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28화
나즈문이 눈을 끔뻑였다.
입 밖으로 검붉은 핏물이 거품과 함께 흘러나왔다.
그는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곳은 준혁은 아니었다.
지난 시간을 짚어 보고 있는 듯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죽음 앞에 이르면 기억은 가속된다.
나즈문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고 있을 것이다.
으레 인간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이 그렇게 두려웠나?
준혁은 아우터 갓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즈문은 보았다.
그들을 보았고 두려움에 빠졌고, 마신과 계약하여 그들로부터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희생을 치렀다.
이해할 생각도 공감해 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두려움에 굴복하여 마신과 계약한 패배자일 뿐이었다.
[균열의 열쇠를 획득했습니다.]
나중에 케르니안을 만나면 감사의 인사라도 전하고 싶어질 정도다.
방해를 하려는 모든 공작이 오히려 보상이 되어 주고 있었으니까.
준혁은 완전한 죽음에 이르러 시체가 된 나즈문을 응시하면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곧장 캐슬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동안 꽤 긴장감이 올라왔다.
전화가 연결되고,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청룡에게 전달하세요. 누군가 캐슬을 찾을 것이고, 그를 막으라고. 나머지 직원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대비시켜야 합니다.”
- 알겠습니다. 귀환자님.
전화를 끊었다.
다행히 아직 캐슬에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나즈문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길 수 없다는 걸.
자신을 찾은 건 스스로 말했듯이 시간을 끌기 위한 용도였다.
오직 신수를 죽이는 것이 목적.
준혁은 나즈문의 수준과 청룡의 수준을 떠올렸다.
둘이 격돌할 경우, 누가 이길까에 대한 질문에 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준혁은 청룡을 믿었다.
아직 어리다고 해도 청룡은 수많은 전투경험을 가졌으며 끊임없이 무에 대해 정진한 신수였다.
“지켜다오.”
준혁은 죽은 나즈문을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멀리서 드론 카메라가 다가오고 있었다.
준혁을 촬영하기 위해서, 그리고 나즈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 *
캐슬의 경비원들은 갑작스러운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만 퇴근하고 교대도 하지 말라는 소식이었다.
파천 길드에서 내려온 직통 명령이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거 맞는 거야?”
“시키는 대로 해야지.”
“일찍 퇴근해서 좋긴 한데.”
“좀 찜찜하지?”
“아무래도.”
“일단 명령이니까. 서두르라 했으니 어서 가자고.”
경비 헌터들이 퇴근을 준비했다.
짐을 챙겨 이제 막 캐슬 입구를 떠나려고 할 때, 짧은 금발에 근육질의 사내가 다가와 캐슬 입구 앞에 섰다.
그는 캐슬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공학으로 만들어진 수트를 입은 사내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의 수트이기도 했고 캐슬을 보는 기운이 뭔가 수상쩍었다.
두 경비 헌터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쩌지?”
“퇴근하라고는 했지만 수상한데.”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사이 짧은 금발의 사내가 캐슬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막아야…….”
키 큰 사내가 나서려는 동료의 팔을 잡았다.
“멍청아. 급하게 떠나라고 했으면 이유가 있는 거야. 명령대로 수행해야 돼.”
“하지만…….”
“기다려. 내가 전화해 볼게.”
금발의 외국인이 캐슬의 입구를 통과했다.
그사이 경비 헌터 한 명이 파천 길드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곤 비서에게 방금 외부인이 캐슬 안으로 들어갔다고 보고했다.
짧은 전화 통화를 마친 사내가 동료를 보았다.
“뭐래? 들어가서 다시 내쫓으라고 하지?”
“아니. 내버려 두래.”
“왜?”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자가 아니라더군.”
“대체 무슨 일이야?”
두 경비 헌터는 방금 들어간 외부인을 떠올리며 찜찜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 * *
연무장에서 수련 중이던 청룡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의식이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밤 12시였다.
진행중이던 내공 수련을 끝내고 청룡은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연무장의 입구 밖으로 캐슬 식구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다.
심지어 백호와 기린도 새벽에 자다 말고 업혀 있었다.
캐슬에서 일하는 사람들 전부가 온 듯했다.
야간조 교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가 백여 명이 넘었다.
청룡이 앞쪽 중심에 서 있는 집사를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청룡이 물었다.
“파천 길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누군가 이쪽으로 올 거고. 그를 막으라고 청룡님에게 전달하라고요.”
집사가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얼굴로 말했다.
직원들을 불러 모으느라고 뛰어다녀서였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를 알아챈 청룡이 길을 터주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청룡이 비켜 주자 캐슬의 직원들이 줄을 지어 연무장 안으로 들어갔다.
청룡은 업혀서 자고 있는 백호와 기린을 보다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확인했다.
힐러 최설화와 지우가 보이지 않았다.
청룡은 집사를 불렀다.
“힐러님과 매니저님이 안 보이는데요.”
“아, 두 분은 외출 중이십니다. 따로 연락이 가기 전까지는 캐슬로 복귀하지 말라고 전달했습니다.”
청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목소리는 낮춰 주세요.”
청룡의 말에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에게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이거.”
집사가 스마트폰을 주었다.
“귀환자님으로부터 전화가 올 겁니다.”
집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마트폰이 울렸다.
청룡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청룡입니다.”
- 차원을 넘어온 놈들이 있다. 신수를 노리고 있어. 희생이 없도록 막고, 지금쯤 이미 캐슬 안으로 들어왔을 거야.
한준혁의 목소리였다.
“예, 주인님. 처리하겠습니다.”
