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화 제5대 종사?
비개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맹인의 엄청난 실력을 믿었기에 범한의 기 수련에 문제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맥을 짚어 보니 역시 이상한 점이 나타났다.
평소와는 다른 스승님의 진지한 태도에 범한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더 웃어 보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잘못된 방법으로 수련을 하다가 나쁜 길로 빠지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비개가 눈을 부릅뜨고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저번에도 수련 중인 도련님의 정기가 위험하다는 건 어느 정도 알아차렸지만 이 정도일 줄 상상도 못 했습니다."
범한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주 위험한 건가요? 얼마나요?"
비개가 몹시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주 많이요."
그러자 범한이 진지하게 그를 바라봤다.
"스승님, 이제 쓸데없는 농담은 그만하죠."
비개는 독을 쓰는 사람이지 무술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기에 이런 이름도 모르는 정기를 수련하는 데 어떤 동작이 있는지 판단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범한의 몸속에 있는 정기가 위험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비개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오죽을 찾아가 보라고 하자 범한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비개는 흠칫 놀랐다.
"오죽 아저씨는 할머니 얘기만 들어요. 이 책도 아저씨가 주신 거예요. 근데 정작 본인은 수련해 본 적도 없대요."
비개가 크게 화를 냈다.
"오죽 대인도 너무하군요. 그래도 명색이 도련님인데 직접 가르쳐 주지도 않았단 말입니까? 이렇게 위험하고 누구 하나 배워 본 적도 없는 무술을 어떻게 혼자 배우라고 하는 겁니까?"
비개는 지난 1년 동안 눈앞에 있는 다섯 살 난 아이를 훗날 노년 생활에 가장 큰 위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범한이 자신의 계보를 이어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더욱 발전시켜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이것이 오죽의 얘기에 비개가 크게 분노한 이유였다.
범한이 여우처럼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물었다.
"오죽 아저씨도 정말 대단한 사람이죠?"
"물론이죠."
비개가 천천히 과거를 회상했다.
"이 세상에서 오죽 대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사실 몇 명 되지 않습니다. 4대 종사라고 들어보셨나요?"
4대 종사에 대해서는 범한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모든 백성들이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무술 강호들로 경국에 두 명, 북제에 한 명, 동이성에 한 명 있었다.
이 세계에서 경국은 황제의 통치하에 일찍부터 주변국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선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몇 년 전 정변이 일어난 후 국력이 더 강해졌음에도 황제는 전쟁을 멈추고 세력 확장도 멈추었다.
"멋지죠? 지금 이 나라에 강호가 두 명이나 있으니 말입니다."
비개가 코웃음을 쳤다.
"세상 사람들은 참 멍청해요. 싸움만 잘하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독술은 아예 쳐주지도 않는다니까요. 이것도 종사라면 나름 종사인데 말이에요."
그러자 범한이 급히 헛기침을 하면서 비개의 자기 자랑을 끊어 버렸다.
"신비로운 신묘(神廟)를 제외하고 4대 종사 중 두 명이 경국에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지금 경도를 지키는 수비 부대 대장의 스승의 동생이랍니다. 류운 산수(散手)의 섭류운이라는 자죠."
그러자 범한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경도 수비대장이라면 경도 전체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 현재로선 가장 요직이었다. 그런 사람의 스승의······ 동생이라. 섭류운이라는 사람의 실력도 보통이 아닌 게 분명했다.
"또 다른 종사는 듣기로는 황궁에 있다는데,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어, 스승님. 저희, 오죽 아저씨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뭘 그렇게 서두르세요?"
비개가 눈을 부릅뜨고 범한을 쏘아봤다.
"그 섭류운이란 자는 지금까지 일곱 번의 결투에서 딱 한 번 졌다고 합니다. 당시 도련님 어머님이 처음 경도에 들어가신 해였는데, 섭류운의 조카, 지금의 경도 수비대장인 섭중을 웃음거리로 만들어서 곤란에 빠뜨리신 적이 있었죠."
