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화 무덤
아버지라는 사람이 지금까지 아들의 존재에 대해 전혀 신경도 안 쓰다가 갑자기 친히 변태 같은 늙은이를 스승이라고 보내다니. 범한은 앞으로 비개와 함께할 나날이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또 저 사람이 오죽을 알아보는 걸 보니,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얼빠진 얼굴로 얌전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그제야 범한은 작은 손으로 비개에게 덮어 두었던 침대보를 걷었다. 그러고는 얼른 오죽에게로 달려가 숨어서 바보처럼 실실 웃기만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만난 상대가 상대인지라 오죽과 비개, 모두 네 살짜리 어린아이의 머릿속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점점 날이 밝아 오더니 멀리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종들이 물 끓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죽이 비개를 데리고 나가려고 하다가 다시 범한에게 다가가 귓가에 차가운 말투로 속삭였다.
"언젠가는 설명하셔야 할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아냈는지 말입니다."
범한은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몰라 가슴이 철렁했다. 4년 전 오죽 아저씨와 천 리 길을 달려 담주에 왔을 때, 그는 겨우 몇 개월 된 갓난아이에 불과했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땅한 핑계를 찾기 어려웠다. 그저 비개라는 이름의 저 노인 때문에 놀라서 그랬다고 둘러댈 수밖에.
담주성도 잠에서 깨어나 아침을 맞았지만 평소에 그리 눈에 띄지 않던 잡화점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채였다. 잡화점 안 어두컴컴한 방에서 오죽이 차가운 눈초리로 비개를 쏘아봤다.
"절름발이, 무슨 의도죠?"
비개도 나름 일각에서는 대가라고 불릴 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맹인 소년의 소문을 떠올리자 가슴이 떨려서 어쩔 줄을 몰랐다.
"도련님이 크면 경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알게 될 텐데, 미리 준비해 두면 앞으로 승산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자 오죽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비개는 저절로 몸이 움찔하는 것을 애써 눌렀다. 상대가 맹인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검은 천 뒤에 살기 가득한 눈빛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비개는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오죽 대인께서 따로 생각이 있으시다면 전 경도로 돌아가겠습니다. 백작님께서도 대인의 의견을 존중해 주실 겁니다."
그러자 오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름발이가 당신을 보낸 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천하의 원장 어르신을 절름발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눈앞에 있는 맹인 소년뿐일 터였다. 비개는 새삼 소년이 두려워져서 바로 몸을 숙인 채 대답했다.
"백작님께서는 아가씨가 남긴 상자를 찾고 계십니다. 혹시라도 다른 마음을 품은 자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까 봐 걱정되시는지 오죽 대인에게 도움을 구하고자 하십니다."
"찾을 필요 없습니다, 아가씨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 상자를 이미 없애셨으니까요."
오죽의 얼굴에서 여전히 아무런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비개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려다가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잔뜩 인상을 쓴 채 물었다.
"아무래도 도련님이 좀 이상한 것 같더군요. 이제 겨우 네 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 저렇게 무시무시한 진기공법 수련을 시키다니요.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그 진기공법은 제가 가르친 게 아닙니다."
오죽은 앞으로 도련님의 스승이 될 사람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고생하세요."
비개는 자신의 머리에 난 상처를 만지며 그의 말이 썩 좋은 징조는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비개가 떠난 후 잡화점 밀실로 들어간 오죽은 구석에 놓인 먼지로 뒤덮인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은 여전히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오후쯤 되자 백작가 별저에 스스로 도련님의 새로운 스승이라고 칭하는 이상한 사람이 찾아왔다. 다들 수상하게 생각했지만 그의 명함을 본 노부인이 직접 그를 맞이하면서 두 번째 스승으로 임명하자 더는 토를 달 여지가 없었다.
새로운 스승에 대한 소식이 여종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머리에 면포를 칭칭 감은 껄렁껄렁해 보이는 늙은이가 백작가의 귀여운 도련님의 새로운 스승이라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서재에서는 범한이 비개에게 열심히 안마를 해주고 있었다. 어젯밤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하루라도 빨리 오해를 풀기 위해 비위를 맞춰 주고 있는 참이었다.
"스승님, 어제 일이 전부 제 탓만은 아니잖아요."
범한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딱히 호감 가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칼을 들고 계셔서 어쩔 수 없었어요."
칼이 없었으면 내가 문을 어떻게 열고 들어왔겠어.
비개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사실 그는 몰래 들어가서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만 무성한, 서자의 얼굴만 보고 나올 생각이었다. 설마 그 시간에 어린아이가 안 자고 깨어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아직도 뒤통수가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비개는 앞으로 이 빚을 어떻게 갚아 주면 좋을지 방법을 찾아내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범한은 그 속도 모르고 계속 이야기했다.
"전 스승님이 조용히 오실 줄 알았어요."
"맞습니다. 전설에 나오는 강호들의 이야기를 보면 작은 정원에 홀로 있는 소년이 우연히 귀인을 만나게 되죠. 그렇게 세상이 놀랄 만한 무술을 배우게 되지만 주변 사람들을 아무것도 모르고요. 그런 경우가 다반사긴 하죠."
그러자 범한은 괴로운 얼굴로 비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바보는 아니랍니다. 스승님이 제 부인도 아니고 저 또한 매일 벽을 타는 건 아니라서요."
그러자 비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도련님을 제대로 가르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범한이 히죽거리며 그의 무릎 위로 올라가 앉았다.
"스승님, 저희 아버지를 아세요? 어떤 분이에요?"
비개는 범한이 여전히 자기 앞에서 천진난만한 척하는 모습을 보고 이 아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래서 얼마간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백작님은 제가 모시는 분의 친구이십니다. 그래서 도련님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신 거고요. 그러니 앞으로 절 스승님이라고 부르십쇼."
비개의 흐린 갈색 눈동자에서 이상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전 그저······ 독만 쓸 줄 아니 앞으로 도련님께 독으로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지, 어떻게 독을 구분할 수 있는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원래 이 얘기를 들으면 아이들은 다 놀라서 울음을 터뜨리는데 역시 범한은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눈을 보니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기다란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더 기다릴 필요 없겠네요. 가서 토끼 몇 마리 잡아다가 실험해 볼까요? 토끼가 안 되면 개구리는 어떠세요?"
넋이 반쯤 나간 비개는 몸을 돌렸다.
저 아이가 정말 네 살밖에 안 됐다고?
* * *
몇 개월이 흘렀다.
담주항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공동묘지의 동쪽 하늘에서 천천히 동이 터 올랐다. 희미한 아침 햇살이 어두컴컴한 묘지를 비추자 더 으스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비개는 묘지 밖에서 팔짱을 낀 채 무덤 앞에 꿇어앉아 있는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의 미간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여행을 핑계로 큰마님께 휴가를 받은 비개는 공동묘지로 범한을 데리고 와서 시체를 파헤치게 하고 그 시체로 인체의 구조를 가르쳐 주었다.
물론 범한이 평범한 어린아이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단시간에 공동묘지의 음산한 분위기에 적응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그를 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배우는 시체 해부와 이와 관련된 내용은 비개 자신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개도 나름 시체를 잘 다루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시체를 보고 무서워하지 않고 평정심을 잃지 않는 네 살 아이는 범한이 처음이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범한 말고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는 마스크 하나에만 의존하여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을 파헤치는 것도 모자라,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부패가 심한 시체 안에서 장기를 적출해 냈다. 이 장면은 심히 공포스러워 몸이 떨릴 정도였다. 한편 범한은 이 모든 일을 묵묵히 해내면서 자신의 두 번째 인생도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