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62화
토텝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쏟아붓는 신수들의 모습은 가히 찬란했다.
기린의 마법이 토텝의 암흑 마법을 중화시키고 청룡의 창날이 토텝의 촉수 다리를 찢어 냈으며 청룡의 사자후가 토텝의 육신을 경직시켰다.
현무가 잠재력 안에서 깨우쳤던 힘은 토텝의 시간을 아주 잠시간 정지시켰다.
그 찰나의 틈을 통해 준혁은 최대치의 신성력을 담아, 토텝을 베어 냈다.
7번의 베기가 토텝의 육신을 산산조각 냈다.
악당의 최후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귀 아프게 떠들어 대던 토텝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 토텝의 원령이 배회하듯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신수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 틈에 준혁은 멸마의 서를 꺼내 펼쳤다.
커다란 묵빛의 책에서 은빛의 사슬이 튀어나와 도망 다니던 토텝의 원령을 휘어 감았다.
마치 맹수가 사냥감을 낚아채듯이 날렵했다.
“와, 저 엄청난 놈을 잡았어.”
“잡고 보니 별것 아닌 것 같기도 하네.”
“현무 형, 주인님이 다 해 놓은 거 우리가 숟가락만 얹은 거잖아.”
“어쨌든.”
신수들이 떠드는 동안 준혁은 멸마의 서 안으로 삼켜지는 토텝의 원령을 바라보았다.
마계에 있을 때만 해도 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찾을 수나 있을지. 만약 찾는다면 한칼이라도 통할지. 그 모든 생각들이 꺾여 나갈 만큼 지독한 감정의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긴 세월이 지나 이렇듯 육신을 잃은 토텝의 원령을 보자 복잡한 감정이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막상 힘을 키우고, 신수를 모아 아우터 갓 하나를 잡고 보니 이들도 그저 우주에 사는 생물체에 불과했다.
거창한 이름을 붙여 마계를 휘두르고 우주를 활보하며 인간종의 감정을 먹이로 삼은. 그저 한낱 생명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자그마한 원령의 존재는 한없이 나약하게 보였다.
하지만 토텝은 아우터 갓 중 하나일 뿐.
사냥해야 할 더 끔찍한 것들이 산재해 있을 터였다.
준혁은 서서히 사라지는 멸마의 서를 보면서 토텝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토텝이 멸마의 서에 갇혔으니 그의 일원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 건 당연한 일.
단지 놈들이 언제 찾아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전면전을 벌인다면 지금과 같은 얕은수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좁은 공간이 아니라 자유로운 영역에서 싸우게 된다면 현재의 전력만으로는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성과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천계의 권능이 하얗게 빛납니다.]
[토텝의 암흑 수치를 신성력으로 흡수합니다.]
[멸마의 서를 통해 천계의 천사들이 성장의 향로를 선물합니다.]
[멸마의 서를 통해 천계의 천사들이 신검을 선물합니다.]
준혁의 신체 주변으로 황금빛이 쉴 새 없이 회전했다.
뒤이어 허공에서 빛을 뿌리며 나타난 검이 휘리릭 떨어져 준혁의 앞에 떨어져 바닥에 푹 박혀 들어갔다.
준혁이 신검을 들었을 때, 번쩍! 하고 잿빛의 물건인 성장의 향로가 나타났고 준혁은 그것을 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트로피같이 생긴 향로는 신수들의 능력을 대폭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물건이었다.
더 월드의 시스템이 증명하고 있듯이 토텝을 잡기 전과, 토텝을 잡고 난 후의 결과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와.”
몇몇 신수들이 마치 서커스를 본 것처럼 두 손을 꽉 잡은 채 구경하고 있었다.
준혁은 성장의 향로와 신검을 큐브 안에 넣어 두고 출입문을 돌아봤다.
“케일.”
드래곤을 부르자 마법의 룬어로 단단히 막혀 있던 투명한 벽이 마치 녹아내리듯이 사라졌다.
출입구 밖에는 케일과 선우가 준혁과 신수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괜찮아, 형?”
선우가 걱정이 담긴 눈길로 준혁을 살피며 물었다.
준혁이 피식 웃으며 선우의 어깨를 잡았다.
“생각보다 훨씬 할 만했어.”
선우가 다행이라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준혁은 신수들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수고들 했다.”
“네, 주인님.”
어느덧 멋지게 커 버린 잘생긴 신수들이 준혁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 * *
주작은 연무장 구석에 기대 앉아 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보는 그의 얼굴에는 좌절감이 잔뜩 배여 있었다.
“……대체 왜 안 되는 거야.”
고통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린 주작은 가늘고 긴 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짚었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가 가슴이 울컥 시리더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밤잠을 줄여가며 죽도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신수들과 다르게 자신만 제자리였다.
모두 하루하루 실력이 늘어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신수들과 가족이 된 이후로, 유일하게 성장을 하지 못하는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처음엔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 건 줄 알았다.
다른 신수들처럼 열정을 갖고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래서 변화가 없는 거라고.
그동안 오랫동안 스스로를 방치하고 살았던 대가라고 생각해서 다른 신수들보다 두 배 세 배로 더 노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차원계의 힘을 일깨울 수 없었다.
애초에 주인님이 불가능한 걸 요구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주인님에 대해선 주작도 잘 알고 있었다.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후우우…….”
입 밖으로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연무장 문이 벌컥 열리면서 백호가 전력 질주로 달려와 주작의 앞에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처럼 멈춰 섰다.
“주작! 진짜 엄청났었어!”
백호가 흥분한 얼굴로 싱글벙글 웃었다.
“잘 해결됐어?”
“우리가 아우터 갓을 잡았다니까?”
백호가 손짓 발짓을 하며 당시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다.
“우와…….”
주작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백호를 보았다.
