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44화
자신의 꾀에 자기가 당해 버린 암살단장 루크의 죽음은 처참했다.
극독의 고통은 잘 훈련된 암살자조차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지를 만큼 끔찍한 것이었다.
그는 신체가 거의 반쯤 녹아 버리고 말았다.
몸이 녹아 없어지는 동안에도 끝없는 고통에 시달려 죽은 후에도 얼굴에는 고통의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준혁은 사체가 되어 버린 암살단장 루크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고요한 저택 내에 준혁의 발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이제 모두 정리가 된 건가?’
저택의 복도를 걷는 동안 더 이상 암살자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설령 남은 암살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는 렉프레드 선에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제정신을 가진 이상 더 이상의 암살을 시도하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는 걸, 만약 남아 있는 암살자가 있다면 이미 깨달은 후일 테니까.
“아르혼 전하는 어떠십니까?”
준혁의 물음에 아르혼 왕자의 침소 앞에서 칼을 들고 있던 렉프레드가 긴장한 얼굴로 마른 입술을 열었다.
“다행히 무사하십니다. 이방인께서는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암살자들 대부분을 처리했으니 시신을 치울 사람을 구해야 할 겁니다.”
렉프레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직접 해치우신 겁니까?”
준혁은 대답 대신 미소를 남기고 자신의 방을 향해 이동했다.
렉프레드는 입을 떡 벌린 채 멀어지는 준혁을 응시했다.
“렉프레드.”
침소 안에 있던 아르혼이 나와 말했다.
“왕자 전하.”
“그가 왔다 간 것이냐?”
아르혼이 물었다.
“이방인이 말하길, 그가 저택에 침입한 암살자들을 처리한 것 같습니다.”
“……또 빚을 졌구나.”
“빚이 아니라 거래이지요. 왕자 전하께서 이방인에게 도서관으로 안내해 주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이게 거래라면 이방인이 너무 밑지는 장사이군.”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르지요.”
아르혼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아르혼은 항상 렉프레드가 자신의 편에 서 있다는 걸 느끼고 웃음 지었다. 고마움에 대한 표현을 담은 미소였다.
“아직 저택에 남은 놈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병사들에게 수색을 맡겼으니 아직까진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르혼이 고개를 끄덕이곤 침대로 돌아갔다.
렉프레드는 안타까움이 가득한 얼굴로 침대로 가는 아르혼 왕자를 바라보았다.
왕의 혈통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부터 이런 잔인한 현실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파서였다.
가슴 안의 상처에 대해 크게 내색하지 않고 꿋꿋이 이겨나가려는 모습이 한없이 대견했다.
‘곧 왕자님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렉프레드는 충심을 가득 담은 눈길로 아르혼 왕자 쪽을 바라보다가 칼자루를 꽉 잡았다.
왕자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가장 큰 책무 중 하나였다.
‘나 렉프레드가 있는 한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렉프레드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왕자를 지키기 위해 눈을 부릅 뜨고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초조하고 긴장된 시간 안에서 초침이 째깍째깍 흘러갔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추가된 사병들을 대동해 저택 내의 시체를 치우면서 렉프레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죽은 암살자들의 숫자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아서였다.
대체 혼자서 어떻게 이런 많은 암살자들을 죽일 수 있었던 건지 신기했다.
더불어 이 정도 암살자의 숫자라면 만약 이방인이 없었을 경우, 저택 내의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몰살되었을 거라 생각되자 소름이 확 끼쳤다.
아르혼 왕자의 말대로 또다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운명 속에서, 그가 저택 내 전부의 목숨을 구해 낸 것이었다.
시체를 모두 치우고 아침 식사를 위해 다이닝 룸에 왕자와 이방인 준혁이 모였다.
준혁은 평상시와 다를 것 없이 태연하게 식사를 했지만 오늘 아침 시체를 치운 것은 렉프레드 자신과 아르혼 왕자는 놀란 눈으로 식사 중인 준혁을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저택 안으로 숨어들었던 암살자들의 숫자가 잊히지 않아서였다.
“귀공께서는 도서관 말고 다른 건 도움이 필요한 게 없으십니까?”
아르혼 왕자가 준혁을 빤히 보며 물었다.
빵을 먹으며 평온한 아침을 여유 있게 즐기고 있던 준혁은 그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신수에 대한 정보.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신수를 찾는 것부터 범상치 않은 자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아르혼은 그가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상식을 넘어선 무력 수준과 더불어 신수의 정보를 찾는 신비로움이 합쳐지니 아르혼에게 준혁은 점점 더 큰 사람으로 비치고 있었다.
이런 자와 함께 왕궁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생각하니, 평소 두려워했던 형제인 1왕자조차 두렵지 않을 정도였다.
이방인이 자신의 편에 선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하지만 그건 생각만으로 남겨 두었다.
이방인 자체로서도 그랬고, 자신이 담기엔 너무 큰 사람이었다는 걸 아르혼은 직감해서였다.
“오늘 점심이 지나면 왕궁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왕께 인사를 올리고 나면, 도서관으로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준혁이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묘인족 노예는 어떻게 됐습니까?”
준혁이 렉프레드를 보며 물었다.
“절대 허튼짓을 하지 않도록 주의시킨 다음, 묘인족이 살고 있는 숲으로 사람을 붙여 보냈습니다. 숲 끝까지 함께 대동할 수는 없을 것이나, 최대한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편의를 봐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렉프레드경.”
“당연히 약속한 일을 한 것뿐인 걸요. 하하하.”
