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화 고양이 매듭
"도련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남자 종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종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점심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거실에 놓인 큰 식탁에 노부인과 범한이 마주 보고 앉자 곧이어 산해진미가 담긴 접시들이 식탁 중앙에 놓였다.
다만 이상한 점은 할 일을 끝낸 종들이 식사하러 후원에 가지 않고 주변에 가만히 서서 범한의 젓가락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이가 어린 여종들은 몰래 침을 삼키는 것이 상당히 배고파 보였다.
이것은 이곳의 불문율이었다. 범한이 강력히 요구하고 노부인이 허락해 생긴 규칙으로 이미 모두가 익숙했다. 백작가 별저에서는 범한이 먼저 모든 음식을 맛본 뒤에야 식사할 수 있었다.
모두 어째서 평소에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도련님이 이런 횡포를 부리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언젠가 범한과 가장 가까운 여종 동아가 먼저 음식의 간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 일로 범한은 불같이 화를 내며 동아를 저택에서 쫓아냈다. 그 일 이후로 다들 도련님이 귀족 자제의 권위를 세울 목적으로 이런 규칙을 세운 것이라 짐작하고 잠자코 따를 뿐이었다.
당시 동아가 울면서 저택에서 쫓겨날 때 노부인은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집 안에는 범한이 음식을 씹고 국을 마시는 소리만 들렸다. 모든 종이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옆에서 기다렸다. 마치 부잣집에서 주인이 먹다 남긴 음식을 종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다고 범한이 음식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음식을 조금씩 맛볼 뿐이었다. 다만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고 맛을 보았기에 먹는 속도가 느렸다.
노부인은 그동안 손에 든 조각상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마침내 모든 요리를 맛본 범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종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식탁 위에 놓인 죽순볶음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이 음식과 함께 식사하도록 하지."
여종들은 한숨을 돌리고는 급히 밥을 펐고, 일이 없는 종들은 식사하러 후원으로 갔다. 그리고 부엌에 있는 종들은 남은 죽순볶음을 모두 담아서 범한 앞에 놓았다.
"할머니, 식사하세요."
범한이 일어나 공손히 노부인을 향해 인사를 올린 뒤 두 손으로 밥그릇을 받아 노부인 앞에 놓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밥그릇을 들고 식사하기 시작했다. 죽순 볶음을 연달아 집어 먹으면서 웃음기 어린 눈빛을 짓는 그의 모습은 오랫동안 찾던 무언가를 마침내 찾은 듯했다.
한쪽에서 범한의 모습을 지켜보던 여종들은 웃는 얼굴과 새벽에 주 집사를 때리던 모습이 대비되면서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나머지는 방에 가서 먹어야겠어."
범한이 옆에 있던 여종에게 이렇게 말한 뒤 죽순볶음과 쌀밥을 들고 정원 옆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식사 중이던 노부인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범한의 예의 없는 행동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으로 돌아간 그는 구토를 유발하는 가루를 찾아 입에 쏟아 넣은 뒤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 긁으며 배 속에 있는 음식을 모두 토해 냈다. 그러고는 즉시 서랍을 열어 자신이 만든 약을 찾아 물과 함께 먹은 뒤 정기를 운용해 몸을 살폈다. 몸에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는 한시름 놓았다.
범한은 접시에 담긴 죽순볶음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고는 변기통에 모두 쏟아 버렸다. 죽순볶음 안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감찰원 밀정이 자주 사용하는 ‘고양이 매듭’이라는 독이었다.
‘고양이 매듭’은 남쪽 섬에서 나는 감귤류의 과일이다. 모양은 예쁘지만 꽃에서는 이상한 매운 향기가 나는데, 바로 그 독이 죽순볶음 안에 들어 있었다.
고양이 매듭은 음식에 넣어도 색이 변하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음식의 맛을 돋워 주는 효과가 있어 감찰원 밀정들이 몰래 암살을 할 때 많이 사용했다. 이 독약은 주로 밤에 효과가 나타나기에 복용한 사람은 자다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죽었다. 더구나 시체에 흔적도 남지 않아 사인을 밝힐 수도 없었다.
비개는 감찰원 독약 연구의 창시자였고 범한은 그의 유일한 제자였다. 그래서 그는 죽순볶음을 맛보자마자 알아챌 수 있었다. 자객은 아주 약하게 쓴맛이 나는 고양이 매듭의 특징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죽순볶음 안에 독약을 탄 것이었다. 상당한 내공을 가진 인물이 분명했다.
범한이 식사할 때 독이 들어 있는 걸 알아차렸으면서도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해독제를 복용하지 않은 것은 노부인을 놀라게 할까 봐서였다. 하지만 만약 그가 고양이 매듭이란 독약을 몰랐거나 먹자마자 효과가 나타나는 독약이었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비개의 경고를 들은 이후 범한은 경도에 있는 새어머니가 자신을 독살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음식을 먹을 때 항상 주의했다. 사실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독약을 먹고 죽는 것보다는 무고한 저택의 종들이 죽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음식을 자신이 먼저 맛보는 것이다. 황궁에서 환관이 음식을 먼저 맛봐 안전을 확인하는 것과 같았다.
물론 범한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자신의 생명을 귀중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죽는 건 참을 수 없었다.
* * *
범한이 주방에 모습을 드러내자 종이 급히 일어나 그의 앞에 걸상을 내놓으며 물었다.
"도련님, 아직 배가 고프신가요? 뭘 더 내올까요?"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아까 먹은 죽순볶음이 상당히 맛있더라고."
옆에 서 있던 주방장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응. 아주 신선하던데 언제 들여온 거지?"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히 물었다.
"오늘 오전에 들여온 거라 신선합니다."
"그래, 오늘 외부 사람이 주방에 들어오지는 않았나?"
"평소에 채소를 배달하는 노합이 오늘 몸이 아파 조카가 대신 왔었습니다."
"그렇군. 나는 이만 가 보겠네."
범한은 주방장이 건네주는 고기 요리를 젓가락으로 집어 먹고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주방에서 음식을 먹은 건 할머니에게 말하지 말게."
어린 범한이 주방에서 떠나자 종들은 비록 범한이 세운 식사 규칙을 따르긴 힘들지만 귀족 자제들이 흔히 보이는 나쁜 습관이 없어 좋다고 수군댔다.
그 시각 담주항의 좁은 골목길을 걷던 범한은 어느 집 뒷담 앞에 서더니 사향고양이처럼 단숨에 담을 넘었다. 바로 채소 배달부 노합의 집이었다.
백작가에서 일하는 10여 명의 사람들은 바뀐 여종들을 제외하면 모두 현지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함께했기에 의심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범한은 자신도 알고 있는 채소 배달부 노합이 공교롭게도 오늘 병이 났다는 것이 수상했다.
노합의 집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범한의 눈에는 대낮처럼 밝게 보였다. 소리를 죽이고 살며시 집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