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17화
준혁은 지도에 보이는 드워프의 성과 현재의 위치 간 거리를 계산 중에 있었다.
본래 신물을 찾기 위해 시간을 할애할 생각이 있었지만 어비스를 통한 새로운 차원은 지구와 전혀 다른 시간 개념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 한시라도 빨리 신수를 데리고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상황이 펼쳐졌다.
[더 월드가 새로운 차원 진입에 적응했습니다.]
[현재부터 지구와 새로운 차원의 시간이 동일하게 흐릅니다.]
[차원이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더 월드의 시스템은 스스로 학습하고 성장하기라도 하는 건가?
그것도 차원 수준의 문제를 해결할 만큼?
애초에 더 월드 시스템이라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시스템이긴 했으나 이번 더 월드의 업데이트 사항은 꽤 준혁의 생각이 많아지게 만들었다.
시스템은 누가 만든 것일까?
마치 우주의 한계를 질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답이 없는 우둔한 질문.
하지만 언제나 답없는 질문에서 과정이 이루어지고, 해답을 찾아내기 마련이었다.
역사가 그래 왔듯이 준혁 역시 본능적으로 답을 묻고 있었다.
툭. 투툭.
빗물이 떨어져 내렸다.
본래라면 빠른 속도로 드워프의 성을 찾아가야 했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시간의 흐름을 계산할 수 있게 됐으니까.
“으아아! 비다! 비!”
백호가 질색하는 얼굴로 팔을 들었다.
물을 싫어했기 때문에 날마다 목욕을 하는 건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더욱이 빗물이라니!
백호는 소름돋는 팔을 북북 문질렀다.
비가와서 그런지 날씨도 추워지는 듯했다.
“쉬었다 가자.”
준혁이 먹구름이 지는 하늘을 흘긋 올려다보곤 말했다.
근처에 비를 피할 만한 동굴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빗줄기가 더 강해졌다.
동굴 밖으로 쏟아지는 빗물이 보였다.
“청룡, 널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네.”
준혁이 나뭇가지를 꺾어서 들어오는 청룡을 보며 말했다.
청룡이 작게 웃으며 불을 피울 수 있도록 나뭇가지를 한 곳으로 모았다. 그러더니 삼매진화의 힘으로 나뭇가지를 몇 번 만지자 불이 붙었다.
입김을 후후 부니 오래 걸리지 않아 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능숙한 불 피우기 솜씨였다.
“오오. 따뜻하다, 따뜻해.”
백호가 불 앞에 앉으며 싱글벙글 웃더니 좌측에 앉은 준혁과 우측에 앉은 청룡을 번갈아 보았다.
“주인님! 청룡 형아는 처음에 어떻게 만났어요?”
“찾아갔지. 지금 이렇듯 새로운 신수를 찾는 것처럼.”
“우리가 신수를 찾으면, 우리랑 같이 캐슬로 가요?”
준혁이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래야지.”
“신난다! 새 친구가 생기는 거네요. 히히.”
준혁이 말없이 웃고 있는 백호를 지켜보았고 청룡은 그저 어른거리는 불빛을 보았다.
“백호야.”
준혁이 불렀다.
“네?”
“싸움이 날 거다.”
“마수 잡아요? 마수가 우리 친구를 데리고 있나요?”
“어쩌면 마수랑 다를 바도 없겠지.”
진심이었다.
결국 마수도 새로운 영역이 필요하기에 인간계를 침범하는 것이다.
타의에 의한 명령이라 할지라도, 결국 필요에 의한 침략이다.
그렇게 서로 뺏고 지키는 싸움의 일환.
돌이켜 보면 생명이란 그런 것이었다.
“청룡, 이번 싸움에는 끼지 않는 게 좋겠다.”
“백호 때문입니까?”
“어비스에 온 것만으로 충분해. 아직은 아닌 것 같아.”
지금까지 한 번도 마음이 약해진 적은 없다.
마계에서도 그랬고 인간계로 돌아온 후에도 그랬다.
하지만 도저히 드워프와의 싸움을 백호에게 보여 주진 못할 것 같았다.
“왜? 왜? 뭔데? 왜 나 빼는데? 나도 껴 줘!”
앞서는 욕심이다.
비명과 죽음이 난무하는 현장을 보여 주기엔 백호가 아직 너무 어렸다.
청룡이 백호의 어깨를 잡아 강제로 앉혔다.
“주인님.”
청룡이 덤덤한 목소리로 준혁을 불렀다.
불빛을 보던 준혁이 청룡을 보았다.
청룡이 아직 타지 않은 여분의 나뭇가지 하나를 내밀었다.
“……?”
준혁이 의아한 시선으로 청룡을 보자 청룡이 쓰게 웃었다.
“여기까지 와서 경험을 쌓지 못하는 건 아쉽지 않겠습니까? 번거롭더라도 조금 돌아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준혁의 시선이 나뭇가지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준혁은 청룡이 지금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그 생각은 못 해 봤네.”
준혁이 헛웃음을 흘렸다.
백호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뺨을 부풀렸다.
“으아아, 괴로워어어. 몬데에에에.”
백호가 바닥에 벌렁 누워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준혁은 동굴 밖으로 보이는 빗줄기를 보며 쓰게 웃었다.
“하하.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아무래도 살육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비가 그치면 제가 하나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엘프족이 아쉬워하겠군.”
“그들의 일입니다.”
준혁은 작게 웃으며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청룡.”
“예?”
“네 한마디에 수많은 목숨이 사는구나.”
