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높은 산등성이에 서서
뺨을 맞아 사방에 침을 분출하며 바닥에 쓰러진 주 집사의 모습은 처참했다. 그의 얼굴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상황을 지켜본 사람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두려움과 의아함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범한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 같은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설마 내가 정말 못 때릴 거라 생각한 거야? 네 신분을 망각한 모양이구나. 아마도 교양을 갖춘 주인이면 아랫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지. 하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그렇지 않아. 설마 아직도 내가 때리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겠지? 나는 계속 때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참고 견디도록 해. 정 못 참겠으면 울며불며 할머니나 경도에 찾아가 고자질을 하든가. 대신 다시는 후원에 들어오지 말고 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마. 꼴도 보기 싫으니까."
말을 마친 뒤 그는 바지에 묻은 먼지를 떨어내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걸상에 앉아 있는 사사에게 말하고는 백작 별저를 나갔다.
뒤에 남겨진 여종들은 자기도 모르게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상냥하고 귀여운 남자아이에게 이렇게 난폭한 면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더욱 무서웠다.
이때 후원으로 온 노부인은 바닥에 쓰러져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신음하고 있는 주 집사를 보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열두 살짜리 범한이 작년에 여종을 내쫓은 데 이어 오늘 주 집사의 따귀를 때림으로써 백작 별저에서 자신의 위엄을 세운 것이다.
* * *
담주항에서 서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해변은 암초들이 밀집해 있어 지형이 험난했다. 바닷바람을 타고 밀어닥치는 파도가 단단한 암석에 부딪치면서 하얀 물보라를 일으켰다.
동쪽에 있는 좁은 길은 듬성듬성 자리 잡은 기괴한 암석들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이 좁은 길을 홀로 걸어가던 범한이 몸을 돌려 바다를 등지고 섰다. 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우레와 같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가파른 절벽이 우뚝 솟아 있었다. 산봉우리가 바닷바람과 파도에 깎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벼랑이었다. 산봉우리 반대쪽에는 깊은 숲과 늪지가 있어 그곳에서 정상에 오를 방법은 없었다. 산 정상에 오르려면 절벽을 타고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범한이 절벽의 표면을 살펴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오를 길을 찾았다. 며칠 동안 해안가에 거센 바람이 불어 돌들이 가만히 있어도 우수수 떨어졌다. 그래서 오르려면 무척 조심해야 했다.
뒤에서 거센 파도가 검은색 암초를 덮쳤다. 파도를 뚫고 암초를 지나 절벽에 다다르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수면이 얕은 모래사장을 지나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 모래사장은 다른 곳보다 습기를 많이 머금고 있어 발을 내딛자마자 바닷물이 신발에 스며들었다.
범한은 어쩔 수 없이 신발을 벗어 깨끗한 구덩이에 넣고 절벽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마른 모래로 손바닥을 비비고는 자신의 몸에 있는 정기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오른손을 뻗어 절벽을 잡았다.
범한은 빠른 속도로 절벽을 타고 올라갔다. 몸을 바짝 붙인 채 기어오르는 모습은 마치 절벽 타기에 능한 기괴한 동물 같았다. 손을 뻗어 잡을 곳을 찾고 발을 내딛는 동작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부드러워서 전혀 힘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머지않아 범한은 절벽 정상에 다다랐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그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온몸이 땀에 젖은 그는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시원함을 느꼈다.
"누구도 나처럼 빠른 속도로 오르지는 못할 거야. 아니, 산 정상에 있는 맹인이라면 아마 더 빨리 오를 수 있겠지."
범한은 절벽을 오르면서 방금 저택 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새어머니의 심복인 주 집사가 갑자기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지난 1년 동안 얌전히 굴다가 왜 갑자기 실수를 저질러 자신에게 빌미를 준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닷바람이 머금은 습기 탓에 절벽의 표면이 미끄러웠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긴장이 풀리면서 자연히 집 안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순간 범한의 집중력이 흩어지면서 오른손이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졌다.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범한은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왼손에 정기를 집중해 세 손가락으로 바윗돌을 꽉 잡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은 마치 바윗돌에 박힌 것처럼 굳건해 보였다.
그때 위에서 나무 막대기가 내려오더니 잡으라는 듯 눈앞에서 살랑댔다.
범한은 못 본 척 나무 막대기를 피하며 몸을 움직여 발끝을 절벽에 고정하고는 힘껏 뛰어 정상에 올랐다.
"집중하지 않으면 죽는 겁니다."
산봉우리 정상에는 무명옷을 입은 오죽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눈은 평소와 다름없이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범한은 아무런 대꾸 없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호흡이 가라앉자 일어서서는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범한은 자신이 품고 있는 의혹에 오죽이 정확한 답변을 해 주기를 기대했다. 오죽이 냉담한 말투로 말했다.
"도련님은 뺨을 때리는 것으로 주 집사를 단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할머니가 제 편에 서 주신다면 가능하죠."
"그럼 됐네요."
오죽은 이 문제로 이야기하는 게 내키지 않는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의문스러운 건 담주항에 오고 1년 반 동안 얌전히 있던 주 집사가 갑자기 왜 그런 짓을 저질렀냐는 거예요. 평소라면 진심을 드러낼 이유가 없는데, 혹시······ 그동안 준비했던 일을 실행할 생각이거나, 아니면 제가 경도에 있는 남동생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테니 굳이 잘 보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말을 하던 범한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앳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비개라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범한의 모습에 놀라며 의문을 품었겠지만 오죽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범한이 늙은 요괴로 변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범한은 오죽이 맹인이라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도 모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오죽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별것 아닌 일이에요."
오죽은 범한이 주 집사의 행동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일 거란 의심이 드는 게 별것 아닌 일인가요?"
오죽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저와 비개 대인이 도련님을 가르쳤는데도 이처럼 별것 아닌 일도 혼자 처리하지 못하신다면 큰 사건이 일어나겠지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범한은 오죽이 자신을 대신해 이 일을 해결해 주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고는 말했다.
"시작하죠."
"그래요."
이후 오랫동안 절벽 구석에서는 웃통을 벗은 범한의 가련한 신음이 들려왔다.
"다시······."
목소리가 들리고 얼마 뒤 나무 막대기가 획 지나가며 범한의 등을 매섭게 때렸다. 순간 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