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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의 모든 것-175화 (완결) (175/175)

귀환자의 모든 것 175화

늦은 밤.

준혁은 연무장의 중심에서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있었다.

수련을 위한 명상이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명상이었고, 그 명상을 통해 준혁은 변화를 느꼈다.

그것은 마치 용이 꿈틀거리듯 거대한 존재의 움직임이었다.

준혁은 눈을 떴다.

커다란 멸마의 서가 준혁의 눈앞에 있었다.

마치 오래되어 낡아 바스라지듯이.

천 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고속으로 흐르는 듯 커다란 묵빛의 책 멸마의 서는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계에서부터 꿈꿔 왔던 악의 근원을 파괴시키는 원대한 미래가 이루어졌으니 멸마의 서는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는 듯 서서히 그 존재를 지워 나가고 있었다.

이에, 준혁의 마력 안에 존재하던 멸마의 권능 또한 상실되기 시작했다.

악마소환의 권능이 삭제됨에 따라 준혁의 마력 안에 봉인된 악마들은 그대로 소멸되어 사라져 갔다.

연무장 사방으로 붉은빛의 악령들이 소멸되어 파괴되었다.

소리 없는 비명이 빗발치는 듯했다.

이로써 멸마의 서는 그 이름답게 완전해졌다.

악을 지움으로써 스스로를 지워 버리는 천계의 물건.

그에 따라 권능은 모두 사라졌으나 마계에서부터 쌓아 온 마력과 신성력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진 건 어둠의 악과 멸마의 서로부터 부여받았었던 권능. 그리고 더 월드의 시스템과 아이템이 가진 고유 능력의 상실.

그뿐이었다.

준혁이 무릎 꿇고 있던 몸을 일으켰을 때 연무장 문이 열리면서 동생 선우가 들어왔다.

“신수들이랑 같이 복귀했어. 헌터 범죄자들은 대부분 검거했고, 이제 나도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겠어.”

선우가 웃으며 다가왔다.

“고생 많았다.”

“형도 고생 많았어.”

준혁이 손을 내밀자 선우가 옅게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여러 가지로 많은 의미가 담긴 악수였다.

“근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함께 밖으로 나서면서 선우가 흘끔 텅 빈 연무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완전한 끝.”

“끝?”

“멸마의 서를 태웠거든.”

숨을 크게 내쉬며 잠시 생각했던 선우가 미소 지었다.

“복잡한 기분이었겠네.”

“과거를 태우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지.”

준혁은 동생과 정원을 걸으면서 과거를 회상했다.

마계에서의 생존과 동생을 만났던 날. 그리고 매니저를 만나고, 이후로 신수들을 찾으러 다녔던 순간들이었다.

강한 기억의 순간순간들이 가슴을 건드렸다.

어쩐지 조금은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을 느꼈던 게 언제인지 도저히 기억조차 나지 않는 감정이었다.

“앞으로 협회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리고 여기 캐슬은?”

“협회는 당분간 유지 될 거야. 물론 이 협회장이라는 직함이 가진 수많은 업무들이 사라질 테고, 아마 명예직으로 남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캐슬은 형의 공로를 인정해, 형과 신수들의 자리로 남겨 두기로 결정됐어.”

“다행이네. 여길 떠나면 서운했을 텐데.”

준혁이 저 멀리 보이는 캐슬 본관의 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던전과 관련된 모든 게 일반화된 지금. 이 캐슬은 신화들이 살고 있는 성인 거야. 내가 절대로 이 캐슬이 사라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지.”

준혁이 선우의 어깨를 손으로 짚으며 미소 지었다.

“돌이켜보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어. 그렇지 않아?”

선우의 물음에 준혁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긴 시간 동안 마계에서 싸워 왔고 짧은 시간 동안 귀환자로서 살았어. 그런데 그 모든 순간들이 돌이켜보면 한순간에 불과했다는 거지.”

“외롭고 고독했을 길을, 그 길고 길었던 시간 걸어온 형을, 나는 존경하고 있어. 진심으로.”

