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27화
“만약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나가려고 했다면 넌 죽었을 거다.”
나즈문이 말했다.
“…….”
“시험을 통과했으니 살려 주지. 어차피 다 죽겠지만.”
“인간은 언젠가 죽지.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할 뿐.”
나즈문이 웃었다.
“마음에 들었다. 그만 나가 봐.”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왔더니 불침번만 서 준 셈이었다.
굴욕감과 함께 안도감이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지오반니는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나즈문을 남겨 두고서 햄버거 가게 밖으로 나왔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지오반니를 향해 쉴 새 없이 번쩍였다.
보좌관과 협회의 간부들이 뛰어왔다.
“협회장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기자들의 카메라에 둘러싸인 채, 지오반니는 간부들의 걱정 어린 질문들을 받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귀환자의 위치는?”
지오반니가 질문을 던진 순간 마법주문서에 의해 열린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그 게이트를 통해 귀환자 한준혁이 나타났다.
지오반니를 비추던 기자들의 카메라가 한순간에 준혁에게 돌아갔다.
지오반니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응시했다.
준혁이 지오반니에게 걸어갔다.
“한 명도 제외 없이 모두 현장 밖으로 대피시키세요. 여기 있다간 다칩니다.”
“부디, 부탁합니다. 귀환자님.”
극진한 인사를 전한 지오반니가 곧바로 간부진들을 데리고 현장 철수를 지시했다.
기자들이 떠나지 않으려고 했지만, 철수 불복종은 협회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호통에 기자들이 어쩔 수 없이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현장을 떠나기 위해 분주해지는 동안 준혁은 햄버거 가게를 보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나즈문이라는 자요. 하루 종일 태연하게 잠만 자더군. 내 제주로 알아낸 건 그것뿐입니다.”
지오반니가 그렇게 말하곤 차량 쪽으로 돌아갔다.
차량이 하나둘쯤 떠나갈 때, 준혁은 햄버거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가게 특성상 창문에 진한 썬팅이 붙어 있어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유리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메뉴판을 보고 있는 나즈문이라는 자가 보였다.
금발 머리에, 특이한 마법공학 수트를 입은 자였다.
그런 나즈문이 거구를 일으키며 웃었다.
금빛 눈동자가 준혁을 위아래로 훑었다.
“나타나셨군.”
나즈문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준혁을 반겼다.
“아주 인상적이었어.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거든. 잊을 수가 없겠어.”
“잊게 될 거야. 어차피 죽을 테니까.”
준혁이 냉정한 눈빛으로 나즈문을 보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나즈문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먼 곳을 보며 말했다.
“경험상 순순히 말해 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안 물을 수가 없어서. 차원을 넘어 나를 찾은 이유가 뭐지? 마수 쪽은 아닌 것 같은데.”
“……임무. 그저 임무일 뿐이다.”
“마신들이 보냈나? 영혼을 팔아 거래라도 했어?”
“비슷하지. 계약을 한 건 사실이니. 영혼까지 판 건 아니지만.”
균열의 틈이 없었다면 마신들을 끝장내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새로운 차원에서 넘어오는 존재들은 오히려 준혁을 도와주는 재료였다.
“너 역시 목적이 있겠지. 나 역시 그렇게 차원을 넘었으니까.”
의식에 의해 준혁의 손아귀에 헬바인의 장검이 쥐어졌다.
나즈문이 헬바인의 장검을 보며 감탄했다.
“좋은 검이군.”
그가 입고 있는 마법장비 수트에 불빛이 들어왔다.
주변의 마력의 농도가 훨씬 더 짙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즈문이 뿜어내는 마나의 기운이었다.
결코 적지 않은 힘의 압력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준혁은 나즈문이 지금까지 상대해 온 적들과는 수준이 다르다는 걸 직감했다.
지성을 가진 존재.
아마도 그는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우주인간종 중 하나인 듯 했다.
