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경도에서 온 편지
담주성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먹구름이 드리웠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먹구름은 먼지가 잔뜩 붙은 커다란 솜사탕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 바닷가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이런 날씨에 익숙해서 비가 오려면 아직 멀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평상시처럼 일상을 이어 갈 뿐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사남 백작가 별저에 사는, 용모가 아름다운 도련님만이 여름 태풍이 오기 전이면 항상 들떠서 정원 옥상에 뛰어 올라가 사람들에게 "비가 곧 내릴 테니 빨리 빨래를 걷어요!"라고 외칠 뿐이었다.
"도련님, 왜 요즘에는 사람들에게 빨래를 걷으라고 외치지 않으시나요?"
그 아름다운 도련님이 음식이나 장난감을 파는 담주항의 유일한 중심가를 지나가자 상인들이 연이어 농을 했다.
범한이 쑥스러운 듯 아무 말 없이 웃었다. 그러더니 한 손에는 두부 한 모를 들고 다른 손으로 옆에 있는 여종의 손을 잡고는 별저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 사람 모두가 백작가 별저에서 사는 서자가 다른 귀족 도련님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범한은 다른 귀족 자제들과 다르게 아랫사람 일을 돕는 걸 좋아했고, 특히 여종들의 일을 자주 도와주었다. 모두 그런 모습을 자주 보아 왔기에 범한이 직접 두부를 들고 가는 걸 봐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비개가 담주를 떠난 지도 어느덧 6년이 지났다. 범한은 이제 아름다운 미소년으로 자라 있었다.
별저로 돌아온 범한은 먼저 아랫사람을 시켜 두부를 주방에 갖다 주게 한 뒤 다소 편찮은 노부인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는 노부인 옆에 놓인 종이를 품에 안고 서재로 돌아왔다.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 보니 경도에서 누이가 보낸 편지였다. 편지를 읽는 그의 표정이 점차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해에 경국의 황제 폐하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감행했다. 바로 연호와 나라 이름을 통일한 것이다.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경도의 문인 귀족들은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듣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항상 불만을 쏟아 냈다. 더욱이 금문파와 고문파, 옛날 법에 목을 매는 국립 교육원 선생들과 소설가 등 진부한 문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감찰원 여덟 곳에 상소를 내며 자신의 의견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연호를 바꾼 뒤에는 새로운 정치가 집행되었지만 새로울 것은 없었다. 단지 관리들의 일을 정돈한 정도라서 일반 백성들이 느끼기에 새로운 것이라고는 경력(慶歷) 원년(元年)이라고 바뀐 연호뿐이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황궁의 새로운 명령에 따라 궁정에서 첫 신문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신문이라니. 이 세계에서는 아직 신문이 만들어진 적이 없었다. 마침내 궁정에서 첫 신문이 배포되자 사람들도 신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만 대수롭지 않을 일이라 여겨서 관심을 가지는 이가 적었다.
신문의 내용은 황궁에서 독자적으로 통제했다. 그래서 매일 황제에게 직접 승인을 받아야 간행할 수 있었고 제국의 통치 방향과 대치되는 글은 절대 실을 수 없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이런 신문을 은전 한 냥 가격에 구매했다.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귀족들은 신문을 구매하면서도 자신들이 황제 폐하의 꾐에 넘어간 것은 아닌지, 최근 황궁에서 새로 정원을 건설하려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얇은 신문에는 가치 있는 내용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각지의 명승지나 과거 유명인들의 전기를 소개하는 내용만 쓰여 있을 뿐이었다. 지면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경도 관리들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내용이었다. 눈에 잘 띄게 하려고 테두리를 두른 지면에는 군사원 주사는 성격이 난폭해 아내를 때리기 좋아한다든가, 경도 수비사 사단장의 앞니가 하나 없는 이유 등 사생활에 관한 내용이 잔뜩 담겨 있었다.
물론 이웃 나라인 북제나 동이성에 관한 기사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경국 관리들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기사에만 관심을 가졌다. 처음에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폭로한 기사를 읽으며 재미있어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사생활이 폭로된 기사에 창피를 당해야 했다. 모두들 자신의 사생활이 폭로되지 않도록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지만, 배후에 황제가 있는 이상 손쓸 방법이 없었다.
신문 인쇄 부수가 적었기에 담주항에서는 단 두 부밖에 구할 수가 없었다. 그중 한 부는 고정적으로 백작가 별저에 들어갔다.
범한은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한 문제의 신문을 노부인 방에서 몰래 가지고 나왔다. 과연 무슨 내용인지 궁금한 마음에 신문을 읽어 보던 그는 주먹을 입에 물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 시대에 스캔들 기사를 다룬 신문이라니. 그것도 황제의 명으로!
이어서 황제는 새로운 제도로 ‘우편법령’을 반포했다. 그리하여 우편망이 확대되면서 범한과 범약약은 아무도 모르게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신문을 읽었다. 그동안 행인들을 통해 새로운 정치에 관한 소문을 들으면서 황제가 터무니없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황제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동안 이 세계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전 세계와 비슷하게 변해 가고 있어 범한은 배후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신문을 옆에 밀쳐 놓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이 세계에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일까. 다른 세계에서 온 웅장한 포부를 지닌 사람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범한에게는 신문보다 옆에 놓인 편지가 더욱 중요했다.
범약약은 피가 섞인 가족이었다. 범한의 머릿속에 누이는 여전히 가무잡잡하고 여윈 여자아이로 남아 있었다. 오래전 담주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로 만난 적이 없었기에 당시 모습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누이는 아름답기보다는 선머슴 같았다.
범한은 오랫동안 보지 못한 누이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자랐을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드문드문 있던 노란색 머리카락이 이제는 검은색으로 변했는지, 얼굴은 좀 예뻐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심지어 누이를 범약이라 불렀는지 범약약이라 불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오빠라 불릴 자격도 없어.’
그가 자조하며 생각했다. 비록 그의 몸 안에는 두 번째 삶을 사는 영혼이 들어 있었지만 혈연적으로는 범약약의 오빠였다. 그런데도 학교에 들어간 누이가 지난 2년 동안 줄곧 담주항으로 편지를 보내오는 동안 범한은 누이 일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매일 오죽에게 고된 수련을 받고, 비개가 남긴 독극물 공부를 복습해야 하는 데다가 사나운 정기까지 단련해야 해서 시간이 날 때만 가끔 답장할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범약약은 올해로 열 살이 되었다. 백작의 정실 딸인 그녀가 먼 곳에 떨어진 오빠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내오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 들었던 귀신 이야기가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어서 오빠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에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반년 동안 보낸 편지에는 항상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담주에서 지낼 때의 추억들이 적혀 있었다. 최근 반년 동안에 보낸 편지에서는 간혹 경도 저택에서의 일들이 적혀 있었는데 대부분 혼자 심심하게 지내는 것에 대한 불평이었다.
편지를 들고 읽어 내려가는 범한의 아름다운 얼굴이 문득 어두워졌다.
누이가 앳된 글씨체로 쓴 편지지에는 최근 경도에서의 생활이 적혀 있었다. 누이는 귀족 가문의 여아들이 들어가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누이와 같은 이들이 이 세계에서 마땅히 따라야 하는 삶의 궤적처럼 느껴져 마음이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