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26화
“나갈 생각하지 마. 그럼 죽일 거야.”
금발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장난치는 표정이었지만 그가 뱉은 말은 전혀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는 내용이었다.
가뜩이나 겁에 질려 있던 여직원은 뒷걸음질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소리 내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안간힘을 다해 우는 소리를 참는 것이었다.
그녀가 입을 막은 채 울던 때, 부드럽게 문을 열고 한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협상전문가였다.
그는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양손을 들고 있었다.
“우리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온 협상전문가 물었다.
“그래.”
사내가 답하자 브루노가 의외라는 듯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기대 이상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우선 직원들부터 내보내고 둘이서 얘기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너희들 중 가장 높은 직급의 책임자를 보내. 그럼 내보내 주지.”
금발 사내가 햄버거를 먹으며 말했다.
협상전문가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가게를 나갔다.
금발 사내는 햄버거를 먹으며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여직원과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남자 직원을 쳐다봤다.
그들은 감히 사내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저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왜 다시 나와?”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오반니가 물었다.
협상전문가가 난처한 표정으로 가게를 한 차례 돌아봤다가 지오반니를 보았다.
“가장 높은 직급의 책임자를 원하고 있어요. 우리말도 할 줄 알고, 눈치도 빠릅니다. 책임자를 들여보내면 인질로 잡혀 있는 직원들을 내보내겠다는군요.”
지오반니가 대답하기도 전에 보좌관이 나섰다.
“협회장님, 다른 인물을 알아보겠습니다.”
가게를 멍하니 보던 지오반니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협회장님?”
“그만 불러. 귀 아프게.”
“책임자가 누군지도 모를 테니…….”
“책임자를 모를 테니 나 대신 죽을 사람을 집어넣자?”
“그렇다고 협회장님이 들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안 될 건 또 뭐 있어?”
“협회장님!”
보좌관이 팔을 잡았지만 지오반니가 뿌리쳤다.
“책임자 오라잖아. 나 말고 여기 책임자로 쓸 만한 사람이 있나?”
“협회장님이 위험해지면 상황은 더 걷잡을 수 없는…….”
“이미 리더보드 9위와 11위가 죽었어. 귀환자가 와야 해결이 될 상대야. 그때까지 우린 시간을 끌어야 하고. 대체 누구한테 맡겨야 하지?”
“하지만.”
“이번 문제를 해결하면 내 지지율은 올라갈 거야. 이 기회가, 곧 잘려 나갈 내 직위를 지켜 줄지도 모르지. 허니 이 정도의 책임감은 있어야 자리보전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나?”
보좌관이 더 이상 설득을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고 목숨을 걸다니요.”
“내가 아니면 누가 걸어?”
“…….”
보좌관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만약에 내가 죽으면.”
지오반니가 재킷을 벗고 시계를 풀면서 말을 이었다.
“숭고한 죽음이라고 묘비에 새겨주게.”
지오반니가 보좌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미소를 지으며 홀로 걸음을 옮겼다.
“협회장님!”
보좌관의 외침을 들으며, 지오반니는 한숨 쉬었다.
‘숭고한 죽음은 무슨. 비웃음이나 사지 않으면 다행이려나.’
지오반니가 혀를 차면서 가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그의 시선이 가게 내부를 훑었다.
거대한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은 벽에 붙어 앉아 태연하게 햄버거를 먹고 있었고 여직원과 남직원은 울면서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책임자가 오면 인질로 잡은 이 직원들을 보내 줄 거라고 했다던데. 보내 줄 건가?”
지오반니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물었다.
“대담하군. 전혀 떨지 않아. 별 볼 일 없어 보이는데도 말이야.”
지오반니가 의자를 끌고 와서 금발 사내의 맞은편에 앉았다.
“책임자라는 게 힘으로 올라오는 게 아니거든. 머리를 쓰는 자리지.”
지오반니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약속은 지켜 주시지?”
“물론.”
지오반니가 울고 있는 직원들에게 이제 그만 나가보라고 턱짓했다.
직원들은 정신없이 가게를 뛰어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침묵이 남은 가게 안에서 지오반니는 조용히 담배를 태웠다.
이미 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버린 지 오래였다.
어차피 명예로운 퇴직을 할 수 없다면 그건 자신에게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목숨을 걸고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게 거짓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날 부른 건 이유가 있을 테고. 목적이 뭔가? 말해 보게.”
“귀환자에게 지금 이곳으로 오라고 해.”
금발 사내가 햄버거를 마저 먹고 손을 털었다.
그는 한 번에 빨대를 쭉 빨아 콜라까지 모두 비워 냈다.
“원하는 대로 해 주겠네. 다른 건? 다른 건 필요한 게 없나?”
“바닥이 딱딱하군.”
금발 사내가 하품을 했다.
“매트리스를 넣어 주지. 베개와 이불까지도. 다른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만 하게.”
지오반니가 담배를 발로 밟아 끄면서 팀에 무전을 쳤다.
“귀환자는 오고 있나?”
- 예, 비행 중입니다. 도착 즉시 워프 게이트로 이동할 거라고 합니다.
귀에 낀 이어폰을 통해 보좌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 최소 10시간 정도는 걸립니다.
지오반니는 한숨 쉬었다.
10시간 동안 저 괴물 같은 놈을 이곳에 붙잡아 둘 수 있을까 싶었지만, 매트리스와 베개까지 요구하는 걸 보면 분명 귀환자가 도착하기까지 꽤 오래 걸릴 것이란 걸 미리 알고 있는 듯했다.
“10시간 정도 걸릴 것 같다는데.”