어떤 각오로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갖춘 채 자신을 찾은 것인지에 대한 확인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귀환자. 이름은 한준혁. 마계의 신들마저 굴복시켰다지.”
말을 하는 걸 보니 마계와 접촉한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대는 너무 먼 곳을 쫓고 있다. 아니 쫓아서는 안 될, 그 선을 넘어서려 하고 있어.”
나즈문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금빛의 눈동자가 준혁의 두 눈을 쏘아보았다.
“알아서도, 발견되어서도 안 될 영역에 손대려는 자. 그게 바로 그대 아닌가?”
“그러는 넌?”
“나는 하네르 행성의 전사다. 이곳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발전된 문명이 이루어진 세계지. 나만큼이나 강한 전사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아우터 갓.”
아우터 갓을 언급하는 순간 준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나즈문의 눈동자에 두려움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우린 그들 중 하나에게 멸망할 뻔했지. 그들이 떠나지 않고 조금만 더 오래 남았더라면, 우리의 세계는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마신과의 계약이었군.”
“이득이 되는 거래를 했을 뿐이다. 마계에도 그리고 우리 하네르겐 행성을 위해서도. 이는 좋은 선택이었으니.”
“두려움에 굴복한 걸 자랑처럼 얘기하는 게 그쪽 문화인가?”
나즈문의 무거운 눈빛이 준혁을 향해 위험한 기개를 서서히 끌어올렸다.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둔한 짐승이 신을 거역할 혼란을 막으러 왔을 뿐이다.”
나즈문의 주먹에 푸른 기운이 어렸다.
“네가 포기했다고 해서, 아니 너희들이 포기했다고 해서 내가 포기할 거라고 생각하진 말아야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즈문의 눈동자에 강한 분노의 감정이 휘몰아쳤다.
나즈문이 준혁에게 달려들며 주먹을 내질렀다.
피할 수 없는 강대한 오러의 힘이 휘몰아쳤다.
준혁은 헬바인의 장검을 세었다.
나즈문의 주먹과 헬바인의 장검이 충돌했다.
그 충돌로 인한 힘에 의해 굉음이 터지며 가게 내의 물건들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고 땅이 진동했다.
뒤이어 벽에 금이 쩌저적 가더니 이내 건물이 무너짐과 동시에 준혁이 본격적인 힘을 일으켰다.
나즈문의 주먹이 뒤로 밀려나면서 무너지는 건물 콘크리트 덩어리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쿨-럭!”
신성력이 더해진 힘으로 나즈문의 주먹을 밀어냈다.
신체가 뒤로 밀려나면서 나즈문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
멸마의 서.
격노.
10배의 신성력이 폭발함과 동시에 헬바인의 장검이 나즈문을 향해 선을 그었다.
4개의 선이 그어졌고.
“……흐흡!”
나즈문의 얼굴이 상기됨과 동시에 그가 입고 있던 마법공학의 수트가 찢겨지고 부서져 나갔다.
깊은 상처가 남으면서 뒷걸음질 친 나즈문이 분수처럼 피를 뿜고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계에서 마신을 괴롭혔던 것이 준혁이었다.
인간계로 돌아와, 멸마의 서를 통해 권능을 얻은 지금, 준혁과 나즈문의 차이는 계산할 수 없을 만큼 극심했다.
“가히 경이롭군.”
나즈문의 동공이 흔들렸다.
헬바인의 장검에 베이면서 얻은 내상의 충격 때문이었다.
“강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줄은 몰랐어.”
나즈문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준혁은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나즈문은 마치,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차원을 넘어 자신을 만나러 온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도 애초에 내가 목적이 아니었던 건가?’
준혁은 나즈문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마계의 악마들이 가진 비열한 방식이 차원을 넘어서조차 이렇게까지 고집스러운 방식을 고수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지금쯤이면 나와 같은 전사가 신수의 위치를 찾아냈을 것이다.”
나즈문이 준혁을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준혁의 시간과 거리를 빼앗기 위한 나즈문 전사들의 전략이었다.
