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45화
여왕의 침실로 가는 동안 왕자 아르혼은 매우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준혁은 그런 왕자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병약한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아르혼이었다. 그 여행은 실패했고, 기적처럼 왕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만나 꿈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이 이루어질지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니만큼 아르혼의 심정은 그 누구보다 떨릴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는 자신을 믿고 있었고,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었으니까.
반면 준혁은 태평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준혁은 엘릭서의 성능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고 엘릭서가 여왕을 단숨에 고칠 수 있을 것이란 사실에 한 치의 불신도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준혁은 어서 여왕을 고치고 도서관으로 가서 신수에 대한 정보를 가져와야 했다.
여왕의 침실에 이르자, 아르혼의 어머니이자 왕의 셋째 부인 크리스티앙은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여전히 긴 잠에 빠져 계시는군요.”
아르혼이 슬픔이 묻어난 눈으로 여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의식을 찾은 적이 없었던 겁니까?”
준혁이 물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잘 깨어나지 못하셨어요. 지금처럼요. 의식을 찾고 깨어나도 늘 몽롱해하셨죠. 걷기도 힘들 만큼.”
아르혼의 목소리에 슬픔이 잔뜩 묻어났다.
아직 소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혼이 어른스럽게 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어머니의 부재가 만든 성숙한 성장의 속도였다.
아르혼은 기대와 열망이 서린 눈으로 준혁을 돌아보았다.
“귀공께서 말씀하신 약으로 정말 어머니를 고칠 수 있는 겁니까?”
준혁은 큐브 안에서 엘릭서를 꺼내 아르혼에게 넘겼다.
“곧 건강한 어머니를 만날 수 있게 될 겁니다.”
아르혼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에 쥐어진 엘릭서를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빨간 액체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수많은 감정과 기억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르혼이 엘릭서를 소중하게 꼭 쥐며 인사를 전해 왔다.
준혁은 어서 사용하라는 듯 여왕을 향해 눈짓했다.
아르혼은 엘릭서의 마개를 열었다.
왼손엔 손수건을 들고 여왕의 입에 엘릭서의 액체를 조심스레 흘려보냈다. 액체가 입술 안으로 들어가 혀에 닿자마자 반응이 일었다.
여왕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얼굴을 살짝 떨었다. 그리고 느리지만 점차 엘릭서의 액체가 입안으로 들어갈수록 그녀의 창백한 안색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직접 엘릭서를 먹이고 있는 왕자 아르혼이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이자 여왕인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점차 홍조가 도는 얼굴에서 생기가 마치 꽃이 피어나듯 새로운 생명이 춤을 추고 있었다.
마침내 엘릭서를 모두 마신 여왕은 의식에서 깨어나 천천히 눈을 떴다.
아르혼이 말했던 것처럼 몽롱한 상태가 아닌, 초점이 제대로 잡힌 또렷한 눈동자가 울고 있는 아르혼의 얼굴로 고정되고 있었다.
“왕자.”
여왕이 갈라진 목소리로 아들을 부르며 그의 얼굴을 마른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어머니, 정신이 드십니까?”
여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혼은 울음을 왈칵 터트리며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곤 활짝 웃는 얼굴로 준혁을 돌아보았다.
“깨어났습니다. 정말 어머니께서 회복되셨습니다!”
아르혼의 목소리에 환희가 묻어나 있었다. 렉프레드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입을 벌린 채 지켜보고 있다가 아르혼 왕자의 말을 듣고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렉프레드 경! 어서 국왕 전하에게 이 기쁜 사실을 알려다오!”
“예! 왕자 전하.”
또렷한 의식으로 깨어난 것도 모자라 여왕은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어머니 무리하지 않으셔도.”
“몸이 가볍구나. 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여왕은 병약했던 지난 시절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아르혼이 준혁과 준혁의 엘릭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여왕은 침대에서 내려와 준혁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 대가는 아드님에게 곧 받을 예정이니 굳이 갚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왕이 의아한 표정으로 아르혼을 보았다.
“왕궁 도서관의 신수에 대해 찾고 계세요. 제가 약속했죠. 왕궁 도서관으로 안내할 거라고.”
겨우 그 정도의 이유로, 이런 기적을 행사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 여왕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소식을 전해 들은 왕이, 첫째 아들인 왕자와 그 어미, 첫째 부인과 함께 침소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크리스티앙.”
왕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비틀비틀 다가갔다. 반면 그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1왕자와 그의 어미이자 첫째 부인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왕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왕계의 흔한 풍경이었다.
준혁은 국왕과 아르혼이 건강하게 깨어난 여왕 크리스티앙과의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방에서 나왔다. 그러자 곧바로 렉프레드가 따라붙었다.
“모든 것이 귀공 덕분입니다.”
창문을 통해 성 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준혁이 쓰게 웃었다.
특별히 아르혼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엘릭서를 쓴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왕궁이었고, 그런 만큼 이방인에 대한 경계는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준혁은 그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만약 여왕의 병을 고친다면 왕의 경계를 지나 왕궁 도서관에 이르러 그들의 협조를 받기까지 훨씬 더 빨리 해결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뿐이었다. 구구절절하게 그런 것들을 설명하고 싶진 않았고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든, 준혁은 도서관에서 신수의 정보를 찾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어차피 자신은 이 세계를 떠나야 할 이방인이었다.
