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화 밤에 온 손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여종 두 명이 음식을 내오고 있었다. 범한 왼편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약간 말랐는데 한마디로 예쁘장한 생김새였다. 함께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처량해 보였다.
범한이 손을 뻗어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냥, 경도에 사는 사람들은 평소에 무슨 음식을 먹을까 생각했어."
범한보다 어린 여자아이는 사남 백작의 친딸인 범약약으로 그의 이복 여동생이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서 자주 아팠던 범약약은 노부인에게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일 년 전부터 이곳으로 내려와 요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덧 요양한 지 1년이 되었는데 머리숱도 계속 줄어들고 좀처럼 나아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종들이 정성을 다해 극진히 살피는데도 호전되지 않는 걸 보니 아마도 선천적으로 허약 체질을 타고난 것 같았다.
범한과 범약약은 서로 마음이 잘 맞았다. 범한은 삼촌 같은 마음으로 범약약을 아껴서 항상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인지 주변 사람들 눈에도 두 남매간의 정은 깊어 보였다.
오빠의 말에 범약약은 자못 진지한 태도로 경도에서 어떤 음식을 먹는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세어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 살짜리 아이가 얼마나 셀 수 있을까. 고작 탕후루나 미엔런 같은 음식 이름만 반복할 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태양이 육지 너머로 반쯤 모습을 감추자 짙은 저녁 빛이 정원을 뒤덮었다.
"약약, 너 진짜 숫자에 약하구나."
"또 놀리는 거야?"
"알았어. 오늘은 무슨 얘기 듣고 싶어?"
"백설 공주!"
갑자기 범한의 얼굴에 어른이나 지을 법한 미소가 번졌다. 다행히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혹시라도 누군가 그 미소를 보았다면 화들짝 놀라고도 남았을 것이다.
"오빠가 귀신 얘기해 줄까?"
"싫어!"
깜짝 놀란 범약약은 있는 힘껏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새 까무잡잡한 얼굴 가득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곳에서 지내면서 여러 번 귀신 얘기에 당한 모양이었다.
여동생을 괴롭히는 것은 범한의 못된 취미 중 하나였다. 여종들을 괴롭히는 것 또한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범한은 항상 귀신 얘기를 들려줘서 여종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면 소스라치게 놀란 여종들이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로 도망가 서로 부둥켜안고 덜덜 떨었다. 그런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럽고 재밌었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까 봐 말로 사람들을 놀리지 못하지만 무서운 얘기를 할 때만큼은 그와 비슷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범한은 자신이 여전히 어린아이며 도움의 손길과 새로운 삶에 적응할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뻔뻔하다기보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물론 여종들은 늘 나이도 어린 도련님이 대체 어디서 이런 얘기를 들은 것인지 의심스러워했다. 그때마다 범한은 선생 핑계를 대곤 했다. 그래서인지 서석 선생을 바라보는 여종들의 눈빛은 곱지 않았다. 사남 백작이 도련님에게 공부를 가르치라고 큰돈을 주면서 맡긴 것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무서운 얘기나 알려 줘서 다른 사람을 놀라게 만들다니, 선생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여종들은 귀신 이야기가 끝나고도 한동안 두려움에 떨었지만 그래도 평소처럼 범한을 씻기고 잘 수 있도록 방문을 닫아 줬다.
* * *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밤이었다. 범한은 딱딱한 베개를 한쪽으로 치우고 옷장에서 겨울용 도포를 꺼내 가지런히 개서 베개로 벴다. 하지만 아무리 누워 있어도 눈만 깜박거릴 뿐 통 잠이 오지 않았다. 밤하늘에 달빛도 여전히 밝았다.
자신이 새로운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잠자리에 들려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범한은 침대보를 살짝 만져 보았다. 아무도 모르게 만들어 둔 서랍이 아직 들키지 않은 걸 확인하자 마음이 놓였다. 자연스럽게 몸속 정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명상에 빠질 좋은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범한은 조용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명상에 빠지려는 그 순간, 갑자기 자신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으로 몇십 년이라는 세월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한 감정이 밀려왔다. 범한이 과거 식물인간이었던 때를 떠올리다가 앞으로 수많은 처와 첩을 둘 생각을 하며 흐뭇해하려는 찰나에 갑자기 불청객이 나타났다.
"범한 도련님 되십니까?"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차가운 눈빛에 눈동자가 범상치 않은 갈색인 것만 봐도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쯤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설령 예의 바른 태도로 질문을 했더라도 한밤중에 몰래 남의 침실에 잠입해 들어온 사람이라면, 그것도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에 칼까지 쥔 사람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놀라는 게 당연했다.
범한이 진짜 네 살짜리 어린아이였다면 이상한 아저씨를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은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므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아무 인기척 없이 백작가 별저에 몰래 숨어든 사람이라면 무술 솜씨도 보통이 아니고 악랄하기 그지없는 사람일 게 분명했다. 만약 여기서 범한이 소리라도 지른다면 그 자리에서 죽이고도 남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범한은 위험한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기지를 발휘했다. 기침을 두어 번 하면서 내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긴장감을 억누르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 얼굴로 불청객에게 뛰어가서 안긴 것이다.
"아빠? 왜 이제야 왔어, 아빠!"
네 살 남자아이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객의 품에 안기더니 두 손으로 그의 허리를 꼭 감아 안았다. 어린아이라 팔이 짧아서 허리를 다 두르진 못했지만 혹시라도 상대가 도망갈까 봐 있는 힘껏 자객의 옷을 부여잡았다. 너무 꼭 안았는지 ‘윽’ 소리가 나면서 자객의 옷이 살짝 찢어졌다.
자객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급히 몸을 틀어 범한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는 한 걸음 물러나서 왜 사남 백작의 서자가 자기를 보고 아버지라고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그때 범한의 손에 들린 옷 쪼가리가 눈에 들어왔다. 자객이 입고 있는 옷은 최고로 좋은 재질로 만들어서 칼로 잘라도 잘 찢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옷을 쪼그만 어린아이가 손으로 찢은 것을 보고 자객은 한참 동안 멍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객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사이, 범한은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라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범한은 이미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정원 동산에 있는 바위로 몸속 정기의 위력을 시험해 본 바 있었다. 여리지만 섬세한 고사리손으로 단단한 옥을 부순 적도 있었기에 나름 자기방어 능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네 살짜리 어린아이의 눈물로 상대방의 경계심을 풀고 난 후 자신의 정기를 손가락 끝에 모았다. 이걸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달랑 천 조각을 찢고 말 줄이야.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