결국 지오반니가 시간을 끈 것은 결과적으로 나즈문을 도와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전사라더니, 부끄러움도 모르는군.”
“전략이지. 운명 앞에 부끄러움을 따지는 건 멍청한 전사들뿐이다.”
준혁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짧은 한숨을 뱉었다.
“그래서? 신수를 찾고 있는 네 동료가 한 명은 아니겠지?”
“아직 어린 신수라 들었다. 그런 덜 자란 신수를 죽이는 것 정도야, 알을 깨 먹듯 쉬운 일 아닌가?”
나즈문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아직 신수들은 어렸다. 나즈문과 같은 전사를 상대하기엔, 하염없이 어리고 연약한 상태.
하지만 모든 신수가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미 완성된 형태를 갖춘 신수도 있으니까.
준혁은 청룡을 떠올렸다.
그런 준혁의 표정을 보고 불안감을 느낀 나즈문이 폐허가 된 공간에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불길함을 느낀 것이다.
“괜히 거짓을 말하고 있군. 그렇지? 이 세계에서 너보다 강한 자는 없다. 신수를 지킬 만한 사람도 없지.”
“네 말대로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지?”
“믿으니까.”
“……무엇을?”
“나의 신수들을.”
“큭, 크흐하하하하!”
나즈문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어리기 짝이 없는 신수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은가? 너도 알 텐데? 신수가 나와 같은 전사들을 막을 수 없으리란 건.”
“글쎄. 그건 해 봐야 아는 거겠지. 내가 아는 나의 신수들이라면 분명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거야.”
“억지 부리지 마라!”
나즈문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네놈은 끝이다. 신수를 잃으면, 더 이상 네놈이 바라는 모든 이상도 결국 한낱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 헛소리가 될 뿐. 아무리 네가 초월적인 필멸자라 하더라도 신의 영역을 넘볼 수는 없는 것이다.”
“두렵나 보군. 뜻을 이루지 못할까 봐.”
나즈문의 흥분된 눈은 광적인 집착으로 번들거렸다.
“내가 이곳에서 죽는 만큼 너의 신수들도 죽게 될 것이다.”
“난 내 신수를 믿어.”
나즈문은 준혁의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를 보고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 됐다.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원을 넘어온 것이다.
그런데 왜 겁먹지 않는단 말인가?
자포자기한 얼굴이 아니라, 진실로 신수를 믿고 있는 듯한 얼굴을 하는 준혁을 보면서 나즈문은 혼란스러운 듯 비틀비틀 뒷걸음질 쳤다.
“어차피 넌 죽을 거다. 죽고 난 후엔 성공을 했을지 실패를 했을지 넌 알 수 없겠지.”
나즈문이 얼굴을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아직 어린 신수들……. 넌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거야.”
“네 수준을 봐선 그 어린 신수를 이길 수는 없다는 게 문제인 거지.”
“……뭐라고?”
“너희처럼 두려움에 꺾여 무릎을 꿇은 놈들에게 질 만큼 내 신수는 약하지 않아.”
준혁의 검이 섬광을 뿌리며 나즈문의 심장을 꿰뚫었다.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완벽한 일검의 찌르기였다.
“커헉……!”
준혁이 검을 뽑아내자 나즈문이 핏물을 콸콸 쏟아 내며 뒤로 넘어갔다.
벌벌 떨면서도 부서진 땅에 쓰러진 나즈문이 핏발 선 눈으로 준혁을 노려보았다.
“거짓말. 네놈은 신수를 잃게 될 것이고, 너의 모든 계획과 꿈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신수가 없으면 결국 껍데기뿐인 네놈이 아니더냐?”
“꿈을 잃고 악마와 거래한 건 너희들이지 내가 아니야. 마신이 그래 왔듯이 너 역시 망상과 함께 사라진다는 걸 잊지 마라.”
준혁의 검이 나즈문의 가슴을 베어 냈다.
새빨간 피가 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