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화 프롤로그
때는 경국 기원 57년.
황제가 이끄는 군대가 한창 서쪽 정벌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사남 백작도 전장에 함께 나가 있었고 경도에는 황태후와 원로회가 남아서 국정을 보살폈다. 그날, 경도 밖 유정 강가의 태평 별저에서 불이 났는데, 자객들이 이 틈을 노리고 별저로 난입해 보이는 사람마다 무참히 살해했다.
별저에 있던 어린 종 중 한 명이 자신이 모시던 아기 도련님을 데리고 겹겹의 포위망을 겨우 뚫고 나갔지만 이내 검은 옷을 입은 자객들에게 추격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서로 계속 치고받으면서 경도 밖 남쪽 입구까지 이르게 되었다. 매복해 있던 자객들도 있었지만 한낱 어린아이가, 그것도 장애까지 있는 소년이 이런 강적일지 생각도 못 했던 터라 손 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언덕에 다다르자 소년 쪽에서 막강한 지원군이 나타났다.
"흑기사다!"
활을 맞고 쓰러진 자객들의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을 타고 나타난 지원군은 검은색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갑옷이 달빛에 비쳐 거무스름한 빛을 내뿜었다. 그들의 손에는 군대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활이 들려 있었다. 이미 대부분의 자객들이 그 활로 목숨을 잃은 상황이었다.
검은 기사단 뒤편에서 호위를 받는 마차 안에는 한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에 턱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그는 전장에서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종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기병들 사이에서 한 무리가 나오더니, 인간 낫이라도 된 듯 이미 중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는 자객들을 도살하기 시작했다. 그때 자객들 사이에서 도사 한 명이 나타나서 지팡이를 치켜들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의 파동이 언덕으로 모였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파동을 느꼈지만 정작 마차에 있던 중년 사내는 미간만 살짝 찌푸릴 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중년 남자의 옆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용맹한 매처럼 밤하늘 위로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윽,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도사의 주문이 멈췄다. 도사의 머리가 잘려 나가면서 피가 비처럼 내렸다. 마차에 앉아 있던 중년 사내는 그 광경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서쪽에서 온 도사라고 칭하는 놈들은 진짜 강자 앞에서 저런 도술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전혀 모르는군. 전혀 쓸모없는데 말이야."
잠시 후 살기등등한 수십 명의 검은 기사단이 주변을 확인했다. 그다음 자객들을 깨끗하게 처리했다는 수신호를 보내고 양쪽으로 정렬했다. 마차가 기사단 사이로 천천히 지나오더니 어린 종 앞에 멈춰 섰다. 마차 문이 열리자 중년 사내는 다리가 불편한지 부하의 도움을 받아 바퀴 달린 의자로 옮겨 탔다. 그동안 소년은 여전히 흉흉한 기세로 서 있었다.
사내는 소년이 등에 지고 있는 대바구니를 보고서야 창백한 얼굴에 안심한 기색을 띠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군."
바구니를 멘 채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소년은 칼인지 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은색 쇠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주변에 쓰러진 시신 여럿은 얼핏 봐도 조금 전까지 매복 공격을 하던 자객이었다. 그들 모두 목 주위에 치명타를 입은 듯 보였다.
"여기 일은 당신이 좀 처리해 주지."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소년이 냉랭하게 말했다. 떨림은커녕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중년 사내의 얼굴에서도 온화한 기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지. 나도 주인님을 위해서 뭔가 해야 하니 말이야."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떠날 준비를 했다.
"도련님을 어디로 데려갈 생각인 거냐."
바퀴 달린 의자에 탄 중년 사내가 물었다.
"너 같은 장님이 귀한 도련님을 모셔 가서 어쩔 셈이야? 같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생각은 아니겠지?"
"우리 아가씨의 혈육이다."
"우리 주인님의 혈육이기도 하지!"
중년 사내도 물러서지 않았다.
"도시 안에 작은 주인님이 지낼 만한 안전한 장소를 마련해 주도록 하지."