* * *
왕의 태도는 급변했다. 여왕의 쾌차를 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허풍이라고만 생각했던 듯 그는 준혁을 대하는 태도가 처음과 180도 달라져 있었다.
축하연을 열고 큰 상을 내리겠다고 했지만 준혁은 거절했다.
그런 건 하등 필요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일이니, 원하는 것은 오직 왕궁 도서관에 가는 것뿐이었다.
처음 국왕은 준혁의 거절에 당황했으나 왕궁 도서관으로 만족한다는 것에 물욕보다 지식을 탐구하는 것을 크게 칭찬했다.
준혁은 그러든지 말든지 여왕을 위한 축하연을 뒤로한 채, 왕자 아르혼의 안내를 받아 왕궁 도서관으로 가는 중이었다.
“국왕께서 그렇게 크게 웃는 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왕궁 도서관으로 가는 길 아르혼이 밝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 늘 어려 있던 그늘은 사라져 있었다.
“그렇습니까.”
“모두 귀공 덕분입니다.”
끝이 없는 감사의 인사에 준혁은 그저 희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왕궁 도서관에 도착하자, 왕궁의 서재라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놀라우리만큼 넓고 거대한 공간에 가득 찬 책들을 볼 수 있었다.
왕궁 도서관의 사서는 미리 손님을 데려올 것을 전해 들은 바였다.
하여 준혁이 찾는 자료를 미리 준비해 놓았다. 넓은 왕궁 도서관에는 사서밖에 없었고, 준혁은 주변의 방해 없이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아르혼 왕자가 떠나고, 사서와 준혁 단둘만이 왕궁 도서관에 남게 되었다.
“음료를 준비해 드릴까요?”
사서가 공손히 물었다.
준혁은 고개를 저어 보이곤 빠른 걸음으로 도서관의 중앙 자리로 가서 즉시 준비된 신수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사서가 미리 찾아서 빼놓은 신수 관련 서적은 모두 열두 권이었다.
두꺼운 책이 다섯 권. 그리고 평범한 양의 책이 일곱 권이었다.
왕궁의 도서는 매우 귀한 것이었기에 사서는 준혁이 두 시간여 동안 책을 읽는 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책을 손상시키거나 도난당하지 않도록 자세히 지켜봤다.
그런 사서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준혁은 사서의 시선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서적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신수의 실제 흔적에 대해 찾아 나선 끝에 준혁은 신수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신수와 가까운 전설. 그리고 실존에 대한 내용과 가까운 것은 드래곤 레어에 관한 내용이었다.
드래곤은 아니지만, 드래곤과 닮은 외양에, 특별한 힘을 가졌다 하여 드래곤 레어 속에 살고 있는 신수에 대한 글이었다.
위치가 첨부된 지도가 있어 위치까지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준혁이 신수의 위치를 자각하자 즉시, 천리안이 반응했다.
천리안은 미니맵을 띄우더니 화살표로 위치를 가리켰다.
화살표가 미니맵에 떴다는 것이 천리안이 신수를 찾았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책에서 발견한 위치를 알려 주는 것이므로 책이 알려 준 곳을 찾는 건 천리안 덕분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준혁은 혹시나 다른 놓친 정보가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에 남은 책들도 꼼꼼히 그 내용을 확인했다.
모든 책을 읽어 본 결과, 드래곤 레어와 관련된 책이 가장 가능성이 컸다.
천리안이 위치를 가리켰고, 근거가 생겼으니 더 이상 왕궁에서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준혁은 책을 덮고 일어섰다. 왕궁 도서관을 나가려고 하자 사서가 다가왔다.
“책을 다 보신 건가요?”
“덕분에요. 감사했습니다.”
준혁은 인사를 전하고, 도서관에서 나와 꽃들이 펴 있는 정원에서 천리안을 보며 방향을 잡았다.
목적을 이루었으니 굳이 작별 인사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아르혼과 렉프레드가 아쉬워하겠지만 이미 충분히 시간을 할애한 준혁이었다.
준혁은 아르혼의 처소 쪽으로 가서 그만 떠나겠다는 쪽지를 남기곤 창문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멀리서 정원을 청소하던 일꾼이 멍한 표정으로 날아오르는 준혁을 바라보았다.
* * *
“도서관을 나가셨다고?”
렉프레드의 물음에 사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했다.
도서관을 나간 시간을 떠올려 보면 꽤 시간이 흘렀다.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신단 말인가? 렉프레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준혁을 찾아 나섰다.
처음엔 그저 조금 찾아다니다 보면 발견할 수 있겠지 싶었지만,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렉프레드는 초조해졌다. 왕궁 내를 이 잡듯이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렉프레드는 준혁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아르혼 왕자에게 사실을 전하자 아르혼 왕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귀공은 떠났다.”
“예?”
“쪽지를 남겼더군.”
아르혼이 렉프레드에게 쪽지를 건네주었다.
- 급한 일이 있어 먼저 떠납니다. 고마웠습니다.
짤막한 쪽지였다.
“허…… 이렇게 가 버리시다니.”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이별은 짧을수록 좋다고 하더구나.”
“왕자 전하는 아쉽지도 않으십니까?”
“아쉬워도 어쩌겠느냐.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인 것을. 연이 닿는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왕자가 옅게 미소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