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신씨 성을 가진 소금 상인
정원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울리는 이른 새벽. 이미 청소를 끝낸 종들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남 백작의 딸인 범약약이 경도로 돌아가서 집 안에는 범한만 남아 있었기에 일도 많지 않았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자 여종 중 한 명인 동아가 범한을 깨우러 갔다. 살며시 방으로 들어간 동아는 범한의 모습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헐레벌떡 의원을 부르러 뛰어갔다. 중병에 걸렸다고 생각한 동아와는 다르게 얼마 뒤 온 의원은 맥을 짚어 보고는 큰 병에 걸린 것은 아니고 최근에 먹은 음식 때문에 화기가 심해진 것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몸을 보신하는 약 몇 첩을 지어 주고는 돈을 받고 떠났다.
비개가 백작가 별저에 온 뒤로 고문파였던 서석 선생이 실의에 빠져 가정 교사를 그만두고 가 버렸다. 새벽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비개는 고개를 들어 눈그늘이 짙은 눈으로 자신 앞에 서 있는 남자아이를 바라보고는 박장대소했다.
"촉망받는 소년이라더니 세상의 쓴맛은 모르는 모양이군요. 무슨 일 때문에 또 잠을 못 자서 의원까지 오게 한 겁니까?"
범한은 간밤에 몸 안에 있는 정기를 단련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확신할 수가 없어 고민했다. 심심함을 달랠 용도로 이름도 모르는 내공을 가볍게 연습할 수야 있었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일이라면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비몽사몽 중에 세상의 쓴맛을 모른다는 말을 들은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소년은 인생의 쓴맛을 알지 못한 채 높은 곳에 오르기를 좋아하고, 그렇기에 시를 쓴답시고 억지로 근심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된 뒤에는 이야기하고 싶어도 말을 못 하니, 말하고 싶어도 말을 못 하다가 겨우 시원한 가을이라고 말하고 만다."
* * *
서재 안이 한동안 조용했다. 범한이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뜨며 하품했다.
"스승님, 어젯밤에 너무 늦게 자서 그러니 화내지 마십시오."
비개가 그를 보더니 무의식적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려 손을 들었다. 그러다 자신의 손에 들린 거위 깃털 붓을 보고는 급히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조금 전에······ 그 문장······ 누가 쓴 겁니까?"
"기구한 인생을 살다간 신 선생이 쓴 겁니다."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신기질이란 이름을 말하려다가 아차 싶어 얼버무렸다. 비개가 퍼런빛을 내뿜는 눈동자로 바라보자 범한이 말을 더듬으며 설명했다.
"신 선생은 지난달에 성 서쪽에서 소금을 구매한 암거래상입니다."
"아, 문장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요. 상인이 그런 문장을 짓다니 놀랍네요. 이름이 뭔지 아시나요?"
"신······기질이라고 합니다."
범한이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의심을 지운 비개가 수업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생물 독약 입문 수업뿐만 아니라 다른 수업도 함께 가르쳐야 하기에 갈 길이 멀었다.
* * *
점심 식사를 끝낸 뒤 침실로 돌아온 범한은 마침내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다. 사납고 위험한 정기를 단련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손에 있는 황색 서적을 바라보자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걱정해야 할 것은 조금 전 서재에서 조심성 없이 신기질의 시를 읊은 것이었다.
서재에서 말한 〈추노아, 박산으로 가던 중 벽에 적다〉라는 시는 신기질이 좌천된 뒤 처량한 마음을 담아 적은 것으로,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읊고 말았다. 하지만 이 일로 자신에게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얼렁뚱땅 얼버무린 설명으로 비개를 얼마나 납득시켰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당시 비개의 표정을 보면 분명 소금을 사들인 암거래상이 지은 것이라 믿는 것 같았다.
범한은 윤리 의식이 강한 사람도 아니었고, 이전 사람의 작품을 표절하는 게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알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게 더 낭비라고 생각했다.
이 세계에 오고 몇 년 동안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지를 충분히 고민했다.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글들을 표절한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의 계획을 실행했고, 상위 3등이라는 빛나는 자리를 차지했다.
