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 이야기 마당
경국 동쪽에 있는 담주항은 바다와 인접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남쪽에 몇몇 항구들이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기대했던 서쪽 항로가 남쪽으로 연결되는 바람에 국가의 무역 중심도 남쪽으로 이동해 버렸다. 그러면서 담주는 자연스럽게 점점 도태되었고 과거 번화하고 생기 넘치던 항구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적막한 기운까지 감돌았다.
갈매기는 여전히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오르지만 시끌벅적한 선원들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부터 담주에 살고 있던 백성들의 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평소보다 수입이 줄긴 했지만 몇 년간 세금을 면제해 준 황제의 은혜로 그런대로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원래 아름다운 항구였던 담주는 최근 들어 조용해져서 훨씬 살기가 좋아졌다.
그래서인지 당대 거물 중 몇몇은 이곳에다 별저를 지었다. 그러나 경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실제로 남아서 살고 있는 관원은 손에 꼽을 정도로 몇 명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사람까지 친다면 담주 서쪽에 살고 있는 노부인도 그 부류 중 하나였다.
노부인은 경도에서 유명한 사남 백작의 모친으로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담주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사남 백작은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단 한 번도 황제 곁을 떠난 적이 없었고 지금도 재무부에서 국정을 돌보고 있었다. 이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댁에 항상 예를 갖추고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 * *
어느 화창한 날.
어른들이 주막에서 바닷바람에 쓸려 오는 짠 내음과 습기를 만끽하면서 매실장아찌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무슨 재밌는 일이 있는지 열 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들이 사남 백작 별저(別邸) 뒷문 돌계단에 빽빽하게 모여 앉아 있었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아주 재밌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 무리의 소년들이 겨우 네다섯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듣는 중이었다. 그린 듯한 눈썹과 반짝이는 두 눈을 가진 예쁘장한 아이는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목소리였지만 말투는 어른스러워서 사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묻어났다. 아이가 한숨을 쉬면서 자그마한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니까 트루먼이 벽 쪽으로 가 봤더니 거기 계단이 있는 거야. 그 계단을 한 발 한 발 올라갔더니 문이 하나 나와서 그 문을 열고 나갔지."
"그래서요?"
"그래서?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기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갔지."
아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이런 수준 낮은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말도 안 돼요. 그 이름이 뭐더라, 하니······."
"하니스."
옆에 있던 다른 소년이 대답했다.
"맞아, 하니스! 그럼 트루먼이 하니스를 찾아가서 화를 내거나 따지지도 않았다는 거예요? 그렇게 몇 년을 갇혀 있었는데요?"
그 아이가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지 않았어."
"흥, 재미없어! 범한 도련님, 오늘 얘기는 며칠 전에 들은 거보다 재미가 없는걸요."
"그럼 무슨 얘기가 듣고 싶은데?"
"무협이요!"
"풍자 같은 거 있잖아요."
"흥!"
범한이라는 아이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아이들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싸우고 죽이는 건 별로야. 건전하지 않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보물을 캐는 것도 결국 자연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그때 갑자기 정원에서 잔뜩 화가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또 어딜 가신 거예요?"
범한을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도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깔깔거리며 웃더니 모두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다.
범한은 돌계단에서 일어나 궁둥이에 묻은 먼지를 떨어내고 얼른 정원 안으로 달려갔다. 문을 닫기 전, 아이는 반짝이는 두 눈으로 맞은편 잡화점의 젊은 맹인 사장의 모습을 한번 훑고는 전혀 아이답지 않은 복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범한이 이 세계에 온 지 딱 4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어느 미지의 세계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곳은 자신이 기억하는 세계와 비슷하긴 했지만 여러모로 많이 달랐다.
사남 백작 별저에 있는 종들의 얘기를 듣고 나서야 자신이 백작의 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치 드라마 속에 나오는 전형적인 귀족 가문의 이야기처럼 서자라는 위치는 큰어머니와 이복형제 같은 사람들의 잔혹한 수단으로 이용되기 쉬웠다. 하지만 무늬만 아들이라고 해도 어쨌든 가문의 혈통을 이을 유일한 후계자였기 때문에 범한은 경도에서 멀리 떨어진 담주라는 바닷가 마을로 보내졌다.
수년에 걸쳐 그는 자신의 신분에 점차 적응해 갔다.
비록 다 큰 성인의 영혼이 어린아이의 몸에 갇히는 바람에 생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해야 했지만, 만약 성인의 몸으로 들어갔다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범한은 이전 세계에 있을 때 중증근무력증 환자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서 조금 움직이는 것도 무척이나 힘겨웠다. 사실 그런 비참한 현실과 비교해 보면 어린아이가 된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 어린 소년의 몸에 갇혀 있어도 적응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가장 적응하기 어려운 것을 꼽으라면 역시나 그의 이름이었다.
‘범한’이라는 이름은 그가 한 살 때 사남 백작이 직접 지어 줬다. 이 이름은 원래 살던 세계에서 다른 사람을 욕할 때 사용하는 단어와 발음이 똑같아서 듣기 거북하고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옹알이도 못 하는 한 살짜리 아이가 무슨 항의를 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이전 세계에서 치료를 받을 때는 초기에 머리 정도는 움직일 수 있어서 늘 귀엽게 생긴 간호사에게 불법 다운로드 영화와 책을 사다 달라고 부탁하곤 했었는데 말이다.
백작 별저에서 오랫동안 살다 보니 노부인은 무뚝뚝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고 마음속 깊이 그를 아껴 줬다. 그 집에 있는 여종들도 그가 서자 출신이라고 해서 색안경을 쓰고 보지 않았다.
하지만 교제할 사람이 없다는 고통은 참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여종에게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 글자를 가르치는 선생에게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슬그머니 별저 옆문으로 빠져나와 거리에서 놀고 있는 평민 아이들과 어울렸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에게 자신이 살다 온 세계의 영화와 소설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자신이 속한 세계가 어디인지 자각하려고 몸부림쳤다. 그가 살던 세계에는 영화와 인터넷, 동성애 소설까지 있었단 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범한은 여태껏 아이들에게 영화 <트루먼 쇼>에 대해 이야기했다. 줄거리가 좀 바보 같고 극 중 짐 캐리가 그렇게 멋지게 나오지도 않아서 십 대 소년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항상 일종의 황당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죽을 날을 앞둔 사람이 갑자기 어린아이의 몸으로 살고 있는데 이 영화가 떠오르지 않는 게 더 이상한지 않은가.
어쩌면 눈앞에 펼쳐진 이 거리와 사람들, 그리고 하늘을 나는 갈매기까지 누군가로부터 조종당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영화 <트루먼 쇼>처럼 말이다.
영화 속에서 트루먼은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거짓임을 깨닫고 의연하게 배를 타고 떠나가다가 출구를 찾아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범한은 자신이 트루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임을 자각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