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20화
‘정체성의 혼란이었나?’
기린은 아마 오랫동안 외로운 존재로서 살아온 듯했다. 그러니 저렇게 특이한 뿔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겠지.
얼마나 외롭고 두려운 기분으로 살아왔을지 그 심정을 다 알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 그 심리가 이해가 갔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기 쉽다.
누군가 일깨워 주거나 스스로 깨닫지 않는 한 특별함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건 흔한 반응이다.
“이것 봐. 나도 꼬리 있다?”
백호가 기린을 향해 엉덩이를 흔들었다.
“꼬리를 흔들어야지, 대체 왜 엉덩이를 흔드는 거냐.”
청룡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소리 했다.
백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꼬리를 잡아 휭휭 돌리기까지 했다.
청룡이 도저히 못 보겠다는 듯 얼굴을 돌려 외면했다.
“……저런 게 같은 신수라니.”
청룡은 학을 떼고 있었지만, 기린은 크게 뜬 눈으로 백호를 보며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이내 철창 가까이 다가간 기린이 백호의 꼬리를 자세히 보았다.
마치 자신의 뿔과 백호의 꼬리를 대조해 보듯이.
준혁이 보기에 기린은 백호의 꼬리를 통해 같은 신수끼리의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한 번도 이런 동족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백호의 외양은 기린에게 있어 거대한 충격이자 또한 안도감이기도 했다.
“데려오길 잘했군.”
준혁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청룡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의 유치함이 이렇게 효과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준혁이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참았다.
“이것 봐. 너랑 나랑 똑같은 거야. 나는 꼬리. 너는 뿔!”
백호가 꼬리를 흔들어 보인 다음, 손으로 쿡쿡 찔러 기린의 뿔을 가리켰다.
그러자 기린은 뿔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백호의 말을 이해한 것이다.
준혁이 걸음을 옮겨 신수 기린 앞에 섰다. 그러자 기린은 다시 뒤로 훌쩍 물러나며 준혁을 경계하고 섰다.
기린이 크게 뜬 눈으로 준혁을 빤히 보았다
준혁은 기린의 눈동자를 보면서 신수 계약을 요청했다.
[신수 계약을 요청했습니다.]
시스템 문자와 함께 주변이 새하얀 공간으로 변했다.
신수 계약이 어떤 의미인지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기린 스스로 이 계약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나와 함께 가자. 여기 이 신수들처럼 네가 원래야 있어야 할 그 자리로.”
준혁의 말이 해석되어 들리자 기린은 깜짝 놀랐다가 준혁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내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
“그래. 우리와 함께 지내는 거다. 너에게 빛이 되어 줄 그곳으로.”
기린의 시선이 청룡에게 향했다.
묘한 기분이 신수 기린의 감정을 어지럽혔다.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신기하게 따듯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차갑고 외로운 이 철창보다는 훨씬 더 괜찮을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너를 데리러 왔어. 함께 돌아가자.”
기린의 시선이 백호에게로 옮겨졌다.
백호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있었다.
백호를 보던 기린이 준혁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기린은 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믿어 보기로 했다.
이들과 함께 있을 수 없다면 가야 할 곳이 없었다.
이대로 철창 우리 속에 남아야 했다.
이 따뜻한 기분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이 차가운 철창보다 더 나은 곳이라면, 그런 곳이 정말 존재한다면 떠나고 싶었다.
혼자가 아닌 그곳으로.
“……갈게요. 같이.”
[신수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신수 기린이 감화되었습니다.]
[신성력이 20퍼센트 올랐습니다.]
[현재 누적 신성력은 3600입니다.]
[신수 조화의 힘이 주인 한준혁의 암흑 내성을 100퍼센트 증가시킵니다.]
[회피율이 올랐습니다.]
[세트 효과로 신비한 힘이 영구적으로 깃듭니다.]
[멸마의 서가 새로운 권능을 기록합니다.]
