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64화
백호의 손아귀가 스쳐 지나가자 마수는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간단하게 마수를 해치운 백호가 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신수들을 돌아봤다.
신수들은 백호는 신경도 쓰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멋진 전투를 보고도 감탄하지 않다니!
백호는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받치며 한숨을 뿜었다.
지금의 이 동굴형 던전에서 사냥하는 건 손 풀기도 되지 않을 만큼 간단한 일이었다.
최근 들어 던전의 숫자가 많이 줄고 있어 사냥터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수준에 맞지 않는 던전임에도 불구하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 블랙 던전 가고 싶다.”
혼자서는 사냥이 어려운 곳이지만 신수들, 무엇보다 청룡과 현무가 있기 때문에 급속 레벨 업이 가능한 곳이었다.
하지만 블랙 던전에 들어가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가뭄에 콩 나듯이 한세월을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나도 많이 크긴 했구나.’
백호는 괜스레 배시시 웃었다.
처음에 던전에 왔을 때는 너무 긴장돼서 숨이 턱턱 막혔었지만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나자 강해지는 것에 있어 열망이 생기며 재미도 붙었고 설레기도 했다.
그 흥분되는 감정은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 달콤해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정도였다.
“지겹다. 정말.”
백호는 무료함이 가득한 얼굴로 양 갈래에서 덤벼오는 마수들을 가볍게 처치했다.
“쿠에엑!”
두 마리의 마수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백호는 손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면서 이제 슬슬 던전이 마무리 단계에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사냥을 오래 하다 보니 자연스레 사냥 완료 시점이 감이 잡힌 것이다.
탈출 경로를 찾아보기 위해 움직이던 중 길목 끝 무렵에 불빛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마수의 냄새나 마수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야광석 같은 것인가 싶었지만 불빛은 흔들리거나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던전에 들어온 다른 헌터들인 듯했다.
최근 사냥터의 부재로 독점 던전을 구하기가 힘든 탓에 일반 헌터들과 만날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흠흠.”
백호는 최근 들어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비단 백호 자신뿐만이 아니라 신수들은 귀환자 준혁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인기였다.
사람들은 사냥을 위해 던전으로 가는 신수들을 만날 때면 늘 환호했고 경이로운 시선으로 박수와 함성을 보내 주었다.
인기라는 걸 처음 경험해 본 백호로서는 그야말로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런 경험을 한 후로,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같은 식구들이랑 있을 때야 본래의 성격을 드러내지만 이제 시민이나 일반 헌터들을 마주할 때면 괜스레 멋진 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백호는 괜히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옷을 다듬곤 마치 런웨이를 하듯이 멋진 걸음걸이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빌어먹을 신수 새끼들.”
“재수가 없으려니까. 카악 퉤!”
백호는 당황해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엑시트 게이트 근처에서 쉬고 있는 세 명의 사내가 혐오와 분노가 들끓는 눈빛으로 백호를 쏘아보며 욕을 늘어놓아서였다.
백호는 일순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들의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어깨가 축 늘어졌다.
“뭘 쳐다봐, 이 개 같은 신수 새끼야!”
“야야. 괜히 건들지 마라. 사람까지 잡아먹을지도 몰라.”
“저 더러운 새끼들 때문에 사냥이 안 돼. 시발.”
그들 말대로였다.
최근 들어 사냥터가 적어지면서 신수들은 귀환자 준혁의 명성과 자금을 바탕으로 던전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쓸어버리고 있어서였다.
때문에 일반 헌터들의 사냥터가 줄어들었고 그 불만이 이제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어떤 이유로 그들이 화가 난지 백호도 알게 되어서 동료 신수들에게 돌아가려고 할 때.
“귀환자는 왜 저런 것들을 풀어놓는 거야.”
“내가 말했지? 귀환자가 결국 이 시장을 망쳐 놓을 거라고.”
“귀환자나 저것들이나 똑같지. 결국 자기들 이익만 차리는 더러운 놈들인 거야. 조폭이랑 다를 게 뭐야?”
백호는 우뚝 멈췄다.