렉프레드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준혁은 시간을 보낼 겸 저택 내부를 구경했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과 저택 내부 구조. 그리고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보내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저택을 살펴보는 걸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왕궁으로 출발할 시간이 됐다.
준혁은 아르혼 왕자와 렉프레드와 함께 왕이 살고 있는 성을 향해 이동했다.
소문이 난 것인지 3왕자가 살아 돌아왔다며 시민들이 왕자의 행렬에 따라붙었다.
여왕을 살리기 위해 떠난 여정은 실패했었지만, 기적적으로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이방인 덕분이었다.
* * *
성으로 가는 길. 왕자 아르혼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방인은 거짓말을 한 것 같지 않았다. 그럴 성격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긴장이 됐다.
그는 자신이 가진 약이라면 어떠한 병약한 환자든 고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여왕의 건강이 회복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 상상만으로도 아찔함에 어지러움이 일 정도였다.
만약 죽어 가는 병약한 어머니를 살릴 수만 있다면 아르혼은 이방인을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어머니는 아르혼에게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아르혼은 희망을 가슴 안에 품으며 이방인 준혁과 호위기사들을 데리고 왕을 알현하기 위해 이동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왕의 알현실로 들어갔다.
준혁은 어지럽게 장식되어 있는 알현실의 벽화를 구경하였다. 왕은 왕좌에 앉아 있었고, 가신들이 도열해 있었다.
준혁은 대충 분위기에 맞춰, 왕에게 인사해 주었고 왕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3왕자 아르혼을 매서운 눈길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래. 여왕을 고칠 약을 찾겠다고 멋대로 험한 길을 나서더니. 결과는 어떠하냐?”
왕이 물었다.
아르혼은 준혁을 잠시 보았다가 왕에게 예를 갖추었다.
“여왕님의 병을 고칠 약을 구해 왔습니다.”
아르혼이 말하자 알현실 내가 술렁였다.
“그 어떠한 치료사와 약을 썼음에도 고치지 못하였던 여왕의 병이다. 그런데 그 약을 구했다? 어떻게? 그리고 네가 데려온 저 이방인은 대체 누구란 말이냐?”
“알킨 도시로 오던 중에 만난, 생명의 은인입니다. 또한 제게 여왕의 병을 고칠 신비한 약을 준 이방인이기도 합니다.”
왕의 시선이 준혁에게로 향했다.
경계심이 잔뜩 어린 눈길이었다.
“왕자의 말이 사실인가?”
왕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여왕의 병을 고칠 신비의 약도, 그대가?”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장내가 술렁였다. 대부분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준혁은 그런 주변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띤 얼굴로 구경했다.
“그대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그대를 믿고 약을 썼는데 여왕의 병이 악화된다면 어찌할 테지?”
왕이 취조하듯이 물었다.
“저를 죽여도 좋습니다.”
“목숨을 걸겠다? 흥! 여왕의 목숨과 이방인의 목숨. 그 두 목숨의 무게가 다르다는 걸 그대도 알 텐데?”
아르혼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왕은 자신의 태도를 고수하겠다는 듯 고집 서린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한국 옛 속담에 평양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고, 의심병이 걸린 작자에게 귀함을 증명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아르혼으로서는 속 타는 일이겠지만 어찌하겠는가? 준혁이 그런 태평한 태도로 나오자 왕이 못마땅한 듯 입술을 위로 씰룩였다.
그러자 아르혼이 왕에게 한 발 나아가 아뢰었다.
“국왕 전하. 이방인의 신비로운 약에 대해서는 제가 보증하오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네 목숨이라도 걸겠느냐?”
왕이 호통치듯 물었다.
아르혼은 자신한다는 듯 즉각 고개를 주억였다.
“예. 제 목숨을 걸고 보증하겠습니다.”
왕이 코웃음 쳤다.
가신들과 함께 서 있는 1왕자와 여왕도 비웃음을 던졌다.
“왕자의 목숨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좋다. 허락하마. 하나 수많은 치료사들조차 고치지 못했던 여왕의 병이다. 이는 곧 왕궁의 명예와도 직결되는 일. 만약 여왕의 병이 악화되거나 차도가 없다면, 자비를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 국왕 전하.”
준혁은 아르혼과 렉프레드와 함께 알현실을 나왔다.
등 뒤로, 힐난과 비웃음이 알현실 안에서 메아리치듯 울리고 있었다.
“저, 정말, 치료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렉프레드가 걱정이 만연한 얼굴로 준혁에게 물었다.
준혁은 웃음 지었다. 대답 없이 웃고만 있자 렉프레드가 애타는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렸다.
“귀공께서는 어찌 확실한 답을 주지 않고…….”
렉프레드가 채근하자 아르혼이 그의 팔목을 잡았다.
“내가 이미 보증했다. 이제 와 귀공을 의심하는 것이냐?”
아르혼의 무거운 목소리에 렉프레드의 어깨가 말려 들어갔다.
“죄, 죄송합니다.”
“기분 나빴다면 용서하시오. 내가 대신 사과하겠소. 미안하오.”
아르혼의 사과에 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여왕이 쾌차하면 바로 도서관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그거면 됩니다.”
준혁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그제야 렉프레드는 살겠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고, 아르혼 왕자는 물론 그렇게 할 것이라며 고마움을 담은 미소를 보냈다.
‘이제 곧 신수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겠군.’
준혁은 조용히 뇌까리며 왕궁의 복도를 걸었다.
창밖의 햇살은 눈부셨고, 날씨는 아주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