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63화
다음 날 이른 아침.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신수들은 연무장으로 가기 전에 식사를 하기 위해 다이닝 룸에 모였다.
“웬일이래? 백호가 조용하네?”
매니저 지우가 물을 꺼내며 웃었다.
백호는 고개를 숙인 채 식탁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저래?”
지우가 청룡을 보며 물었다.
청룡은 모른 척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지우가 백호에게 가서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안 아픈데요?”
백호는 눈 밑이 거뭇하고 눈알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너 얼굴이…….”
“그게, 잠을 좀 못 자서요.”
“잠을 왜 못 자?”
“고민되는 것들도 있고. 뭐 여러 가지로.”
백호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지우는 웃으며 백호의 등을 토닥였다.
“다 컸네. 고민도 할 줄 알고.”
“하하…….”
백호가 주작을 슬쩍 봤다가 눈이 마주치자 숨을 참고 다시 식탁에 얼굴을 처박다시피 했다.
지우는 그런 백호를 보며 물을 먹다가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며 다이닝룸을 나갔다.
백호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밥을 퍼먹었다.
“잘 먹었습니다아아!”
백호가 마치 경보를 하듯이 엉덩이를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식사 자리를 빠져나왔다.
캐슬에서 나와 먼저 연무장으로 가면서 백호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서 미치겠네. 진짜.”
백호는 울상을 한 채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어제 청룡에게 들은 말 때문에 한숨도 못 잤다. 아무리 잠들려고 노력을 해 봐도 주작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자신의 무지함을 자책해서였다.
“휴우우. 사과할 수도 없고 대체 어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천천히 걸었는데도 벌써 연무장 앞이었다.
연무장 안으로 들어가자 준혁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백호는 입구 앞에 서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서 바라보았다.
넋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검술이었다.
특별한 힘을 주입한 것도 아닌데 평범히 검을 휘두르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준혁의 검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검이 움직이는 경로 하나하나가 모든 균형을 파괴시킬 것만 같은 유려함이 있었다.
그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검이었다.
준혁은 토텝을 쓰러트리고 보상으로 얻은 신검을 시험 삼아 써 보고 있었다.
헬바인의 장검보다 훨씬 가벼웠으며 강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검술에 무지한 사람이 휘둘러도 볏짚 정도는 가볍게 벨 만한 칼이었다.
“다른 애들은 어디 있고 혼자 와?”
준혁이 검을 갈무리하면서 물었다.
백호가 입가에 침을 닦으며 정신을 퍼뜩 차렸다.
“아, 그게 제가 도망치듯이 나와서요.”
“도망치듯이?”
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백호 앞으로 걸어갔다.
“왜?”
백호는 한숨을 내쉬었다가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설명했다.
“청룡 형아가 챙긴다고 해서 위로를 해 주긴 했겠지만요. 제가 그동안 너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고. 무엇보다 주작을 볼 면목이 없어서요.”
준혁이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네?”
백호가 곰 같은 표정으로 준혁을 보며 되물었다.
* * *
식사가 끝나고 다 같이 연무장으로 향했다.
주작은 여전히 어깨가 무거웠다.
늘 이렇듯 매일 아침 연무장으로 가는 게 가장 고역이었다.
또 오늘은 얼마나 많은 실패를 하게 될지 두려움이 앞서서였다.
‘연무장에 도착하면 늘 하던 대로 스트레칭을 하며 본격적인 훈련을 준비하겠지.’
연무장에선 거의 대부분 청룡이 짠 커리큘럼에 따라 훈련하고 있었다.
스트레칭에 이은 개인 훈련 시간에 청룡이 문제가 있을 만한 곳을 손봐 주곤 했다.
그러고 나면 가벼운 대련 시간.
물론 마법 수련에 임하는 기린과 자신은 제외였다.
조금도 발전하지 못하는 자신에 비해 기린은 그야말로 천재여서 날아다닌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렸다.
4대 원소를 다루는 능력은 날이 갈수록 성장해 이제는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기린은 개인 특성 계열의 힘마저 다룰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주작인 자신은 평범한 마법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기린이 한없이 부러워 자꾸만 눈이 갈 수밖에 없었던 나날들.
그런 부분을 기린이 의식하고 있다는 것 역시 주작은 알고 있었다.
민폐 덩어리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돌이켜 보면 오랜 세월 동안 잠재된 힘의 반응을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단지 의지가 없어 모두 무시했던 신호들이었다.
그 결과가 지금 이렇게 돌아온 것뿐이다.
한 세계. 그리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조금만 일찍 깨달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놓쳐 버린 기회였고, 주인의 기대에 부흥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는 매일같이 주작이 마음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어서 와서 서라.”
가장 늦게 연무장에 들어선 주작은 평소와 달리 일찍부터 준혁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평소 늦은 저녁부터 왔었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연무장을 찾은 적은 거의 없어서였다.
주작은 서둘러 준혁의 앞에 도열해 있는 신수들 옆으로 뛰어가서 섰다.
주작은 물론 신수들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준혁을 보고 있었다.
“다들 열심히 해 줬고 그 성과를 본 것 같아서 기쁘다.”
신수들이 웃음을 참거나 배시시 웃거나 헛기침을 했다.
웃음기가 없는 건 주작뿐이었다.
“이번에 있었던 일을 기회로 큰 보상을 받을 수 있었어. 난 그걸 너희들에게 줄 생각이다.”
예기치 못했던 깜짝 선물이 있다는 언급에 신수들이 하나같이 눈을 반짝였다.
준혁은 큐브를 열어 그 안에서 토텝을 잡고 얻은 성장의 향로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신수들이 휘둥그런 눈으로 준혁이 선보인 향로를 보았다.