당황한 범한의 눈이 둥그레졌다. 비록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간혹 그리워하던 어머니가 당시에는 그런 사람이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비개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섭류운이 별안간 그 일에서 물러나게 되자 이 태평 별저까지 달려와 도련님 어머니께 크게 사죄를 했었죠."
"네?"
"그 일이 어떻게 된 건진 아무도 모른답니다. 그저 전설로 남게 되었죠. 아마 섭류운과 오죽 대인이 한바탕 한 거 같은데, 오죽 대인은 도련님 어머님의 종이니 그가 나서는 게 맞잖아요."
비개가 손에 든 찻잔을 입 가까이 가져갔다.
"누가 이겼어요?"
범한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오죽 대인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해 4대 종사 중 하나인 섭류운과 결투를 벌였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건 아무도 몰라요. 서로 비기지 않았을까요?"
비개가 눈살을 찌푸렸다.
"섭류운이 자기 검각으로 돌아간 후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반년 동안 수련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 후로 검을 쓰지 않고 혼자 산수를 연마해서 결국 진정한 종사가 된 거죠.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의 대결이 그에게 큰 자극이 됐다고 볼 수 있겠군요."
범한이 멍한 상태로 생각에 잠겼다.
‘4대 종사? 그럼 오죽 아저씨가 다섯 번째라고 하면 5대 종사라는 의미인가?’
범한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자기 집 종이 대단한 실력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신비한 존재인지는 미처 몰랐다. 그 후로 혼자서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그런 아저씨가 무엇이 두려울까.
별안간 문제 하나가 떠올랐다.
"스승님, 이 일이 모두 비밀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근데 스승님은 어떻게 아세요?"
비개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전 감찰원의 고급 간부가 아닙니까. 이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겠어요?"
범한은 유독 이 세계에서 강력한 무공을 쌓은 인물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어쩌면 17년 후에 그들 중 누군가와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머지 세 사람은요? 스승님도 다 만나 보셨어요?"
"경국 출신의 다른 고수는 그저 전설로만 남아 있어요. 분석에 따르면 황궁 안에 있다고 하는데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답니다."
비개가 말했다.
"북제의 절대강호는 당연히 국사(国師)죠. 변태 같은 대머리요."
"대머리요?"
범한은 그 표현을 듣고 이 세계에 불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당연히 스님도, 스님이라는 말도 존재할 리 없었다.
"네. 그 대머리, 유명한 수행자 있잖아요. 듣기로 1대 종사가 된 그해에 고행 중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신묘에 있는 푸른 돌계단 앞에서 3개월 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슬만 먹다시피 했대요. 어쩐 일인지 신묘의 사람이 감동을 받아서 하늘로부터 신학을 전수받아 그때부터 1대 종사가 된 거라네요."
비개가 말끝마다 비꼬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 고행하던 수행자가 내심 부러운 모양이었다.
"딱 보기만 해도 그 대머리가 사기꾼이라는 걸 알겠던데 말입니다."
"신묘라고 하셨어요?"
"신묘, 신을 모시는 곳이죠."
"스승님, 지금 또 이상한 말씀 하시는 거죠?"
"신묘는 이 땅에서 가장 신비로운 곳을 말하는데, 조상들이 신을 모시던 곳이라고 들었어요. 안타깝게도 운 좋은 그런 바보들 말고는 신묘가 대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죠. 그래서 신묘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다나 뭐라나. 암튼 그렇다고 합니다."
"그럼 어쩌면······ 신묘가 아예 없는 거 아닐까요?"
비개가 범한의 머리를 콕 쥐어박았다.
"장난치는 건 괜찮지만, 숭고하고 거룩한 장소에 대해서는 절대 불경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범한이 머리를 감싸고 비개를 쳐다봤다.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스승이 신묘에 경의를 표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동시에 4대 종사나 신묘 같은,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다.
아무래도 범한도 이 세계에 완전히 적응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