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40화
“막내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뿐이야. 자네 말대로 상인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문책을 삼을 만한 일이지.”
“닥치고, 묘인족이나 팔아.”
준혁이 한 번만 더 거슬리는 소리를 했다간 손을 쓸 거라는 기세를 내비쳤다.
“그, 그리하지.”
팔마트가 굴욕을 참고, 노예 서류를 찾아왔다.
“이 노예계약서의 가격은 1만 페니…….”
팔마트가 가격을 말했을 때, 준혁이 팔마트의 뺨을 후려갈겼다
짝-! 하고 커다란 소리가 나면서 팔마트가 바닥에 철퍽 쓰러졌다.
노예상이 몰래 천막 밖으로 도망가는 사이, 준혁이 웃었다.
“얼마?”
“4, 4천 페니…….”
준혁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에조차 비싼 값에 처분하려는 것을 보니 뼛속까지 상인의 탐욕이 흐르는 듯했다.
“거래는 집어치우고 그냥 죽여서 가져가지.”
준혁의 손에 금빛이 번쩍이며 헬바인의 장검이 나타났다.
그 광경을 보고 눈이 빠질 것 같은 얼굴로 팔마트가 쩍 벌린 입을 벌벌 떨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준혁은 팔마트가 보기에 그저 무술 실력이 꽤 있는 정도의 이방인이 아니었다.
“제, 제, 제가 감히 뉘신지도 모르고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팔마트가 공포에 질린 채로 준혁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준혁은 진땀을 흘리며 떨고 있는 팔마트를 내려다보면서 손아귀에 쥐고 있던 헬바인의 장검을 다시 큐브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러곤 팔마트의 머리 위로 2천 페니를 던졌다.
화폐 종이가 펄럭펄럭 떨어져 내렸다.
“계약서.”
준혁이 짤막하게 말하자, 팔마트가 벌떡 일어나 노예계약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고 공손히 내밀었다.
준혁이 계약서를 받았을 때, 천막 안으로 수십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팔마트님!”
“괜찮으십니까?!”
병사들이 준혁에게 병장기를 내밀며 소리쳤다.
팔마트는 눈알을 떼굴떼굴 굴렸다.
분명, 상황상 이제 승기를 잡은 건 팔마트 자신 쪽이어야 했지만 분위기가 묘했다.
병사들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준혁은 태연하게 계약서를 보고 있었다.
팔마트의 머릿속에 방금 전 허공에서 검을 뽑아내던 유령 같은 준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숫자가 많다 한들 마법의 힘을 쓰는 자를 공격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무, 물러들 가라.”
당장이라도 준혁을 벨 것처럼 기세를 끌어올리던 병사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팔마트를 보았다.
“모두 물러가라 하지 않느냐! 귀한 분이시다. 어서!”
팔마트가 콧수염을 떨면서 소리쳤다.
병사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하나둘 준혁을 향해 세웠던 무기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치를 살피며 천막 밖으로 나갔다.
병사들이 물러갈 때쯤.
“묘인족은 어디 있지?”
준혁이 노예계약서를 보며 물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팔마트가 등을 굽힌 채로 앞장섰다.
천막을 나왔을 때.
“아빠!”
외동딸 엘레나가 뛰어왔다.
“대체 뭐 하는 거야? 내가 저 자식한테 팔지 말라고 했잖아!”
소리치는 외동딸을 보고 팔마트는 속에서 천불이 치솟았다.
저 대책 없는 딸년 때문에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주먹이 떨릴 지경이었다.
“얌전히 물러가거라. 혼나고 싶지 않으면.”
평소 같지 않은 불길이 치솟는 팔마트의 눈길에 엘레나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그런 그녀를 남겨 두고 팔마트가 준혁을 향해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리 따라오시지요.”
준혁은 황당해하며 울먹이는 엘레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엘레나가 분해 죽겠다는 듯 울음을 터트렸다.
* * *
팔라트가 묘인족을 숨겨 둔 곳은 그의 개인 창고였다.
경비가 삼엄하게 세워져 있었지만 그들은 팔라트의 명령에 즉시 문을 열어 주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제가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팔라트가 예를 보인 후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들의 시선을 받으며 준혁은 팔라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잠시 팔라트가 묘인족을 데리고 창고에서 나왔다.
묘인족은 목줄에 힘없이 끌려 나왔다.
기력이 하나도 없는 얼굴이었다.
눈빛은 반쯤 죽어 있었고, 야생 본능만이 최소한의 경계심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이방인이시여. 묘인족은 당신의 것입니다.”
팔라트가 존중을 담아 목줄을 준혁에게 넘겼다.
준혁은 그 목줄을 잡아 묘인족을 데리고 경매장을 떠났다.
팔라트는 한숨 돌렸다는 듯 안도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준혁을 응시했다.
“팔마트님. 저자를 쫓을까요?”
병사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팔라트는 병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억!”
병사가 다리를 붙잡고 비틀거렸다.
“얼씬도 거리지 마라. 그랬다간 단체로 관짝에 들어가는 수가 생길 수 있으니.”
팔마트의 분노에 병사는 눈물을 찔끔 훔치며 뒤로 물러섰다.
팔마트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생전 그토록이나 무서운 존재를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체 허공에서 칼을 뽑아낸다니.
단순히 칼을 꺼낸 그 마술 같은 행위는 둘째치고, 그가 검을 들었을 때의 위압감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났다.
꿈에 나올까 무서운 이방인이었다.
그를 상대하려면 자신이 가진 전 병력을 쏟아부어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단순히 그런 손해를 생각하기 이전에 정체 모를 두려움이 있었다.
팔마트는 오랜 상인의 경험상 저런 자와는 절대 척을 져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괴물 같은 자였어…….”
