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화 이름 없는 황색 서적
이 세계에 와서 유일하게 좋은 점이 있다면 사지가 멀쩡해서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범한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아파 보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느낄 수 없는 기쁨이겠지만 그는 하늘에서 내려 준 큰 은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범한은 4년 동안 여러 가지 고민들을 해왔다.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한번 제대로 살아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늘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았는데, 제대로 살지 않으면 하느님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 돼 버리잖아.’
‘이렇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됐는데 더 열심히 움직여야지!’
이런 고민 때문인지 백작가 별저에 사는 여종들은 서자 출신의 도련님이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아서 아주 손이 많이 가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 * *
"도련님,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어서 내려오시라고요."
범한은 작은 동산 꼭대기에 서서 저 멀리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네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뜬금없이 저렇게 높은 곳에 올라가서 마치 세상을 다 아는 듯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모습이 여종의 눈에는 정상적으로 보일 리 없었다. 주위로 모여든 종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애걸하기 시작했다.
사남 백작이 황제의 총애를 받는 몸이긴 했지만 작위가 그리 높지 않은 데다가 관직도 그냥 그런 수준인지라 표면적으로 받는 수입은 많지 않았다. 수입이 많다고 쳐도 어머니와 서자에게 그 돈을 전부 쓰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백작 별저에서 일하는 종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종들의 얼굴을 본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순순히 언덕에서 내려왔다.
"그냥 운동한 거 가지고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
이미 이 집 도련님의 어른스러운 말투와 고집에 이력이 나 있어서인지 종들은 크게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범한을 안아서 목욕을 시키러 갔다.
범한이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여종이 다 씻은 그를 안아 들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도련님은 어쩌면 이렇게 다른 집 아가씨들처럼 예쁠까. 나중에 어느 댁 아가씨가 데리고 가실는지 참 복 받으셨네요."
범한은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양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네 살짜리 아이가 열 살은 훌쩍 넘은 여종을 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런 품위 없는 놀림은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정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면 한 여섯 살 정도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여종을 놀려 줄 계획을 세워도 늦지 않을 것이다.
"도련님, 이제 낮잠 잘 시간이에요."
여종이 그의 엉덩이를 톡톡 다독였다. 별저에 있는 도련님에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나이도 어리고 성질도 고집불통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른처럼 자율과 절제를 지킬 줄 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낮잠 잘 때가 그랬다.
정상적인, 그러니까 일반적인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는 점심시간에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재우려고 드는 악마들과 사투를 벌여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악마들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좀 그렇긴 하지만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선생님을 그렇게 표현해 본 것이다.
하지만 범한 도련님은 억지로 재우지 않아도 매일 정오만 되면 가장 사랑스럽고 순진한 얼굴로 알아서 침실로 들어가 낮잠을 청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번 잠들면 잠꼬대도 하지 않았다.
처음 이 사실을 믿지 않았던 노부인은 범한이 낮잠을 핑계로 침대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장난을 칠까 봐 여종들을 시켜 지켜보게 했다. 그러나 몇 달을 지켜봐도 죽은 듯이 잠만 자고 깨워도 잘 일어나지 않아서 신기하게 여길 따름이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여종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범한이 잠들면 밖에서 지키고 있기만 했다.
* * *
때는 여름이었다. 더운 날씨 탓에 자연스럽게 범한을 지키던 여종들의 감시도 허술해졌다. 여종들의 바쁜 부채 바람에 가끔 반딧불이 이리저리 춤을 추기도 했다.
침실로 돌아온 범한은 침대 위로 올라가 깔려 있던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 밑에서 책 한 권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누르스름한 표지가 언뜻 봐도 꽤 오래된 책처럼 보였다. 표지에는 책 제목도 적혀 있지 않고 가장자리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무늬가 수놓여 있었다. 매 획의 끝부분이 갈고리 모양으로 휘어져 있어서 어떻게 보면 흘러가는 구름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상고 시대 느낌이 가득한 옷소매처럼 보이기도 했다.
범한이 천천히 책을 넘기다가 일곱 번째 장에서 멈췄다. 그 장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남자의 그림이 있었다. 남자의 몸에는 보일 듯 말 듯 붉은색 선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 선들은 무엇으로 그렸는지 일종의 착시 효과처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떠한 방향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범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 네 살짜리 어린아이로 본성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조용조용히 사느라 힘들었는데 그나마 이 책으로 지루한 시간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이 책은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오죽이라는 맹인 소년이 준 것으로, 오죽은 지금 범한이 살고 있는 세계의 어머니를 섬기던 종이었다. 범한은 그 소년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몸에 갇히게 된 그해에 범한은 항상 그 맹인 소년의 품에 안겨 있었다. 오죽은 너무 어려서 기억을 못 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시 범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가 아니었기에 경도에서 바닷가 마을 담주까지 오는 내내 맹인 소년이 자신에게 보여 준 진심 어린 보살핌과 사랑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진심이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맹인 소년 오죽은 범한을 사남 백작의 별저에 데려다준 후 노부인의 만류에도 그곳을 떠났다.
그가 떠나기 전, 갓난아이였던 범한에게 이 책을 주고 갔다.
범한은 오죽이 이 책을 주고 간 이유가 무엇일까 항상 궁금했다. 자신이 마음대로 수련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아예 걱정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일까. 다시 생각해 보니 원인을 알 것도 같았다. 당시 갓난아이였던 범한이 글자를 알 리 없으니 별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범한은 이 세계의 글을 전부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서 살게 된 이후로는 망령이나 신선 같은 신비한 존재에 대해서도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었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이 책이 정기를 수련하고 마음을 단련하는 것과 연관 있다는 것 정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단지 무슨 수련법인지 제목이 없다는 게 조금 아쉬울 뿐. 그래서 거리에 있는 아이들을 통해 수소문해서라도 이 수련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확인해 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저 생각만 했을 뿐 실제로 수소문하지는 않았다. 대신 웃어넘기고는 수련을 시작했다. 비록 이 내공이 그가 살았던 세계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겠지만 그에게 새로운 삶이 주어지고 이 책이 손에 들어온 이상 열심히 배워도 손해 볼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범한은 한 살 때부터 정기 수련을 시작했다.
그 결과 이 세상의 어떤 누구도, 심지어 백성들이 우상으로 생각하는 몇 대 종사나 무예 천재라고 하더라도 범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한 내공을 쌓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문의 내공을 수련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일찍 일어난 새가 먹이를 잡는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그러니 내공의 ‘내’ 자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물어보고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범한은 이미 명확하게 느껴지는 정기를 책에 그려진 붉은 선을 따라 천천히 흘려보내 보기로 했다. 기가 온몸에 흐르자 마치 따뜻한 물이 몸 안의 모든 장기를 깨끗이 씻어 내는 것처럼 몹시 편안했다. 그렇게 그는 천천히 깊은 명상에 잠기며 편안하게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