일이 더 있어서는 안 되니 그를 경도로 돌려보낼 생각이다."

범한은 약간 놀랐다. 어제 사람을 죽이고 돌아온 뒤로 주 집사의 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자객이 저택 안으로 들어와 독을 넣은 사건과 주 집사가 분명 연관이 있을 텐데,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낮에 경도에서 온 편지를 읽던 범한은 저택을 나갔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채소 시장을 지나다가 비로소 ‘무슨 일이든 정리정돈을 잘하라’고 말한 노부인의 뜻을 이해했다.

채소 시장 구석이 불에 타 폐허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웃집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그저 작은 집 한 채만 흔적도 없이 타 버렸을 뿐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집에서 신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타 버린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타 버린 집은 바로 어제 범한이 살인을 한 그 집이었다.

‘시체를 훼손해 증거를 없앤 것인가.’

범한은 할머니가 주 집사를 경도로 돌려보내겠다고 한 말과 잿더미가 된 집이 연관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엄격하기만 한 할머니가 손자의 안전을 위해서 이처럼 주도면밀하게 일을 처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눈을 감고 부처에게 기도하는 할머니의 고상한 모습을 생각하면 눈앞에 불타 폐허가 된 집과 연관 짓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불에 그슬린 돌과 나무 잔해를 바라보던 범한은 아직 배워야 할 일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범한은 옆에서 그를 알아보고 뭐라 인사하려는 주민을 무시한 채 채소 시장을 나와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잡화점으로 향했다.

"주 집사가 경도로 돌아갔어요."

범한의 말에 오죽은 가게 안에 가만히 서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구경하던 주민들이 떠나면서 채소 시장 거리는 어느새 한산해져 있었다.

"어제 우리가 갔던 집이 불탔어요."

계속되는 말에도 오죽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자 범한이 그의 소매를 꽉 붙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주 집사 일을 잊어버린 게 어리석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래서 할머니가 대신 처리하게 하신 거예요?"

오죽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동정을 받고 싶으신 겁니까? 이런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몰랐던 것이 창피하십니까? 그래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위로를 받고 싶으신 건가요?"

의아하게도 오죽의 목소리는 평상시의 무뚝뚝한 말투보다 훨씬 생기가 돌았다. 범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게 상처 입을 자존심 같은 건 없어요. 다만 사람을 죽이는 느낌은 좋지 않더라고요. 게다가······."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 와서 비개와 오죽을 만나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일반 귀족 자제들보다 강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랬다면 아마······ 자신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이처럼 은밀한 배후가 숨겨져 있는 권력 싸움에서는 자신의 지식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 같았다. 범한에게는 아직 더러운 권력 싸움을 파악하고 복잡한 계략을 운용해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었다.

범한은 자신이 천진한, 그저 천진하기만 한 소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죽이는 느낌과 죽임당하는 느낌 중 어느 게 더 좋을 것 같습니까?"

오죽의 질문에 범한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죽임당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미 답을 알고 계시니 굳이 물어볼 것도 없겠군요."

오죽이 그에게 요패를 건네주며 말했다.

"그리고 큰마님은 주 집사를 담주에서 쫓아냈을 뿐 죽이지는 않으셨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경도 저택이 시끄러워지는 걸 바라지 않으셨거든요."

범한은 오죽이 건네준 것을 바라봤다. 그것은 백작가에서 사용하는 집사 명찰로 주 집사의 것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오죽을 바라봤다.

"아저씨가 죽였군요?"

범한은 순간 자객의 신분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객이 사용한 독약과 처리 방식이 왜 감찰원의 방식과 같은 거죠?"

"비개 대인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

*   *   *

봄 경치가 아름다운 날 네모반듯한 경도성 서쪽 외벽에는 거무스름한 안료가 칠해진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감찰원이다. 너무 음습해서 공포스러운 건물 안, 어느 밀실에는 앙상한 얼굴에 수염이 없는 노인이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노인의 무릎에는 부드러운 양털 담요가 덮여 있었다.

유리창에 검은 천이 꼼꼼히 가려져 있어 밀실 안에는 햇볕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것은 노인이 오래전 북쪽에서 중병에 걸린 뒤로 햇빛을 무서워하기 때문이었다.

"비개, 담주에서의 일은 조사가 끝났나?"

노인이 앞에 앉아 있는 동년배 노인의 갈색 눈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물었다.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던 비개는 원장의 입가에 퍼지는 섬뜩한 미소를 보고는 마음속으로 자신과 노인 중 누가 진정한 괴짜일까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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