“나야말로. 내가 없는 동안 이렇게 잘 자라 줘서. 그리고 이렇게 멋진 어른이 되어 줘서 고맙다. 대견하고 기특해.”

“하하. 감상적인 밤이네.”

“의미가 있는 날이니까.”

“더 이상 칼을 들지 못하는, 우린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글쎄. 알 수 없지 그건.”

“궁금하다.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어떤 식으로 어떻게 빛날지.”

준혁이 웃었다.

“긍정적이어서 좋네.”

“하하. 내가 그 긍정의 힘 하나로 여기까지 온 거야.”

준혁과 선우는 웃으며 캐슬 본관으로 들어섰다.

거실로 가자 매니저 지우와 신수들이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청룡과 현무도 그 자리에서 어울리지 않게 진중한 표정으로 열성을 다하고 있었다.

선우가 웃으며 달려들어 함께 트리 장식을 만들기 위해 무리로 섞여들었다.

준혁은 소파에 앉아 옆을 보았다.

드래곤인 케일은 흥미 없는 듯 스마트폰으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

“주인님! 이거 진짜 멋지지 않아요? 제가 만든 거라고요!”

백호가 반짝거리는 별을 들고 자랑했다.

준혁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요! 청룡 형이 만든 건데요. 이거 봐요. 진짜 못생겼죠? 푸하하!”

백호가 청룡이 만들던 네모 장식을 들어 보이며 비웃었다.

백호가 고양이 눈을 하고서 달려들려고 하자 백호가 줄행랑을 쳤다.

청룡이 잡으려고 뛰어가자 옆에 있던 현무가 청룡이 만든 걸 보고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현무가 웃는 걸 보고 주작과 기린도 장식을 든 채 웃음보가 터졌다.

준혁은 웃고 있는 신수와, 청룡에게 붙잡혀 고통스럽게 고문을 당하고 있는 백호를 보면서 다짐했다.

어떠한 길을 가든, 어떠한 삶을 살든, 캐슬의 식구들 모두 상처받지 않도록 행복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 * *

크리스마스 당일.

캐슬은 이른 아침부터 파티 준비로 한창이었다.

신수들은 하나같이 멋진 수트를 입었고, 아이돌보다 훨씬 빛나는 외모를 자랑했다.

지우도 거울을 보며 자신의 파티 드레스 차림에 만족하며 미소를 지었다.

준혁 역시 미리 수트 차림으로 파티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올 블랙 수트 차림의 준혁은 벤치에 앉아 야외에 세팅되고 있는 긴 식탁과 예쁘게 꾸며진 트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백호와 기린이 수트 차림으로 간식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이 내리자 간식을 먹던 백호와 기린이 눈이 온다며 팔짝팔짝 뛰었다.

다 큰 청년의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가진 신수들이었다.

올 화이트 수트 차림의 백호는 마치 한 편의 화보를 보는 듯했고, 기린 역시 무대 위의 아이돌 가수처럼 빛이 났다.

신수들을 귀엽게 지켜보던 중.

“조금 어색하네요.”

청룡이 수트가 불편한 듯 삐그덕거리며 나타났다.

“앉아.”

청룡이 매무새를 다듬고 준혁의 옆에 앉았다.

“그동안 범죄 헌터를 가장 많이 잡은 게 청룡 너라던데.”

“가만히 있기는 심심해서. 많이 움직여서 그럴 뿐이죠.”

청룡이 멋쩍게 웃었다.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어. 주작이 게이트를 열어 줄 거야.”

전혀 예기치 못했다는 듯 놀란 얼굴로 준혁을 보았다.

“당장 가라는 게 아니라 천천히 생각해 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잖아.”

청룡이 먼 곳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준혁이 청룡의 어깨를 잡았다.

“캐슬에서 지낼 수도 있고 네 세계로 돌아가 살 수도 있고. 뭐가 됐든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어. 원하는 삶을 살아라. 그리고 고맙다. 그동안 도와줘서.”

청룡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제가 구원받았습니다. 주인님 덕분에요.”

지독한 화마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그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힌 건 자신의 주신 한준혁 덕분이라고, 청룡은 솔직하게 자신의 감사함을 밝혔다.

