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화 힘겨운 수련
깊은 밤 범한은 식칼을 쥔 채 도마 위에 있는 무를 멍하니 바라봤다. 무덤에서 시체를 파내 해부한 이후로 다시 한번 효과적이지만 고된 수련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인생에서 두 번째로 찾아온 기회였다.
그는 가끔 인생이란 참 재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성격이 괴팍한 두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비개와 오죽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범한의 모습에도 괘의치 않고 독을 사용하는 방법과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더구나 그들은 가르치는 방법은 상당히 변태적이었다.
깊은 밤 잡화점 뒤쪽에 있는 방에서 탁탁, 소리가 들려왔다. 바깥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던 오죽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칼질하는 속도가 느리군요."
범한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작은 산처럼 쌓여 있는 무채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오른팔을 들어 칼질을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무채 써는 수련을 해서 속도는 오죽과 거의 비슷해졌고, 두께도 얇고 균등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동안 힘겨운 수련을 하면서 오른쪽 팔은 부었다가 가라앉고, 통증에 시달리다가 나아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수련했음에도 무채를 썰 때마다 나는 소리는 지우지 못했다. 범한은 오죽의 경지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비록 무채를 써는 것과 무공을 수련하는 게 무슨 연관이 있겠냐마는 오죽은 4대 종사와 맞설 수 있는 절대 고수이니 필요 없는 수련은 아닐 거라 짐작했다. 더구나 범한은 무채를 써는 게 재미있고 좋았다. 가만히 썰다 보면 드럼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물론 오죽의 수련은 이것뿐만이 아니었고 벼랑 같은 곳에서 기마 자세를 하고 걸어가거나 하는 통속적인 방식도 있었다. 그의 수업 방식은 매우 괴짜 같아서 변기 위에서 기마 자세를 취하게 한다거나, 손에서 쥐가 날 때까지 채썰기를 시킨다거나, 일어나지 못할 때까지 달리게 한 적도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수련은 3일 간격으로 담주항 밖 외진 곳에서 오죽과 무예를 겨루는 수련이었다. 한마디로 범한은 절대 고수라 불리는 맹인 오죽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해야 했다.
정말 피눈물 나도록 힘겨운 어린 시절이었다. 범한이 괴로워하자 오죽은 예전에 자신의 어머니도 이런 수련을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초강도 수련이 괴롭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실전에 기반을 둔 강도 높은 수련이라 운동량이 상당했는데, 이건 이전 세계에서 운동선수들이 금메달을 획득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과 비슷했다.
그럼에도 범한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불평 한마디 없이 모든 수련을 소화했다. 겉으로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련을 견디는 척했지만 사실 알맹이는 어른인지라 수련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몸 안에 있는 난폭한 정기는 요 몇 년 동안 더욱 격렬해졌다. 단전이나 허리 뒤쪽에 있는 설산에 정기를 가둘 수는 있었지만, 아직 몸의 성장이 끝나지 않아 종종 정기가 경맥으로 침범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가끔 정기가 밖으로 넘치는 현상이 나타나면 주변 가구들이 부서지고는 했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어느 날 정기가 쌓이는 속도가 경맥이 자라는 속도를 앞질러 몸이 폭발해 죽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맹인 오죽도 그의 몸 안에 있는 난폭한 정기를 잠재우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끊임없이 단련시켜 신체의 기량을 높일 뿐이었다. 무채 써는 수련은 의지력과 지구력을 향상해 주어서 범한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정기를 안정적으로 통제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범한은 이 세계 사람 누구보다도 죽음을 잘 알았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죽음을 두려워했고, 삶을 소중히 생각했다. 그렇기에 패도의 권이 가져오는 부작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오죽의 훈련도 이를 악물고 견뎠다.
훗날이 돼서야 범한은 당시 오죽의 훈련에 깊은 뜻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기가 화염이라면 범한의 신체는 화염을 가두는 아궁이였다. 신체의 기량을 높이는 수련은 화염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아궁이를 만드는 것과 같았다. 특히 의지력을 단련하고 정신력을 기르는 수련은 아궁이의 입구를 작게 만들어 화력을 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정말이지 힘들었다.
* * *
새벽녘 잠에서 깬 범한이 눈을 비비더니 슬며시 여종의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불 안에 남아 있는 온기를 느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종인 사사는 머리를 빗다가 범한이 일어난 걸 발견하고는 웃으며 잠자리로 다가와 범한이 덮고 있는 자신의 이불을 확 벗겼다. 그러고는 머리를 대충 모아 묶은 뒤 뜨거운 물을 준비하러 나갔다.
범한은 이불 안에서 기어 나와서 자신이 사사에게 준 솜으로 만든 베개에 앉았다. 그러고는 이불을 들어 올려 안을 바라보더니 이전 세계에서 병이 나기 전에 술자리에서 가장 즐겨 했던 가위바위보 주문을 외웠다.
"누가 음탕할까, 내가 음탕하지! 누가 음탕할까, 네가 음탕하네!"
범한이 두 눈을 치켜뜨고 이불 속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방탕한 사람이다. 너는 아직 방탕할 능력이 없지."(중국 인터넷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인데, 웹소설 사이트에서는 ‘누가**할까 내가**하지!’라고 음탕이란 단어가 지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내주신 원문에는 그대로 있어 임의로 결정할 수 없어 고민 끝에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아마도 웹소설이다 보니 작가가 중국 젊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자주 쓰는 말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는 앞에 빨갛게 표시한 부분(‘그러고는 이불을 들어 올려’라는 부분부터 역주가 달린 부분까지)은 삭제해도 내용에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역자)
이 세계에 오고 여러 해가 지나면서 범한은 편안하고 나태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여종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다 다시 잠들려 할 때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정원에서 누군가를 꾸짖는 듯한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호기심에 옷을 입고 문을 슬쩍 열어서 밖으로 나가 보니 눈앞에 불쾌한 장면이 보였다.
다소 피곤해 보이는 주 집사가 사사를 매섭게 꾸짖고 있었다. 아마도 뜨거운 물을 가져오려던 사사가 급하게 서두르느라 머리도 제대로 빗지 않고 옷도 단정하게 입지 않았기 때문인 듯했다. 주변에는 여종 몇 명이 겁에 질린 얼굴로 둘러서 있었다.
작년에 경도에서 온 주 집사는 범한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두 번째 부인의 사람인 그는 이곳 사람들을 호시탐탐 감시했다. 지난 1년 동안 고분고분한 척하며 이상한 점을 보이지 않았기에 범한은 그를 내버려 두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주 집사가 자신의 여종을 호되게 나무라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에 범한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주 집사에게 다가가 상황을 이야기하며 풀어 보려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주 집사는 집요하게 사사를 놓아주지 않았다.
사사에게 집안의 규칙을 가르쳐 주겠다는 주 집사의 고집에 범한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다. 그는 이내 감정을 가다듬고는 다시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내 사람이니 내가 데리고 가서 가르치도록 하지."
범한의 목소리는 침착하다 못해 다소 약하게 들렸다.
하지만 주위에 있던 여종들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고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사남 백작가의 가장 큰 문제인 경도와 담주 사이의 갈등이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