범한은 자신의 계획을 구상하는 동안 계속해서 자신에게 ‘나는 표절자가 아니라 지구 문화유산의 전수자이자 보관자이며, 모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을 즐기고 싶어 하는 공유 주의자이다’라고 최면을 걸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본래 작품을 그대로 표절하고 싶지는 않았고, 방금과 같은 상황에서 표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최소한 무언가를 쓰려면 원래 세계에 있는 작가의 이름을 필명으로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오늘 서재에서 무언가를 표절해야 한다면 낙빈왕이 어린 시절 지은 ‘하얀 깃털 푸른 물 위에 떠 가고, 꽉, 꽉, 꽉, 즐겁게 우는구나’라는 시를 표절하는 게 자신의 생각하는 다섯 살짜리 신동의 모습이었다.
‘말하고 싶어도 말을 못 하다가 겨우 시원한 가을이라고 말하고 만다’라는 구절은 신동이 아니라 천산동모(天山童姥: 무협 소설 《천룡팔부》에 등장하는 인물로, 어린아이의 용모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 나이는 90세가 넘은 인물 ― 역주)처럼 외모는 어리지만 내면에는 366번 시련을 겪은 늙은 영혼이 담긴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범한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버릇대로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어 비개가 위험하다고 말한 정기를 단련하기 시작했다.
이날부터 범한은 잠을 자는 게 단련이니, 일단 단련을 하고 어느 날 정기가 폭발하면 다시 생각하자는 심정으로 단념했다.
범한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비개는 자기 방에서 어젯밤에 다 쓰지 못한 편지를 계속 쓰려 했다. 편지지에는 몇 줄 정도 마른 필적이 있었다.
‘······아름답고 담력 있고 총명하며 의지가 강한 아이입니다. 더구나 어른스럽기까지 합니다. 만약 경국의 다섯 살짜리 아이들을 모두 불러 세운다면 이 아이는 무리 뒤로 숨을 테지만 가장 먼저 사람들의 눈에 띌 것입니다. 올 한 해 동안 같이 지내 보니 앞으로 집안에 큰 자산이 될 인재이며 가장 적합한 계승자라 판단이 됩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그 아이가 가진 신분으로, 이 점은 앞으로 가장 문제가 될······.’
편지는 여기서 끝나 있었다. 비개는 이어서 범한이 자신에게 내공 단련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던 문제를 쓰려 했다. 그러나 한숨을 쉬고는 오전에 서재에서 범한이 읊었던 시구를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다시 편지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말하고 싶어도 말을 못 하다가 겨우 시원한 가을이라고 말하고 말다니. 최근 고문이 쇠퇴하면서 금문이 유행하고 있는데 다섯 살짜리 아이가 이런 문장을 말할 수 있다는 게 믿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이 시를 상인이 썼다는 말도 의심되며, 누가 쓴 것이냐는 질문에 도련님의 눈빛이 흔들렸던 것도 같이 지내면서 좀처럼 보지 못한 모습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매일 저와 함께 지내는 데 도대체 언제 제 눈을 피해 신기질이란 사람을 만났냐는 것입니다.’
그는 신중하게 마지막 말을 적었다.
‘동산로 사람을 시켜 신기질이라 불리는 소금 암거래상이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이유로 도련님에게 접촉하였는지, 왜 도련님이 당황하며 그에 대해 얼버무렸는지를 조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일은 매우 급한 것이니 속히 처리해 주셔야 합니다.’
변형된 서명을 한 뒤 비개는 붓을 내려놓았다.
며칠 뒤 경도 감찰원에서 밀정이 파견되어 소금 상인들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 결과 적지 않은 암거래상과 그들과 결탁한 경국 동부의 고관들이 발각되었다. 성과는 대단했지만 신씨 성을 가진 상인은 찾을 수 없었다. 곧 경도에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감찰원 진 원장이 크게 분노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더구나 감찰원 전원에게 3개월 감봉 처분이 내려져 밀정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전국을 휩쓸고 다니며 신씨 성을 가진 사람을 찾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세계에 신기질이란 이름을 가진 가련한 사람이 있거든 부디 하늘이 보우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