“너뿐만이 아니야.”

준혁이 정원에서 뛰어노는 신수들과 매니저 지우. 그리고 드래곤 케일을 보면서 웃음 지었다.

“모두가 서로에게 구원이었다.”

청룡도 야외 파티 테이블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네요.”

“그동안 너무 달리기만 했으니 쉴 때가 된 거야. 우리 신수들도. 그리고 나도.”

준혁은 만감이 교차하는 감정을 느꼈다.

처음 영혼이 마계로 소환되어 살아남기 위해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였던 기억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지독한 고통의 세월이 이렇듯 흘렀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 긴 시간이 지금은 눈 한 번 깜빡이면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기억이었다.

“주인님! 청룡 형! 사진 찍을 거야 얼른 와!”

백호가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를 두고 소리를 질렀다.

준혁이 청룡에게 눈짓하고 청룡과 함께 신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매니저 지우와 케일도 사진을 찍기 위해 같이 긴급하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

“드래곤이 화장을 왜 하는 거야?”

현무가 황당하다는 듯한 소리를 하자 케일이 새빨간 눈빛을 쏘았다.

현무가 못 말린다는 듯 얼굴을 가로저었고, 주작과 기린이 가장 먼저 화려한 만찬이 차려진 파티 테이블 뒤로 자리를 잡았다.

죽이 가장 잘 맞는 친구가 주작과 기린이었고 둘은 어깨동무를 한 채 연신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준혁이 매무새를 정돈하며 가장 중앙에 섰다.

그 옆으로 매니저 지우가 섰고, 키가 큰 청룡과 현무가 준혁의 뒤에 섰다.

“어? 협회장님 어디 계시지?”

지우가 두리번거릴 때, 캐슬 안에서 한선우가 급하게 타이를 매면서 뛰어나왔다.

준혁과 지우, 그리고 신수와 드래곤 케일이 웃으며 뛰어오는 선우를 바라보았다.

백호도 카메라 앞에서 뛰어오는 선우를 보며 웃었다.

“깜박 잠들었지 뭐야.”

선우가 타이를 마저 고쳐 매고 준혁의 오른쪽에 섰다.

“뭐야? 둘이 그렇게 있으니까 꼭 커플 같은데?”

선우의 말에 지우의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혀, 협회장님. 그게 무슨!”

“하하 실례인가? 그러기엔 너무 부끄러워하는데.”

선우가 새빨개진 얼굴의 지우를 보며 웃을 때 백호가 타이머를 누르고 뛰어왔다.

“10초 후에 찍힙니다! 치즈 하세요. 치~ 억!”

달려오던 백호가 발이 걸쳐 철푸덕 고꾸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비넥타이가 삐뚤어지고 공들여 세팅한 헤어가 망가진 채로 백호가 급하게 줄 끝부분에 서서 자세를 잡으려고 했다.

찰-칵!

포즈를 취하기도 전에 사진이 찍히자 백호가 울상을 한 채 손을 싹싹 빌었다.

“죄송해요. 한 번만 다시 찍게 해 줘요. 네?”

백호가 애걸복걸했지만 마치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모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으아악. 안 돼. 다시 찍어야 한다고요!”

백호가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펄쩍 뛰었지만 그 누구도 호응해 주지 않았다.

다시 찍어야 한다고 졸졸 쫓아다니는 백호의 얼굴에 청룡이 케이크를 손으로 떠서 발랐다.

“나한테 왜 이래 진짜아아아!”

백호가 케이크를 묻힌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잘 웃지 않는 청룡도 웃음을 터트렸다.

준혁은 청포도를 먹으며 떠들썩하게 파티를 즐기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던전의 시대가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

어쩌면 진정한 삶의 시작은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평범하게 사는 것이 훨씬 어려운 것이니까.

그것은 지금까지 싸워 온 그 어떠한 적들보다 더 어려운 싸움일지도 모른다.

새로움에 적응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목표를 갖는 것.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 지금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이 이제야 비로소 돌아왔다는 것을.

귀환자가 아니라 한준혁이라는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이제 막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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