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38화
렉프레드는 카사디아가 움직이는 순간 멍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만약 자신이 저 자리에 있었다면 눈 깜짝하는 사이에 몸이 산산조각 났을 거다.
그렇지만 준혁의 움직임은 렉프레드가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카사디아의 발톱이 머리에 닿기 직전 준혁은 몸을 틀어 피한 뒤, 도약하여 팔꿈치로 얼굴을 강타, 연이어 타격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그 상상을 초월하는 공격력에 카사디아는 피를 뿜으며 바닥에 몸을 뉘어 버렸다.
단 몇 초 사이에 일어난 일. 렉프레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손으로 눈을 비볐다.
카사디아는 꿈틀거리며 몸을 겨우 일으키긴 했지만, 여파가 상당했는지 비틀대며 철창에 등을 갖다 붙였다.
얼굴은 볼품없이 상해 있고 몸은 이미 시퍼렇게 물들었다.
왼쪽 팔은 완전히 부서진 건지 너덜너덜했다.
준혁이 곧 마무리를 지으려는 순간 카사디아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다.
카사디아의 몸에서 강렬한 초록빛이 감돌았다.
그와 동시에 썩은 흙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리고 폭발!
옥 안이 화염으로 뒤덮이는 순간 렉프레드는 깜짝 놀라며 몸을 웅크렸다.
그는 불길의 범위를 간신히 벗어나 있는 위치였지만 폭발의 풍압이 렉프레드와 두 기사들. 그리고 마차를 날려 버렸다.
훌쩍 날아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렉프레드는 시커먼 얼굴을 들어 멍하니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곳을 응시했다.
“……자폭을 한 건가?”
뒤늦게 왕자를 떠올린 렉프레드가 통증을 참으며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마차는 복구가 불가능한 모습이다.
바퀴는 반 이상이 깨져 나갔다. 마차의 파손 상태는 심각했다. 그런 마차의 근처에 왕자가 쓰러져 있었다.
렉프레드는 황급히 왕자에게 뛰어가 무릎을 꿇고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전하……!”
왕자의 기도에 손을 가져갔다.
본래 왕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은 어쩔 수가 없다.
수행기사들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의학 기술을 겸하고 있었다.
렉프레드는 맥박이 정상적으로 뛰는 것을 확인하고 겨우 안도의 큰 숨을 내쉬었다.
천만다행으로 왕자의 몸에 큰 문제는 없는 듯했다.
렉프레드의 두 부하 기사들 역시도 절뚝거리고 있지만 대체로 몸이 괜찮아 보였다.
“준혁님……!”
렉프레드가 굳은 얼굴로 저 멀리 활활 타오르고 있는 새빨간 불길을 돌아봤다.
콰르릉!
천둥벼락이 치더니 하늘에서 빗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그 빗물에 의해 점차 불길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언제 새로운 마수가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당장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게 안전하지만,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렉프레드가 여기서 머뭇거리는 것은 순전히 준혁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고는 해도 저런 불길에 살아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빗물에 서서히 불길이 꺼져 가며 검은 연기를 피어 올리는 광경을 그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곳의 모두가 죽은 목숨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니 이미 산적들에게 죽었을 목숨.
그는 귀한 은인이다.
그래서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왕자를 위해서라도, 숲은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했다.
빗물에 의해 조금씩 꺼져 가는 불길을 보며 슬픈 표정으로 몸을 돌리던 렉프레드는 귀를 쫑긋 세우며 우뚝 멈추었다.
무슨 소리가 나서였다.
렉프레드는 눈을 크게 뜨며 다시 불길이 잦아드는 쪽을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준혁이 검은 연기를 뚫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그는 심지어 옷마저 멀쩡했다.
도저히 저 엄청난 불길에서 살아온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왕자를 깨우세요. 지금 바로 출발합니다.”
렉프레드와 두 명의 기사는 준혁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 *
하미스 숲을 나와 평원에 이른 렉프레드는 바닥에 끌려오고 있는 카사디아의 사체를 슬쩍 뒤돌아봤다.
다크엔트와 달리 이 마수는 죽어도 피부의 강도를 잃지 않았다.
무게가 있어 말들이 크게 속도를 내지 못했다고는 해도 이 거리를 오면서 몸에 흠집 하나 남지 않다니.
저런 괴물을 쓰러트린 준혁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준혁 님. 어떻게 된 겁니까? 그 불길은 뭐고. 카사디아는 어떻게 된 것인지.”
평원까지 오면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렉프레드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 그거요? 별거 아니던데.”
준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니 그보다…… 대체 어찌 그 엄청난 불길 속에서 멀쩡히 나오실 수 있었던 겁니까?”
“설명하기 어렵네요.”
준혁이 웃으며 말했다.
‘설마 방어마법?’
준혁라는 이방인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마법마저 쓸 수 있다니?
충격 그 자체였다.
“신분증이 없어서 도시로 들어갈 때 문제가 있을 것 같은데. 방법이 있을까요?”
준혁의 질문에 렉프레드는 사색에서 깨어났다.
“아! 그건 걱정 마십시오. 문제없이 성문을 지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신분증도 마련해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준혁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보다 저건 왜 가져가는 겁니까?”
준혁이 마수의 사체를 돌아보며 물었다.
“알킨 도시에서 아주 큰 경매장이 있는데, 카사디아의 사체는 상당한 돈이 될 겁니다. 저희 왕…… 아니 도련님이 사체를 팔아 은혜를 갚고 싶다는군요.”
준혁은 이 세상도 자신이 살던 세상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흐려지고 있었다.