자신과 같은 신수들을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었지만 주인인 귀환자를 모욕하는 건 백호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백호가 세 명의 헌터들을 돌아보자, 헌터들은 곧바로 반응했다.
“뭐? 이 짐승 새끼야?”
“저거 눈깔 봐라? 우리도 치겠네?”
“신수는 염병.”
세 명의 헌터 중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사내가 껄렁거리며 백호에게 다가갔다.
“뭘 보냐고? 이 짐승 새끼야.”
백호의 앞에 선 헌터는 S급 헌터였다. 본래 이곳은 사냥터로 찾지 않는 곳이지만, 사냥터가 부족해지면서 이런 저급 던전까지 온 것에 대한 짜증과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다.
때문에 적지 않은 오러의 힘이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왔고, 그동안 전투에 익숙하던 백호 역시도 기운이 올라왔다.
주인을 모욕한 것에 대한 분노가 자연스럽게 백호의 전투력을 끌어 올리고 있어서였다.
“사냥터에 얼쩡거리지 말고 캐슬로 가서 개밥이나 먹어. 그렇게 눈깔 뜨고 다니지 말고. 확 끓여 먹어 버리기 전에.”
백호는 화를 억눌렀다. 여기서 일반 헌터와 싸워 봐야 욕을 먹는 건 자신이 될 것 같아서였다.
“……죄송합니다.”
백호가 시선을 내리고 사과했다.
그 모습을 보고 세 명의 헌터가 킬킬 웃었다.
“저 자식 쫄아서 꼬랑지 내리는 거 봐라.”
“영락없이 똥개 같네. 푸하하.”
“그러게. 더러운 똥개 새끼.”
백호가 상대하지 않고 신수들에게 돌아가려고 할 때.
“귀환자한테 캐슬에나 처박혀 있으라고 해. 괜히 나와서 설쳐 봐야 민폐일 뿐이니까. 알았냐?”
덩치 큰 S급 헌터가 비웃음을 픽 날렸을 때 백호는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걸 느꼈다.
주인은 절대 그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백호는 양손의 손가락을 구부렸다.
백호령의 힘이 손끝으로 무럭무럭 흘러나왔다.
그 힘의 변화를 눈치챈 헌터들이 즉각 장비를 챙기며 대응 준비를 취했다.
“크워엉!”
백호가 헌터들을 향해 사자후를 터트렸다.
그 순간 헌터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사자후 한 방에 전신이 얼어붙었다.
백호의 두 눈에서 새하얀 안광이 흐르며 시퍼런 힘이 손가락에 어렸다.
“……자, 잠깐!”
“……아, 안 돼.”
“이런!”
푸아악!
백호의 손가락이 S급 헌터 사내의 가슴을 찢어 냈다.
“크아악!”
S급 헌터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백호가 뒤이어 두 명의 헌터를 해치우려는 순간 백호의 앞으로 잔상을 남기며 청룡이 도착했다.
이성을 잃은 백호가 멈추지 않고 백호참 스킬로 마력을 뿌렸다.
청룡은 침착하게 창으로 백호의 공격을 쳐 내며 허리를 회전시켜 뒤차기로 백호의 가슴을 밀어 찼다.
뒤로 주르륵 밀려났던 백호가 자세를 낮추며 다시 달려들 준비를 했다.
“크르릉……!”
백호가 탄력적으로 쏘아져 나가기 직전.
무지개 빛과도 같은 빛이 날아와 백호의 양팔과 다리를 꽁꽁 묶었다.
기린의 마법이었다.
“크와아아앙!”
백호가 머리를 흔들며 사자후를 터트렸다.
주작의 불꽃이 백호에게 적중하는 순간 백호의 거칠었던 호흡이 진정되며 서서히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백호에게 공격을 당한 S급 헌터는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동료 헌터들은 질린 얼굴로 백호를 보고 있었다.
청룡은 서둘러 쓰러진 헌터의 상태를 살폈다.
“포션 없습니까?”
청룡이 물었다.
대답이 없자 청룡이 재차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동료들이 정신없이 큐브에서 포션을 꺼내 주었다.