“진짜?”
“응! 우리가 방심한 아우터 갓한테 한 방씩 먹이니까 비실비실 해졌다니까. 그리고 주인님께서 마무리로 뎅강 하셨지.”
백호가 손날을 들어 휙 하고 날렵하게 그어 보였다.
“대단하네.”
주작이 주눅 든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하하하하! 가장 큰 활약을 한 건 바로 나라고. 이 백호님이 가장 멋졌…….”
백호가 말을 끝내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주작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연무장을 나가고 있어서였다.
“주작! 어디 가?”
주작이 멈춰 서서 힘없이 웃으며 백호를 돌아봤다.
“피곤해서 조금 쉬려고.”
청룡이 연무장 안으로 들어왔다.
주작이 꾸벅 인사하고 연무장을 나갔을 때 백호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입을 쭉 내밀었다.
불만의 표시였다.
“아직 할 얘기가 산더미인데. 저렇게 가 버리면 어쩌지.”
백호가 골 난 표정을 지었을 때 청룡이 화난 표정으로 백호의 앞에 섰다.
“음? 왜,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어. 청룡 형아.”
“너 주작한테 뭐라 그랬냐?”
“응? 뭘 뭐라 그래. 우리가 얼마나 멋있게 해치웠는지 설명해 줬지. 엣헴!”
백호가 멋진 척 눈을 감으며 턱을 들고 폼을 잡았다.
청룡이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뱉었다.
“왜 그래, 형?”
백호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청룡은 이마에 혈관이 불쑥 솟는 걸 느끼며 그대로 백호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한 힘이라 백호가 펄쩍 뛰었다.
“으악! 왜 때려! 아파 죽겠네, 진짜 이 씨.”
“이 씨?”
“아, 아니. 갑자기 때, 때리니까…….”
“넌 소시오패스냐?”
“응?”
“다른 존재의 감정에 대해서 공감이 안 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백호가 기죽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사고 좀 치지 마라. 백호야.”
“내가 뭘 잘못했는지 설명을 해 줘야 알 거 아니야!”
백호가 빽 소리를 질렀다가 청룡의 칼날 같은 눈빛을 보고 어깨를 확 움츠렸다.
“백호야.”
나지막하게 부르는 청룡의 목소리에 백호는 더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 주작은 힘들어.”
“주작이?”
“우린 모두 다 잘 성장하고 있는데. 주작 혼자 자기 특성을 못 깨우쳤잖아. 주인님이 대놓고 기대하고 있어. 그래서 가장 많은 시간을 썼고, 주작도 열심히 했고.”
“…….”
“그런데 안 되잖아.”
백호가 그제야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닫고 얼굴이 새파래졌다.
“근데 네가 이렇게 와서 그렇게 떠들어 버리면 주작이 어떤 기분이겠냐?”
“사, 사과해야겠어.”
청룡이 손날을 세워 백호의 머리를 탁 끊어쳤다.
“사과도 하지 마. 그것조차 자존심이 상할 테니까.”
백호는 대역죄인의 심정을 느끼며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주작 기분도 모르고. 바보같이…….”
“너까지 기운 빠져 다니면 되겠냐?”
“그, 그것도 안 되지.”
백호가 눈치를 살피며 굽혔던 허리를 억지로 바로 세웠다.
청룡이 한숨을 쉬며 등짝을 후려쳤다.
“주작은 내가 얘기해 볼 테니까. 너무 걱정은 말고.”
“흑흑! 역시 청룡 형아 밖에 없어.”
백호가 코알라처럼 달라붙자 청룡이 눈에 불을 켜며 백호를 집어 던졌다.
“까아악!”
백호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벽에 박혔다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청룡은 옷을 탁탁 털면서 조용히 연무장을 나갔다.
차가운 바닥에 엎어진 백호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뒤늦게 고개를 빼꼼 들었다.
멍하니 먼 곳을 보던 백호는 바닥에 이마를 쿵쿵 박았다.
“으휴! 이 바보! 얼간이!”
백호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연무장이 울릴 정도로 땅을 들이받았다.
* * *
주작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호수가 보이는 좋은 자리였다. 주인님이 자주 앉길래 주작도 앉아 본 것이다.
반짝거리는 호수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워 주작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풍경을 보면서 주작은 더 이상 노력하지 않고 이렇게 쉬고 싶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히 지금의 상황이 변할 것 같지 않았다.
절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그런 소망처럼 느껴져서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점이 얼마나 못난 건지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시작해서 도전해야 한다는 걸 느끼고 있지만 너무 까마득해서 한숨부터 입 밖으로 흘렀다.
기척이 느껴져 옆을 보자 청룡이 앉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냐?”
청룡이 말했다.
주작은 호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풍경이 아름다워서.”
“…….”
주작은 힐끔 청룡을 보았다. 청룡은 말없이 주작이 보고 있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말없이 앉아 있는 청룡을 보던 주작은 호흡을 크게 내쉬곤 다시 호수를 바라보았다.
“포기하고 싶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욕심이야.”
“욕심?”
“너랑 다른 신수들이랑 비교할 것 없어. 다른 신수들은 던전에서 사냥에 집중하고 있고 주인님이 힘을 더해 주고 있잖아.”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한계를 깬다는 건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난 강해지기 위해서 혼자 수련하는 과정에서 일곱 번이나 죽을 뻔했다.”
주작이 깜짝 놀라서 청룡을 보았다.
“뭐? 일곱 번을?”
“그래.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분명 그 결과가 네 앞에 나타날 테니까.”
“형 말대로 난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네.”
“마음부터 강해져라. 주인님과 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청룡이 주작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우리가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청룡이 벤치를 떠났다.
물끄러미 그를 보던 주작은 호수를 보며 고개를 떨구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