청룡은 자신의 창을 챙겨 들고, 연무장 밖으로 나왔다.
캐슬 직원들은 모두 연무장 안의 중심에 모여 있었다.
바깥에서 문을 닫자 안에서 잠그는 소리가 났다.
청룡은 창을 들고 집중력을 올렸다.
걸음을 옮기면서 시야를 사방으로 확장시켰다.
어두운 정원을 밝히는 조명은 은근히 밝았다.
미리 캐슬의 식구들을 모두 연무장에 모았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연무장을 중심으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위치에서 적을 찾아내야 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적이 연무장을 발견하면 큰일이니까. 그렇게 연무장 주변을 순찰하면서 청룡은 스스로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경계 근무를 서듯이 연무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계속 움직이던 끝에 청룡은 캐슬 안으로 들어온 낯선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190cm 정도 되어 보이는 큰 키에 마법공학으로 만들어진 수트를 입은 짧은 금발의 사내였다.
그는 마치 인조인간 같은 표정으로 청룡에게 다가왔다.
그는 리모컨처럼 생긴 장치를 꺼내더니 버튼을 눌렀다. 이후, 장치의 스크린에 떠 있는 정보를 확인하곤 미소를 지었다.
“신수를 찾았군.”
차원을 넘어온 존재라는 건 이미 주인에게 전해 들었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했지만 어디로 보나 그는 이 세계 자체의 외부인이었다.
청룡은 창대를 꽉 쥔 채 그를 응시했다.
푸른 마나의 불꽃이 어른거리는 청룡의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싸우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기세를 내비쳤다.
“무주르. 내 이름이다. 너희들을 죽여, 귀환자의 뜻을 물거품을 만들기 위해 너희들을 찾았지.”
자신의 이름을 밝힌 자를 보면서 청룡은 표정의 변화 없이 기운을 끌어올렸다.
“네 이름 같은 건 안 궁금해. 어차피 내 손에 죽을 놈 따위에게 관심을 기울일 이유는 없으니까.”
무주르가 정원을 훑어보며 미소 지었다.
“아름다운 곳에서 사는군. 문명은 뒤처져도 낭만이 남아 있어. 여기 캐슬뿐만이 아니라 도시도 아름답더군. 폐허가 되어 버린 우리 땅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
청룡은 무주르라는 자의 이야기를 길게 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죽여야 한다.
죽이면 끝. 청룡 자신의 전투에 다른 의미는 없었다. 주인이 가고자 하는 길을 막는 적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것이 주인을 모시는 청룡 자신에게 최고의 명예였다.
신법을 밟아 접근하여 창을 휘두르자 주무르의 양손에서 마법방패가 만들어졌다.
강기를 품은 힘이 휘몰아쳤지만 그런 청룡의 힘은 마법방패와 부딪칠 때마다 소실되어 사라졌다.
청룡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무작정 공격을 쏟아붓다가는 공력의 손실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 이를 수 있었다.
“제법이긴 하다만 귀환자가 아닌 이상 나를 이길 수는 없을 거야. 상식을 벗어난 그와 달리 적어도 넌 인간이거든. 인간은 마법 문명을 넘어설 수 없지. 이미 증명된…….”
창에 맺힌 기가 주무르를 조각내기 위해 날카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가속도를 붙여 쇄도했다.
청룡이 쏘아 보낸 강기가 다시 한 번 마법방패와 부딪쳐 커다란 폭발음을 내며 사라졌다.
까다로운 수비 형태의 전사였다.
이대로 가다간 공력이 바닥을 칠 것이고, 그때부터 위기는 청룡의 숨통을 조를 수 있었다.
저 마법방패는 단순히 막아 내는 것이 아니라 힘을 흡수하는 형태의 성질을 가진 마법 같았다.
힘 대 힘의 충돌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챈 청룡은 순수한 자신의 창으로 그를 끝장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생각이 바뀐 건가?”
여전히 주무르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입가에 건 채로 자신의 마법방패를 자랑스레 보듯 응시했다.
“이 힘은, 나를 최고의 전사 중 한 명으로 만들어 주었다.”
단순한 공격패턴은 마법방패에 의해 모두 무효화되어 소실 될 것이었다.
주인 한준혁이 말했던 대로 최고의 경로로 그의 빈틈을 찾아 몸통에 날붙이를 찔러 넣어야 했다.
괜히 공력을 크게 사용할 것 없이 기회를 잡은 순간에 내공을 폭발시켜야 했다.
그러려면 우선 빈틈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청룡은 속도를 올리기로 결정하고, 무즈르를 향해 뛰어들었다.
방어력은 뛰어나지만 그만큼 상대적으로 공격력은 뛰어난 것 같지 않았다.
방어가 곧 최선의 전략이라면 그 방어의 빈틈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청룡은 확신했다.
오직 빈틈을 찾아낸다는 것.
그 한 가지 목표만을 설정해 집요하게 쫓았다.
예상대로였다.
놈이 자랑처럼 말했던 마법방패 말고는 별달리 공격력이 날카롭지 않았다.
뛰어난 오러의 힘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공격 패턴이 단순한 데다가 무공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저 마법 도구에만 의존하고 있는 적이었다. 하지만 그 마법방패를 사용하는 방법을 워낙 잘 이해하고 있어 빈틈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을 뿐이었다.
청룡은 주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무공 초식을 버리고 무기와 하나가 되어 막을 수 없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설 것.
그것이 진정한 힘이라고.
청룡의 창날과 무주르의 마법방패가 충돌하면서 청룡은 주인이 말했던 바를 깨닫기 위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