청룡은 그들에게서 포션을 받아 사내의 상처에 포션을 콸콸 부었다.
“쿨럭. 컥!”
포션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헌터는 연거푸 피를 뿜었다.
위급한 상황이긴 했지만 S급 헌터라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청룡은 쓰러진 헌터를 안아 들고 신형을 날렸다.
그 자리에 남아 있던 동료들은 곧 몰려든 신수를 보고 도망치듯이 엑시트 게이트를 향해 달려갔다.
“……?”
백호가 영문 모를 표정으로 멍하니 사라진 청룡과 도망가는 헌터들을 바라보았다.
동공은 흔들렸고, 뒤늦은 충격이 얼굴을 덮치고 있었다.
신수들이 화난 얼굴로 주변에서 소리쳤지만 백호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마치 백지처럼 하얗게 물드는 듯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큰 사고를 쳤는지에 대한 자각은 확실히 남아 있었다.
신수가 사람을 해쳤다는 뉴스가 헤드라인에 퍼질 것이고, 그건 곧 귀환자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마치 잔잔한 물 위에 커다란 돌덩이가 퍽 하고 떨어지는 것처럼 충격이 올라왔다.
현무가 백호의 멱살을 틀어잡고 소리쳤다.
“정신 차려!”
백호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멈춰 있던 청각이 돌아오는 듯했다.
“뭘 멍청히 서 있는 거야.”
현무의 분노가 송곳처럼 심장을 찔렀다.
백호는 손끝이 떨리는 데 이어 전신이 진동하는 걸 느꼈다.
백호는 멱살을 쥐고 있는 현무의 손을 뿌리치고 뛰어나갔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백호는 무시하고 뛰었다.
엑시트 게이트를 통해 던전 밖으로 나와 곧바로 땅을 밟고 점프했다.
엄청난 높이로 솟아오르며, 이내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이 사람을 해쳤다는 사실이 믿어지지도 않았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엄연히 벌어진 사실이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백호는 빌딩 옥상을 뛰어넘고 또 넘었다.
전력 질주로 바람을 뚫으며 그렇게 끝없이 달렸다.
* * *
연무장에서 무릎을 꿇은 채, 심상 수련을 하고 있던 준혁은 매니저 지우의 말에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뭐?”
“그래서, 지금 응급실에서 치료 중인데 아직 의식은 없다고 해요. 백호는 사라졌고요.”
“사라졌다니?”
“그게, 아무래도 백호도 놀랐나 봐요.”
준혁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코로 한숨을 뿜었다.
지우가 눈치를 살피는 사이 준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신수들 보고 백호 찾으라고 해. 나도 찾아볼 테니까.”
준혁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네, 귀환자님.”
지우가 먼저 연무장을 뛰어나갔다.
연무장 중심에 서 있던 준혁은 고개를 젖혀 천장을 보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없도록 청룡에게 잘 관리하라고 했지만, 그러기엔 백호가 너무 어렸다.
성장의 힘으로 단기간에 신체의 변화가 생겼다. 외모로 보면 다 큰 것처럼 보여도, 아직은 어린 신수들이었다.
욕심이 부른 파일지도 모르나 아우터 갓이 인간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준혁은 짧은 한숨을 뱉곤 연무장을 나왔다.
사고를 쳤으니 지금쯤 제정신이 아닐 거다.
걸음을 옮기던 준혁은 우뚝 멈추어서서 얼굴이 굳어졌다.
아우터 갓은 좌절과 절망을 삼키는 존재.
준혁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신수가 흩어지고, 백호의 감정이 바닥을 치는 이 순간이 아우터 갓에게는 가장 달콤한 먹잇감일 수 있었다.
순간 등골을 휘감는 서늘함에 준혁의 걷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준혁은 드래곤 케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 게임 중인데 급한 일이야? 급한 게 아니면…….
“백호에게 아우터 갓이 나타날지도 몰라.”
- 찾아볼게.
준혁은 전화를 끊자마자 신형을 날렸다.
왜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을까?
준혁은 스스로의 자책감을 씹어 삼키며 백호를 찾기 위해 전력의 속도로 바람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