* * *
렉프레드는 투구를 벗어 땀을 식히다가 얼굴에 빗물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그는 늘 챙기고 다녔던 짐 가방에서 황급히 로브를 꺼내 왕자에게 건넸다.
“다시 비가 올 모양입니다. 서둘러 몸에 두르시지요.”
고급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아주 평범한 로브다.
마차가 다크엔트에게 끌려가면서 물건 대부분 버리게 되어 자신이 쓰던 여분의 것을 줄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렉프레드.”
“제대로 모시지 못하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부디 도시에 도착할 때까지만 참아 주십시오.”
왕자가 괜찮다고 했지만 렉프레드는 면목 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 * *
왕자의 몸이 많이 지쳐 가는 가운데 드디어 도시의 입구가 보였다.
왕성이 있는 알킨 제국 도시였다.
그런 도시인 만큼 거대한 성벽 사이에 도시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있었다.
곧 그 성문 부근에 이르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왕자님.”
왕자는 힘없는 얼굴로 렉프레드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도시의 입구에는 물건을 팔거나 입성 심사를 거치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휴, 살았다. 진짜 한계였어.”
왕자가 말의 뒷목에 이마를 대며 작게 웃었다.
아르혼 왕자의 무리는 줄을 서지 않고 성문 쪽으로 곧장 이동했다.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준혁이 바닥에 끌고 다니는 정체불명의 생명체로 집중됐다.
두꺼운 천에 감싸져 있어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대개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호기심이 섞인 시선으로 렉프레드 일행들을 지켜봤다.
“대기!”
심상치 않음을 경비병도 확인했다.
상황을 전파받고 경비대장이 잔뜩 경계하는 자세로 무리를 이끌고 다가왔다.
치안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경비대장은 렉프레드의 심장 쪽에 새겨진 왕실 문장을 보고는 깜짝 놀라더니 황급히 자세를 낮추었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신분이 확인되는 대로 최우선으로 입성을 허가해 드리겠습니다.”
렉프레드는 품 안에서 왕실에서 발급하는 신분증을 건넸다.
“수행 기사단 단장 렉프레드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당장 길을 열도록.”
신분증을 확인하자마자 경비대장은 정중히 렉프레드 일행을 안내했다.
성문 앞으로 가면서 경비대장은 눈치를 살피며 “그런데 저 뒤에 계신 분의 신원은…….”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렉프레드가 도끼눈을 떴다.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위치의 분이다. 관심을 거두어라.”
경비대장은 창백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죄, 죄송합니다!”
무려 왕실의 수행 기사가 높은 사람이라고 할 정도라면 경비대장으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는 위치였다.
주변의 웅성거림을 뒤로하고 시민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렉프레드 일행은 무사히 성문을 통과했다.
* * *
렉프레드는 일행과 왕자를 데리고 자신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지금쯤이면 우리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왕궁으로 들어갔을지도 몰라.’
렉프레드는 그늘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1왕자의 계략에 빠져 이 꼴을 당한 것이었으니 분명 살아 돌아온 것을 알면 새로운 암계를 꾸밀지도 몰랐다.
모든 부분에 있어 신중해야 했다.
렉프레드는 최상급의 옷을 구해 왕자에게 보냈다.
그는 그간의 행로로 많이 지친 탓에 아르혼 왕자는 목욕 후, 음식도 들지 않고 잠이 들었다.
왕자가 잠이 든 걸 확인한 렉프레드는 곧장 준혁을 찾았다가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되었다.
“뭐? 사라져?!”
경비대장의 말을 듣고 렉프레드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 귀한 분을 그렇게 그냥 보내 버리다니.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죄송합니다. 어서 사람을 풀어…….”
“그렇게 떠들 시간에 당장 찾아내! 워낙 눈에 띄는 사람인 데다 들고 다니는 게 범상치 않은 것이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경매장으로 가 보거라.”
“예. 다른 분부사항은 없으십니까?”
“극진한 대우로 모셔와라. 그의 신원은 수행 기사 단장의 권한으로 증명한다.”
“예-!”
경비대장은 경례와 함께 크게 대답하고선 부하들을 데리고 부리나케 경매장으로 달려갔다.
멀어지는 경비대장 무리를 보며 렉프레드는 초조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혹여나 그가 홀연히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자신에게도, 그리고 아르혼 왕자에게도 이는 필시 큰 후회가 남을 일이었다.
* * *
“여기인가?”
준혁은 경매장을 쉽게 찾았다.
경매장에 온 건 천리안의 미니맵에서 빛이 반짝이고 있어서였다.
경매장을 찾은 것이 아니라 지도를 따라와 보니 경매장이었던 것이다.
높은 탑을 만들어 그 위에 떡 하니 이름을 걸어 놓았으니 경매장인지 모르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운 시장 구간을 지나자 경계를 서고 있던 한 병사가 척! 하고 창을 들어 막았다.
“이곳은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준혁은 자신의 머리 바로 위에 있는 건물의 간판을 다시 확인했다.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
준혁이 병사를 보며 물었다.
“정 경매 참여를 원하거든 저기로 가서 입찰 신원 서류부터 작성해야 한다.”
병사가 준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가 턱짓으로 가리킨 방향 쪽을 보자 확실히 그곳에 접수처로 보이는 곳이 있긴 했다.
그때, 병사 뒤에서 한 검은 콧수염의 뚱뚱한 남자가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
“엇- 팔마트님! 별일 아닙니다. 경매장 이용법도 모르는 이방인이라 설명을 좀 해 주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