“기다리지.”
금발 사내가 무료한 표정으로 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는 오직 귀환자를 노리고 있는 듯했다.
골드 던전 앞의 사고를 제외하면 특별히 다른 일은 없었다.
일반 시민을 해치지도 않았고, 건물을 파괴하지도 않았다.
그의 목표가 귀환자라는 게 분명해진 이상, 이탈리아 자체의 위기는 벗어난 셈이었다.
“최고급 매트리스와 베개. 그리고 이불을 가져와.”
지오반니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 예?
“못 알아들었어? 최대한 빨리 구해서 이 가게 안으로 집어 넣으라고.
- 아, 알겠습니다.
무전 이후, 다시 썰렁한 침묵이 감돌았다.
“난 그럼 이렇게 여기 인질로 잡혀 있으면 되는 건가?”
금발 사내가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책임자가 아니었다면 아마 저기 바깥에서 대기 중인 놈들은 모두 내 손에 죽었을 거야.”
금발 사내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 내용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지오반니 자신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가게 안의 직원은 물론 새로운 참극이 펼쳐졌을 것이다.
지오반니는 절대로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진심이라는 걸 지오반니는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그와 직접 마주하고 있으니까.
더욱이 리더보더 두 명과 상위 헌터들을 죽여 버린 정체불명의 사내.
그의 말에 허언이 들어 있을 리 없었다.
‘꽤 긴 여행이 되겠군.’
지오반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사내를 주시했다.
결국 그의 심정 변화는 곧 재앙으로 번질 수 있음이었다.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나?”
“나즈문.”
사내가 느긋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지오반니가 보기에 그는 전혀 긴장하고 있지 않았다.
귀환자를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했다.
리더보더가 포함된 레이드 팀을 단신으로 전멸시키고 귀환자를 기다리고 있는 이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뇌리를 가득 채웠지만 지오반니는 오바하지 않기로 했다.
시간을 끌어야 하는 입장인데, 괜히 그를 자극할 수 있는 문제를 만들지도 몰라서였다.
지금 지오반니 자신의 임무는 귀환자가 도착할 때까지 그가 이 장소를 벗어나지 않고 사고가 생기지 않는 것.
그 임무 앞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 * *
이탈리아로 가는 준혁이 탄 전용기는 이제 공항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특별히 연락이 온 건 없었으니 아마 자신을 찾고 있다는 자는 여전히 가게 안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자신을 알고 있고 자신을 찾고 있다면 아마도 마계와 관련되어 있는 자일 확률이 높았다.
만약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온 자라면 그는 어떠한 특수한 힘을 받았거나 마계와 거래를 했을지도 몰랐다.
수많은 차원이 존재하는 만큼 같은 인간종이라 하더라도 그 수준은 천차만별일 테니.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을지 기대감을 품으며 준혁은 어서 전용기가 공항에 도착하기를 바라며 기다렸다.
10시간이 넘는 비행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놈을 만나 몸을 풀고 싶었다.
이미 시민들은 모두 대피시켜 놓은 상황이라 신경 써야 할 다른 문제들은 없었다.
준혁은 큐브 안에서 선우가 구해 준 워프 주문서를 꺼냈다.
이 워프 주문서를 사용하면 게이트가 형성된다.
마법진 없이 사용하는 주문서였기 때문에 엄청난 고가의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아이템이었지만 지금 같은 때엔 아주 유용한 주문서였다.
곧 착륙한다는 기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서히 하강하는 전용기.
곧 전용기의 바퀴가 지면에 닿았다.
부드럽게 안착하여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지오반니가 생각보다 용감하네.’
부패한 인간인 줄로만 알았는데, 목숨을 걸 만큼의 사명감을 가진 협회장이었다.
준혁은 지오반니를 떠올리며 전용기에서 내렸다.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제법이야.’
전용기에서 내리자마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곧장 주문서를 찢어 냈다.
1회성으로 소모하는 고가의 주문서를 통해 준혁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나즈문을 향해 게이트를 넘었다.
* * *
‘가관이군.’
지오반니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인질이랍시고 자신을 앉혀 두고선 나즈문은 매트리스 위로 단잠에 빠져 있었다.
이불을 대충 한쪽 다리에 걸쳐 둔 것이 꼭 자기 집 안방에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가 있는 건가 싶어 황당한 지오반니였다.
그는 나즈문을 지켜보다가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시간대로라면 곧 귀환자가 도착할 때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참나, 깨워 주기라도 해야 하나?’
지오반니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마치 머릿속에 알람이라도 맞춰 놓은 것처럼 나즈문이 천천히 눈을 떴다.
“으음.”
그는 졸린 얼굴로 천천히 일어나더니 지오반니를 보면서 목과 어깨의 관절을 풀었다.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가게 안에서 커다랗게 울렸다.
“슬슬 올 때가 됐나?”
나즈문의 물음에 지오반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도착할 거야.”
나즈문은 마치 운동선수처럼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귀환자와 싸울 것이란 의미가 다분한 몸풀기였다.
이미 만만치 않은 전력을 가진 자라는 걸 증명한 나즈문이었다.
과연 그와 귀환자가 격돌하면 어떤 싸움이 일어날까?
아무리 머릿속으로 그려 보아도 좀처럼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건 이제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귀환자와 대면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면 어떻겠나?”
이제 시간이 됐으니 결정을 내리라는 뜻이었다.
지오반니는 나즈문으로부터 목숨을 결정당해야 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만큼 실력 차이가 분명했으니까.
하나 지오반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눈으로 나즈문을 응시하며 답을 기다렸다.
자신의 역할은 다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