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화 패도의 기
"신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누가 가지고 있겠어요?"
범한이 여전히 현대인답게 현실에 입각한 시각에서 주장했다. 그러자 비개가 꿋꿋하게 말했다.
"4대 종사 중 하나인 고하 국사(苦荷国師)는 신묘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어쩌다 절대 강자가 된 것일 뿐, 실력을 증명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긴 하죠."
"어쩌면 고하는 흥분제를 많이 먹었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원래 모습과는 달라지거든요. 그러고는 신묘가 어쩌고 하는 핑계를 댔을 수도 있죠."
범한이 입을 삐죽거렸다.
"쳇, 뭐 내가 고하, 그 운 좋은 대머리를 부러워하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이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신묘를 모셔 왔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신묘를 핑계로······. 그리고 흥분제는 또 무슨 말이에요?"
"아, 흥분제는 일종의 몸을 보양하는 약 같은 건데요. 만병통치약 같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몸이 확실히 좋아지긴 해요. 그렇지 않고서는 저 사람 머리가 저렇게 벗겨졌을 리가 없어요."
범한이 실실 웃으며 스승님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비개는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신묘는 하늘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처럼 고서에나 존재해요. 각국의 황실 제사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신묘 제사죠. 신묘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을 원치 않아서 지금까지 세상으로 나오지 않은 것뿐이에요. 그래서 제사는 항상 황궁에서 삼 리 밖에 떨어진 천단(天壇)에서 진행되곤 합니다. 경국과 북제의 천단에서 신묘의 대제사를 드렸지만 한 번도 정무와 국사에 관해서는 빌지 않았어요. 그저 몇몇 고행자들 말에 의하면 속세에 있는 신묘에서도 일부 수행자들이 심신 수련을 했다곤 하네요."
범한은 겉으론 고분고분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신묘란 것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했다. 만약 그게 종교라면 왜 이 세계에는 교회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 건지. 이런 기관이 아니라면 이 종교는 권력을 쥘 방법이 없을 텐데. 권력도 없으면 당연히 돌아오는 이익도 없을 테고, 이익이 없으면······ 이런 조직이 존재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범한은 신묘가 비개가 말한 것과 같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속세를 벗어난 어떤 초연적인 존재에 불과해 보였다. 하지만 신성한 땅을 숭상하는 신앙이라면 인류의 생활에 해가 될 일은 없을 테니 좋을 것 같기도 했다.
"알겠어요, 스승님. 그런데 지금까지 내내 쓸데없는 말씀만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 몸에 흐르는 정기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어린 제자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비개는 조심스럽게 다시 맥을 짚었다. 그리고 신중하게 입을 뗐다.
"방금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도련님 몸에 있는 정기는 아주 위험하다고요. 도련님이 수련을 했어도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을 텐데, 단전과 경락에 있는 정기가 이미 도련님 나이의 몸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고 보이는군요."
"그렇게 심각한가요?"
범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직 단정 지을 순 없지만 그렇습니다."
"괜히 겁주시는 것은 아니죠?"
"놀라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지금 도련님을 술이 담긴 가죽 포대라고 생각해 보죠. 포대는 이만한데 그 안에 담긴 술이 점점 늘어나는 거예요. 계속 이 상태로 가다가는 술 포대가 터지고 말 겁니다."
하지만 범한은 최근 며칠간 수련을 하면서 허리가 욱신거리고 아픈 거 말고는 딱히 다른 증상을 느끼지 못했던 터라 비개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었다.
"스승님, 지금 저 보고 식충이라고 놀리시는 거죠? 그 정도는 저도 알아듣는다고요."
비개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평소에 수련하는 대로 한번 해 보세요."
범한은 비개의 말대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수행 상태로 들어갔다. 복부에서 따뜻한 기단(氣團)이 점점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경맥을 따라 천천히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비개는 두 눈을 감고 손가락 안쪽을 범한의 손목 위에 살포시 올려놓고 맥을 짚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일부러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련님은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에 불과해요. 도련님 몸에 흐르고 있는 정기가 위험하긴 해도 저까지 해치진 못할 겁니다. 그저 지금 도련님의 몸이 약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네."
범한은 여태 몸속 정기의 강도를 조절하면서 천천히 단전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스승의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범한의 몸속에 있는 정기로 스승을 해칠 수는 없었다. 또 계속 이런 식으로 조금씩 몸 밖으로 내보내면 스승도 정기의 증상을 확인하기 어려울 게 뻔했다.
그리하여 범한은 눈을 질끈 감고 이름도 없는 정기의 주문을 머릿속으로 서서히 읊기 시작했다.
염식(念息)을 시작하자 몸속의 정기가 무슨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단전에서 흘러나와 배에서 등까지 경락을 따라 조금은 이상한 경로로 계속 흘러 손목까지 다다랐다.
그때 서재에서 퍽, 소리가 났다!
비개가 번쩍 눈을 떴다. 범한의 손목 위에 올려 둔 손가락이 갑자기 강하게 튕겨 나가더니 전혀 무방비 상태로 있던 그의 몸이 벽에 부딪쳤다. 그 순간 타들어 가는 것처럼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결국 그는 피를 토하고 말았다.
한편 범한도 가슴의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참상이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란 그는 얼른 달려가서 비개를 일으켜 세웠다.
비개는 범한의 손을 잡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냈다. 그러고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범한의 눈빛을 다시 바라보았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아이였다.
비개가 혼자 중얼거렸다.
"이런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애가······ 아니, 도련님! 대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겁니까? 이대로 계속 수련했다가는 앞으로도 멀쩡할 거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단 말입니까."
비개가 아무리 꾸짖어도 범한은 멍하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역시 스승이 자신의 손목에 흐르는, 조절할 수 없는 정기 때문에 피까지 토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심지어 상처를 입은 비개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본인의 상처가 아니라 제자의 앞날이라니. 어린아이의 몸에 갇혀서 때로는 일부러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만 했던 범한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바람도 불지 않는데 방문이 덜컥 열렸다. 흡사 검은빛 같은 검은 그림자가 스치듯 들어왔다.
"이런 바보들 같으니라고."
이런 상황에서도 맹인 오죽의 차가운 말투는 여전했다. 그는 한 손으로 범한을 들어 올려 목에 손가락을 대고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도련님은 멀쩡하네요. 그저 비개가 피를 토하는 걸 보고 잠깐 놀라신 것뿐이에요."
그리고 다시 비개를 쳐다보았다.
"대인은 도련님께 독술을 가르치셔야죠. 그쪽 수준을 믿었건만. 그때 아가씨도 말씀하셨잖아요. 대인의 무술 경지는 경도에서 최약체라고요. 제가 도련님께 드린 물건이니 옆에서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비개는 담주에서는 그저 작고 초라하고 옹졸한 스승일지 몰라도 경도에서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상처를 입고도 나름 대의를 위해서 말했는데 오죽이 저런 식으로 잘라 버리니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겨우 다섯 살 난 아이가 저렇게 위험한 수행을 하는 것이 걱정스러워 저도 모르게 낯빛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