<권능 : 점멸>
: 약 1km까지 방향 제한 없이 순간적인 이동이 가능해진다.
재사용까지 500초.
마치 최설화의 순간이동과 같은 개념의 능력이었다.
다만 마력과 신성력의 소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이를 전투에 사용한다면 마무리 추적, 혹은 회피에 쓰기 좋은 권능처럼 보였다.
평범한 상황에선 별로 쓸 일이 없지만 아우터 갓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면 상황은 어떻게 달라질지 몰랐다.
“나와라.”
끼이익!
준혁의 무리를 신수 기린이 있는 곳으로 데려온 여전사가 철창 우리의 문을 열어 주었다.
자물쇠가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기린이 겁을 먹은 얼굴로 철창 밖을 향해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맨발에 헐렁한 티셔츠 하나를 입고 있는 신수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얼마 만에 스스로의 선택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걸까?
준혁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백호가 기린에게 달려가 와락 안았다.
예고 없는 포옹을 당해 버린 기린은 크게 뜬 눈으로 먼 곳을 보며 돌처럼 굳었다.
“와하하하하!”
백호가 기린의 등을 토닥이고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가자.”
준혁이 먼저 움직였다.
이제 드워프의 성을 나가야 할 때였다.
여전사 드워프가 기린을 노려보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기린이 겁을 먹고 움츠리자 백호가 짐승형으로 변해 짖었다.
“크워어어엉!”
백호의 사자후에 깜짝 놀란 여전사가 팔을 허우적거리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시 인간형으로 변한 백호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깜짝 놀랐던 기린이 백호의 뒤에서 입을 막고 웃었다.
“저, 저 자식들이……!”
여전사가 분함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여전사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가자. 가자!”
백호가 기린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손짓했다.
기린은 기대감이 어린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백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룡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는 백치에 하나는 겁쟁이인가.”
청룡이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으며 백호와 기린의 뒤로 걸었다.
백호는 신이 난 듯 어깨동무를 한 채 춤을 추듯이 걸었다.
빳빳하게 올라간 꼬리가 기분 좋은 듯 살랑거렸다.
* * *
“멈춰라.”
드워프 전사 19명이 성문을 틀어막고 있었다.
“뭐야, 이건 또?”
준혁이 짜증 난다는 듯이 그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칼을 든 채, 비장한 표정으로 도열해 있었다.
“약속을 어기는 건가?”
준혁이 묻자 뒤에 서 있던 여전사가 준혁의 무리를 지나치며 웃었다.
“대장의 명령은 너희들에게 신수를 내주라는 거였지 드워프의 성을 나가게 해 주라고 한 적은 없거든.”
비릿하게 웃은 여전사가 동료들 사이로 들어가더니 날 선 표정으로 돌아봤다.
“너희들 중 단 하나도, 살아서 이 드워프의 성을 나가진 못할 거다.”
준혁은 순간 욱 하고 감정이 올라왔다.
“저 바보들은 학습효과라는 게 없는 건가?”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머리까지 굳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전사로서 죽는 것이 마치 정해진 사명이라도 되는 듯했다.
“청룡.”
“예, 주인님.”
“저 바보들 다 내 눈앞에서 치워.”
“그렇지 않아도 간지럽던 참입니다.”
“죽이지 마라. 그게 죽음보다 더한 수치일 테니.”
청룡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준혁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서였다.
청룡이 창을 거꾸로 쥐며 걸어나갔다.
“꼬맹이라고 봐줄 줄 알아?!”
“직접 나서지 않고 어린놈을 내보내다니.”
“역시 전사의 명예를 모르는 더러운 이방인답군.”
“꼬맹이를 죽이고 저 괴물을 처단하여 드워프의 명예를 굳게 세우리.”
준혁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면서 한숨을 뱉었다.
‘그놈의 전사의 명예는 꼭 죽어야 달성되는 건가?’
준혁은 지겨움은 참고 곧 시작될 드워프 전사들과 청룡의 싸움을 지켜보기로 했다.