팔마트는 마치 유령을 본 사람처럼 파랗게 질린 얼굴로 조용히 읊조렸다.
* * *
준혁은 묘인족을 데리고 식당을 찾아 나섰다.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배부터 채워 주기 위해서였다.
경매장 안에는 제대로 된 식당이 없어서 바깥으로 나와야 했다.
묘인족이 신기한 듯 사람들이 힐끔 쳐다보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들은 묘인족을 마치 강아지 보듯이 했다.
이 세계의 문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흔한 풍경인 것이다.
묘인족은 도망가거나 저항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잘 따라왔다.
준혁은 묘인족을 힐끔 보았다.
마치 생을 포기한 듯 아무런 희망도 없는 얼굴이었다.
묘인족을 데리고 잠시 다닌 끝에 가게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목을 축이기 위해 준혁은 가까운 맥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맥주를 먹는 사람들로 아주 시끄러웠다.
준혁은 사람들을 해치고 빈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종업원을 불러 세웠다.
“맥주와 오리고기. 샐러드랑 음료까지.”
“50페니입니다.”
준혁이 품 안에서 지폐를 꺼내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바로 갖다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이 동전을 거슬러 주고 주방으로 뛰어갔다.
묘인족은 갑자기 사람이 많은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겁먹은 듯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앉아라.”
준혁이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묘인족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준혁을 보았다.
“앉아.”
“노예는 의자에 앉을 수 없어요.”
묘인족이 말했다.
“괜찮아. 내가 허락했으니까.”
“그렇지만…….”
준혁이 강한 시선을 보냈다.
거절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긴 눈이었다.
묘인족은 어쩔 수 없이 의자에 앉았다.
준혁은 가게 안을 훑어보았다.
도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팔씨름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죽자고 정신없이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구경하는 사이 여지없이 쓰레기들이 나타났다.
“푸하하. 뭐야, 이거? 묘인족이 의자에 앉아 있잖아?”
“노예를 의자에 앉히다니. 정신이 나간 건가? 하하하.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겠네.”
“이봐, 친구. 묘인족 노예와 사랑에라도 빠진 건가?”
“머리 색을 봐. 이방인이라 잘 모를지도 모르지.”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남자 세 명이 낄낄 웃었다.
묘인족이 불안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괜찮아. 저런 쓰레기들은 신경 쓰지 마라.”
준혁의 말에 장정 세 명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저 친구 입이 좀 험하군.”
“이봐 이방인. 돈 꽤 있다고 유세 부리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어.”
“다시 한번 지껄여 보시지.”
묘인족을 보고 있던 준혁이 세 명의 남자들을 보았다.
그 시선에 남자들이 웃었다.
“와아, 무서워라.”
“눈빛 좋은데?”
준혁은 놈들이 한 발자국만 더 다가온다면 반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뭣들 하고 있어? 얼른 이리 와.”
사내들이 보스의 부름에 마땅찮은 표정으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 하지 마세요. 왜 이러세요. 정말!”
그들이 돌아간 자리에서 또다시 소란이 일고 있었다.
여자종업원이 벌건 얼굴로 소리쳤다.
콧수염이 잘 정돈된 근육질의 남자는 준혁에게 시비를 걸었던 남자들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종업원에게 자라처럼 얼굴을 내밀었다.
“엉덩이가 토실토실한 게 꼭 토끼 같구나. 흐흐흐. 이리 와서 술 좀 따라 보거라.”
“저는 술을 가져다주는 사람이지 술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에요.”
여자 종업원이 눈물이 맺힌 얼굴로 말했다.
콧수염의 남자가 여자 종업원의 팔목을 확 잡아당겼다.
“술을 따르다가 나랑 같이 침대로 가면 1골드를 주지. 어때?”
“미쳤어요?! 이거 놓으라고요!”
“하하! 앙칼진 목소리를 보니 정말 기대가 되는구만. 엉? 으하하하!”
콧수염 남자의 웃음에 주변에 있던 남자들도 커다랗게 웃어 댔다.
여자 종업원은 주변을 훑어보며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콧수염 남자의 이름은 알랭드로.
그는 귀족이었다.
반면 그를 제외한 가게 안의 남자들은 모두 평민이었다.
사병을 등에 업고 왈패를 부리기로 유명한지라 어느 누구도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저 손님. 묘인족을 이리 테이블에 앉히시면…….”
종업원이 한 소리 할 때 준혁이 벌떡 일어서서 콧수염 사내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자, 우선 재미부터 보자고. 그럼 고분고분해질테니. 괜히 나한테 반해서 질척대지나 말라고.”
콧수염 남자가 술을 한 잔 비우고 일어섰을 때, 누군가가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놔라.”
“음? 뭐야 이 외국 놈은?”
콧수염은 특이한 행색의 준혁을 빤히 보더니 자신의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별 같잖은 놈이 영웅 행세를 다 하는군? 크허허허!”
콧수염 사내의 웃음에 친구들이 또다시 바보같이 따라 웃어 댔다.
“좀 맞자.”
준혁이 말했다.
그러자 콧수염이 준혁의 앞으로 바짝 걸어갔다.
“어이 이방인. 사태 파악이 안 되나?”
머리 두 개는 더 큰 키 차이가 났다.
체구의 차이도 심했다.
호리호리한 준혁과 달리 콧수염의 덩치는 커다란 근육 그 자체로 이루어져 아주 장대했다.
맥주 가게 안의 사람들은 준혁을 철딱서니 없는 녀석이라고 혀를 차거나 곧 곤죽이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씁쓸하게 지켜봤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빌어라. 그럼 목숨은 살려 주지. 뭐 그래도 팔다리 하나씩은 부러지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