하지만 소년은 고개를 내젓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을 내렸다. 저 소년은 아가씨라는 사람 외에는 어떤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어떻게든 설득해야 했다. 중년 사내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경도 안 일은 주인님이 돌아오시면 곧 정리될 거다. 그러니 굳이 도련님을 모셔 갈 필요는 없어."
"난 당신의 주인이라는 사람을 믿을 수 없어."
상대의 말이 거슬렸는지 중년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린아이는 젖도 먹여야 하고 글도 가르쳐야 하는데 네가 이걸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그가 다시 비웃듯 말을 이었다.
"장님 주제에 네가 사람 죽이는 거 말고 뭘 할 수 있는데?"
그러자 소년이 침착하게 받아쳤다.
"그러는 절름발이 당신은 뭘 할 수 있는데? 당신도 사람 죽이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잖아."
"이번 일은 모두 경도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벼슬아치들이 꾸민 짓이야. 주인님이 돌아오시면 싹 정리될 일이라고."
맹인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지만 이런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아이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이 아버지뿐이야. 주인님 말고 누가 이런 위험을 감수하겠어?"
소년은 여전히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냉랭하게 대답했다.
"새로운 신분이 되면 더 이상 인생이 복잡해지진 않을 거야."
중년 사내도 그 의견이 그럴듯하게 들렸는지 가만히 생각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마침 적절한 곳이 있지."
"어디?"
"담주항. 주인님의 모친이 거기에 계시거든."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맹인 소년은 중년 사내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중년 사내는 미소를 띤 채 맹인 소년에게 다가가 대바구니에 있는 아이를 받았다. 그는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아이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역시 엄마를 많이 닮았군."
그러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이 아이는 나중에 커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멀리 서 있던 기사들은 갑자기 큰 웃음소리가 들리자 내심 놀랐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대체 저 아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모두 궁금해하고 있었다.
"음?"
그때 뭔가 생각하는 듯하던 맹인 소년이 다시 사내의 손에서 아이를 데려왔다.
소년은 무척 단순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갓난아이를 독사 같은 사내에게 맡기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중년 사내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웃고는 있었지만 웃음 속에 뭔가를 감추고 있는 눈치였다.
"두 달도 안 된 아이가 자기 손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다니, 게다가 오늘 이런 일을 겪고도 저렇게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다니. 정말 여러모로 손색이 없군."
그는 혹시라도 부하들이 들을까 목소리를 낮췄다.
"······역시 하늘의 자손이야."
중년 사내는 경도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그 권력을 이용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을 처리하기로 유명했다. 그가 심문한다면 이틀 안에 자백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 다른 설명은 필요 없었다. 이런 비범한 사람조차도 이 아이가 깊은 잠에 빠진 게 아니라 놀라서 기절했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늘의 자손은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전설에 따르면 수백 년에 한 번 하늘에서 인간 세계로 내려와 인간의 몸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하늘의 자손은 이 혼란스럽고 힘든 세상을 돌보기 위해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전투력과 예술적 조예와 지혜까지 타고난다. 물론 증명할 수는 없는 전설이었지만, 실제로 하늘의 자손으로 추정되는 몇몇 사람들이 인간 세계에 평화와 다른 유익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아무도, 심지어 국가에서조차 아무런 실마리를 잡을 수 없었다. 이렇듯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그들의 존재를 설명할 길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중년 사내는 하늘의 자손에 대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범신이 죽고 난 후 그의 영혼이 이 세계의 갓난아이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아이의 부모 중 하나가 신비로운 하늘의 자손일지도 모르는 아이의 몸 안으로.
어느새 날이 밝았다. 치열했던 어젯밤 전쟁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중년 사내와 기사단 역시 그곳을 떠나 길을 가고 있었다. 마차가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갈 때 마차 안에 누워 있던 아이가 잠에서 깼다.
눈을 뜬 갓난아이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마차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통의 아이들처럼 초롱초롱하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아니라 초점도 흐릿하고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하지만 이런 갓난아이의 몸에 다른 세계에서 온 영혼이 들어 있다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마차 앞쪽에는 손에 쇠막대기를 꽉 쥔 채 여전히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맹인 소년이 앉아 있었다. 마치 그 천으로 이 세상을 전부 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