“기본은 없어도 오러는 꽤 강해. 주의해라.”
“예, 주인님.”
전혀 주의 깊게 듣지 않은 듯 청룡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주인에게 함부로 말하는 놈들이 가슴에 돌을 얹은 듯 답답했던 청룡이었다.
“으아아아아!”
드워프 전사들이 죽일 기세로 청룡을 향해 도끼를 들고 뛰었다.
창을 반대로 잡아 날붙이는 없었지만, 창끝에는 고강한 내공이 실려 있었다.
준혁과 달리, 청룡의 움직임과 공격에는 용서나 배려 따위는 없었다.
청룡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비명은 없었다.
의식을 잃은 드워프 전사들이 눈깔을 뒤집으며 픽픽 쓰러졌다.
하나같이 내장이 흔들리고 오러의 기운이 체내에서 역류하는 탓이었다.
무공으로 치면 내상이었다.
창대와 도끼가 몇 번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쓰러지는 드워프 전사들의 숫자에 가속도가 붙었다.
유려하게 회전하며 가벼운 보법을 통해 급소를 찾아 찌르는 청룡의 공격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이 묻어나 있었다.
마치 바람 앞의 등불이 꺼지듯 드워프 전사들은 힘없이 쓰러져 나갔다.
청룡이 19명에 달하는 드워프 전사들을 쓰러트리기까진 채 60초.
1분이 걸리지 않았다.
창을 거꾸로 쥐고 서 있는, 청룡 아래 드워프 전사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다.
청룡이 지켜보고 있던 드워프 일꾼 하나에게 다가갔다.
“성문을 열어라.”
청룡이 말했다.
그러자 드워프 일꾼이 눈치를 보다가 허리춤의 도끼를 꺼내 자신의 목을 베려고 했다.
청룡이 깜짝 놀라며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힘을 주는 드워프를 보고 청룡이 얼굴을 굳히며 주먹을 내질렀다.
퍽!
코뼈가 부러진 드워프 일꾼이 의식을 잃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청룡이 준혁을 돌아보았다.
백호와 기린도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직접 열겠습니다.”
“그렇게 해.”
청룡이 걸음을 옮겨, 장치를 당겼다.
드르르르륵!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드워프들이 원한을 담은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준혁은 걸음을 옮기면서 자결을 시도하려고 했던 드워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명예라는 것 앞에 진지한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여인의 절개와 같은 것이 그들의 명예라고 해도, 지켜 줄 의무는 없었다.
그들의 야만적인 습성이 누군가에겐 죄악이 될 수 있듯이.
“백호, 그리고 기린.”
준혁이 엄중한 어조로 말했다.
백호는 말없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절대로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백호가 고개를 빠르게 몇 번이나 끄덕였다.
“네, 주인님.”
기린이 멍하니 있자 백호가 기린의 머리를 잡아 눌렀다.
“히히.”
백호가 눈치를 보며 웃었다.
“성장했구나. 같은 신수를 챙겨 주는 법도 알고.”
준혁이 백호의 머리를 문질러 주었다.
“히히. 제가 형이니까요. 청룡 형아처럼.”
무슨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지내면 그만이겠지.
준혁은 그렇게 생각하며 드워프의 성문을 통과했다.
하늘은 석양에 의해 불이 번진 듯했다.
천리안을 보자 지도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돌아가기 전에 잠깐 들러야겠다.”
준혁이 3시 방향을 보며 말했다.
황량한 벌판이라 청룡은 의아한 표정으로 준혁을 보다가 시선을 따라갔다.
“먼저 가서 알아볼까요?”
“천천히 가자. 시간은 충분하니까.”
돌아가는 어비스의 문은 언제든 다시 열 수 있다.
누군가 따라 들어오지 않을 만한 장소에 열기만 하면 되는 일.
그보다 중요한 건 어쩌면 지도가 가리키는 것이 신물일지도 몰랐다.
시스템 역시 멸마의 서가 만든 어비스에 반응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