“이 힘은 모두 균등하게 배분될 거야. 누군가에게는 더 큰 힘을 줄 테고 누군가에겐 숨어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 주기도 하겠지.”
신수들이 설렘을 감추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강함을 추구하는 본능을 가진 아이들이었고, 준혁과 함께 캐슬에서 지내면서 그 열정은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신수들 중 그 누구도 거부하지 못할 최고의 선물이었다.
다만 주작은 자신 없는 얼굴로 향로를 보고 있었다.
준혁은 이 향로가 주작의 막혀 있는 벽을 뚫어 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백퍼센트 확신했지만 주작에겐 동기부여를 주기로 했다.
“실패할지도 몰라.”
준혁이 주작을 보며 말했다.
신수들의 시선이 하나둘, 주작에게로 향했다.
주작은 여전히 떨리는 눈동자로 향로를 보고 있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해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성공할 수도 있겠지.”
“…….”
“원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선물을 통해서, 네 한계를 넘어선다면 넌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내는 거야. 그동안 진화를 거부해 왔던 만큼.”
주작의 격한 감정이 휘몰아치는 눈동자가 준혁에게로 옮겨 갔다.
“네 의지로, 한계를 넘어서라. 주작.”
의심으로 가득 차 있던 주작의 얼굴은 곧 무한한 열정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희망을 잃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네 자신을 믿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러니 믿어라.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잊지 마.”
“네, 주인님.”
주작이 결연해진 얼굴을 끄덕였다.
준혁은 그 즉시 향로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신비로운 빛깔이 향로 안에서 눈부신 입자를 뿌리며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마치 길을 헤매듯 방황하다가 이내 목적지를 찾은 듯 신수들에게로 나비처럼 날아가 그들의 신체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감각이 느껴지는 듯 신수들은 편안해진 얼굴이 되었다.
눈을 감고 향로를 통해 얻은 힘이 몸 안에 자리를 잡도록 있는 그대로 외부의 힘을 받아들였다.
청룡은 내공의 증진에 깜짝 놀라며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고 다른 신수들 역시 마찬가지로 비슷한 반응들이었다.
그에 반해 주작만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향로의 힘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신수들은 응원하는 마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작을 주시했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주작의 각성을 기원하고 있었다.
준혁만이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주작을 지켜볼 뿐이었다.
시간이 꽤 길어졌고 신수들이 점점 회의적인 결과로 받아들일 때쯤 주작이 천천히 눈을 떴다.
선명한 붉은 기류가 발끝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다리를 휘어 감고 이내 전신을 삼키듯이 하며 사방으로 마력의 파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신수들이 하나같이 놀란 표정으로 주작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작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어서였다.
불꽃을 닮은 마력을 주변에 휘감은 채 허공에 뜨는 건 한 천재 예술가의 작품을 보는 듯 아름다웠다.
“와아.”
먼저 마법에 능통했던 기린조차 감탄사를 뱉었고, 다른 신수들은 이내 웃는 얼굴로 주작을 바라보았다.
축하의 의미였다.
드디어 벽을 깨고 각성하여, 스스로의 힘을 찾은 주작이었다.
쿠궁!
새빨간 빛을 뿌리며 주작은 이내 제자리에서 사라져 마치 물 만난 제비처럼 공간이동으로 연무장 안을 돌아다녔다.
눈으로 좇을 수도 없는 모습이라 신수들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곧 다시 모습을 드러낸 주작은 사뿐히 땅에 내려앉으며 자신의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돌아보고 있었다.
“축하한다.”
준혁이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넸다. 주작은 믿기지 않는 다는 듯 벙 찐 얼굴이었다.
신수들이 일제히 주작에게 달려들었다.
“축하해, 주작!”
“축하한다.”
“잘했어.”
“해낼 줄 알았어어어어!”
백호가 주작을 들고 헹가래를 했다. 신수들도 웃으며 같이 주작을 던져 주었다.
향로 덕분에 이제 주작까지 성공적으로 각성했으니 다듬기만 하면 신수들은 최고 수준을 성장할 수 있을 것이었다.
준혁은 웃으며 신수들을 보다가 몸을 돌려 연무장을 나왔다.
일단 벽을 한 번 뚫고 나면 그때부터는 날개 달린 듯이 성장하게 된다.
주작도 스스로에게 취해 오버 트레이닝이 될 정도로 파고들지도 몰랐다.
마치 한을 풀 듯이 마법을 쓸지도 몰랐다.
상관없었다.
캐슬에는 가슴이 뻥 뚫릴 만큼 무한히 힘을 써도 될 만큼 튼튼한 연무장이 있으니까.
* * *
“정말요? 정말 주작이 각성했어요?”
매니저 지우가 두 손을 꼭 모은 채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렇다니까.”
“아아. 정말 다행이네요. 주작이 너무 힘들어해서 걱정이 많았거든요.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
지우는 눈시울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난 당분간 쉴 테니까. 던전 스케줄 좀 잡고 진행해 줘. 이제 주작도 대동이 가능하니까 5인 팟으로.”
“저 그런데 던전이 최근 들어 많이 줄고 있어서요.”
“오픈이라도 상관없어. 자리만 있으면 어디든 가야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니까.”
지우가 생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다 앞으로 던전 없어져서 헌터들이 일자리 잃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가 되긴 하겠네.”
“그래도 없어지는 게 좋겠죠. 안전을 위해선.”
“그래야겠지. 정말 다 없어질진 모르겠지만.”
준혁이 다이닝 룸 쪽으로 들어갔다.
지우는 눈을 감고 기지개를 켜며 미소 지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