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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화 (6/1,108)

006화 자침(瓷枕)

범한은 비록 네 살 아이의 몸이었지만 내면에는 성숙한 어른의 영혼이 들어 있었으므로 이 세계에 처음 온 날 보았던 피비린내 나는 시체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남모를 불안함 속에서 살아왔고 자신의 불분명한 출신 때문에 언젠가 한 번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곤란한 상황이 결국 오고야 만 것이다.

나름 기습을 시도했는데 실패했으니 또 같은 방법을 쓸 수 없었다. 범한은 최대한 불쌍해 보이려고 눈물로 자객의 정신을 쏙 빼놓고 머리를 굴리면서 재빨리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목숨을 잃게 될 게 뻔했다. 그런데 지금 자객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조금 전 ‘아빠’라는 말에 약간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누구보다 영악하고 머리 회전이 빠른 범한은 자객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어린아이만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활용하여 세상에서 가장 천진난만한 얼굴로 자객을 바라보며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아빠, 아빠······."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도망갈 궁리를 하느라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도련님."

자객의 말투는 무척 냉담했지만 위협적이진 않았다.

"정말 총명하시군요, 이렇게 어린 나이에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아시다니. 그래도 잘 아실 텐데요, 제가 사남 백작이 아니라는 것쯤은."

말을 마친 자객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휘두르며 범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눈물로 범벅된 범한의 얼굴에는 여전히 천진난만함이 남아 있었지만 심장은 쪼그라들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럼 아저씨는 누구예요?"

"저는 도련님 아버님께서 보내신 사람입니다. 그러니 소리 지르지 마세요."

자객은 두 눈이 옅은 갈색에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못생긴 외모였다. 나이를 가늠할 수 있는 눈가 주름에 말투가 마치 금붕어를 보러 가자며 어린아이들을 속이는 늙은 영감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은 네 살 아이가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 어설픈 분노까지 완벽하게 표현해 내야만 했다.

"맞아요. 아저씨는 아빠가 아니에요!"

그러고는 마치 자객의 손에 들린 칼도 못 본 것처럼 침대로 올라가 중얼거렸다.

"아빠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뭘."

자객이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그 순간, 침대에 있던 아이가 갑자기 자객의 뒤를 보면서 소리 질렀다.

"엄마!"

이번에야말로 정말 생각지도 못한 허를 찌르는 공격이었다.

이런 방법을 네 살짜리 어린아이가 쓸 줄 몰랐던 자객은 순순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몹시 당황한 자객의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의 뒤편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굳게 닫혀 있는 문과 짙게 깔린 어둠뿐이었다. 그때 쿵!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면서 머리가 피범벅이 된 자객이 바닥에 쓰러졌다.

범한의 손에는 반쪽이 떨어져 나간 자침(瓷枕. 자기로 만든 베개)이 들려 있었다. 가까스로 위험한 순간을 넘겼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은 멈출 줄 몰랐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자객과 들고 있는 자침을 번갈아 보다가 이를 악물고 팔을 높이 치켜들어 힘껏 자객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자객이 뛰어난 고수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 다시 깨어나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어 보였다.

밖에서 여종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별일 아니야. 뭐, 그릇이 깨졌나 보지, 내일 와서 치우자."

"어떻게 그래, 그러다 도련님이 밟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내일 하자니까!"

여종들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더 이상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범한은 낑낑거리며 옷장 속 겨울용 솜이불을 꺼내서 이불보를 가늘고 길게 찢어서 서로 연결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연결한 끈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자객을 튼튼하게 묶었다.

범한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이미 그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갑자기 무서움이 몰려들면서 범한의 마음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전생이든 이생이든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자객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아직은 모르지만 굉장한 모험을 했다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만약 자객이 정말 무림 고수라면 그의 자손들 대대로 복수의 칼날을 갈며 자신을 죽이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범한은 자객의 복면을 살짝 벗겨 보았다. 아직 숨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머릿속에 자객을 죽여서 입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범한은 조금 전 자객을 칠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자 자신이 이 세계에 와서 정신적으로도 많이 강인해졌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특별히 강해진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 죽음을 경험했다가 범한이라는 아이로 살게 되면서 지금 주어진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범한은 그게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망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술에 취해 봐야 깊은 맛을 아는 것처럼 죽음을 경험하고 나니 비로소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정말 단순한 진리였다.

범한은 작은 칼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객을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딱 한 명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갑자기 얼굴에 화색을 띤 범한이 천천히 방을 나가 뒤뜰에 난 개구멍으로 향했다. 개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온 범한은 망설임 없이 별저 맞은편 길모퉁이에 있는 잡화점으로 갔다.

똑똑똑똑.

범한이 잡화점 바깥문을 두드렸다. 담주의 밤거리는 매우 조용했지만 두드리는 소리가 워낙 작아서 멀리까지 퍼져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범한은 잡화점 안에 있는 사람이 이 소리를 들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4년 동안 자신을 모른 척하며 살아왔지만 지금처럼 급박하고 중요한 순간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이 사람뿐이었다.

"누구세요?"

상점 안에서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밤중에 갑자기 손님이 찾아왔는데 아무런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범한은 역시 그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확신하면서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범한이예요."

범한은 어쩌면 그가 바로 문을 열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잡화점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바로 눈앞에 맹인 소년이 서 있었다. 맹인 소년을 본 범한은 오히려 자기가 더 놀라고 말았다.

분명 4년 전에 자신을 담주로 데려온 그 소년이었는데 그동안 변한 곳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범한은 속으로 궁금해했다.

‘뭐야, 이 사람은 아예 늙지도 않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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