“백호가 아니었다면, 저 역시 날붙이부터 들이밀었을 겁니다.”
“날붙이가 몬데?”
백호가 반들반들한 피부로 가득한 얼굴을 청룡에게 내밀었다.
청룡이 손바닥으로 백호의 얼굴을 쭉 밀어냈다.
백호가 팔짱을 낀 채 양반다리를 하고선 청룡을 노려봤다.
청룡은 그저 말없이 여분의 장작을 불안으로 밀어 넣을 뿐이었다.
* * *
비가 그쳤을 때쯤 동굴 밖으로 나왔다.
어비스를 넘어 이렇게 여유롭게 다닐 수가 있다는 게 낯설기도 했고 편안하기도 했다.
“기후 변화가 심한 듯합니다.”
청룡이 날씨를 살피며 말했다.
꽤 길어질 것 같던 비는 생각보다 일찍 그쳤고 하늘은 언제 빗물을 뿌렸냐는 듯 맑았다.
지도에 의하면 여기서부터는 요정의 숲 바깥쪽이었다.
즉 이 길을 통해 드워프들이 침략한다는 얘기였으니 여기서부턴 다른 존재를 만날 수도 있었다.
운이 좋다면 드워프를 만날 수도 있을 테고.
준혁은 이동하면서 천리안을 봤다.
요정의 숲에서 드워프의 성까지는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숲을 벗어나 황량한 벌판을 지나면 곧 드워프의 성이 나타난다.
요정의 숲과 벌판의 경계 부근에서, 청룡이 창을 휘둘렀다.
서걱-!
튼튼한 나무의 일부분이 잘려 나갔다.
창날로 슥슥 나무 대를 다듬으니 금세 튼튼한 목검이 만들어졌다.
“우와! 청룡 형아. 이거 어떻게 만든 거야?”
청룡은 대답하지 않고 준혁에게 가서 직접 만든 목검을 건넸다.
준혁이 목검을 받아 들고, 휘둘러봤다.
꽤 묵직한 소리가 났다.
“장인 솜씨가 따로 없는데?”
청룡이 희미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과장 된 칭찬이 아니었다.
제작 시간을 생각하면 대충 만든 것 같아도 목검의 완성도는 일품이다.
이 목검에 마력을 주입하면 평범한 목검은 웬만한 것으로는 부러트릴 수 없는 강한 무기가 된다.
“나도 만들어 줘. 나도오오오.”
백호가 다리에 매달렸지만, 청룡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리를 털었다.
백호가 힘없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 * *
벌판을 가로지르자 저 멀리 드워프의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와, 집 엄청 크다. 그치 청룡 형아.”
청룡은 말없이 드워프의 성을 응시했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성이었지만 저 담을 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준혁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가 오는 건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준혁이 말했다.
작전은 간단했다.
성을 넘고 신수를 찾아, 드워프 성을 나오는 것.
단지 그 과정이 꽤 시끄러울 것이란 것 정도뿐이다.
“경계병이 보이지 않는군요.”
아주 먼 거리였지만 청룡은 성의 외벽 곳곳을 디테일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위협적인 적들이 없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엘프들은 이미 자신들의 적수가 아니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
준혁은 천리안을 봤다가 주변을 살펴봤다.
엘프가 아닌 다른 종족의 흔적은 없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청룡이 만들어 준 목검을 어깨에 툭툭 치면서 걷던 중, 드워프 성과 일정 거리가 가까워지자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을 보자 투석기를 쓴 건지 커다란 바위 하나가 날아오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정확도가 굉장히 높다.
바위는 준혁과 청룡, 그리고 백호가 있는 곳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청룡이 살짝 자세를 낮추더니 땅을 딛고 뛰었다.
허리를 비틀며 상체를 돌린 청룡이 돌려차기로 날아온 바위를 산산조각냈다.
발차기 한 방에 바위가 사방으로 깨져 나갔다.
“와아아아아. 청룡 형아 최고오오!”
백호가 박수를 짝짝 쳤다.
청룡의 이마에 혈관이 불쑥 올랐다.
마치 서커스를 보러 온 것처럼 구는 백호 때문이었다.
“음?”
준혁이 성벽의 위쪽을 보았다. 몇몇 경비들로 보이는 이들이 이쪽을 향해 떠들고 있었다.
준혁은 여유롭게 드워프 성을 향해 걷는 중이었고 그렇게 드워프 성과 가까워지는 동안 바위 몇 개가 더 날아왔다.
그럴 때마다 청룡이 하나하나 준혁에게 향하는 바위를 모두 박살냈다.
“청룡 형아 댑따 멋있다. 바위를 이렇게 막. 와아.”
백호가 따라 하다가 철퍽 넘어졌다. 재빨리 일어나면서 머쓱해진 얼굴로 준혁의 옆에 바짝 붙었다.
“청룡, 백호를 지키면서 천천히 따라와라.”
“예, 주인님.”
준혁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이내 가볍게 뛰기 시작하다가 속도가 서서히 빨라졌다.
성벽 위로, 갑작스레 수십에 달하는 드워프들이 나타나 준혁을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화살 따위는 전혀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엘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실력이었던가?’
슈슈슈슈슈슈슛!
준혁을 향해 화살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마력의 장막을 펼쳤다.
소나기처럼 쇄도하던 화살들이 저마다 마나의 저항에 의해 부러지고 꺾여 나가거나 녹아내렸다.
드워프들이 당황하는 사이 준혁은 이미 도약 후 드워프의 성벽을 한 호흡에 넘어서고 있었다.
놀란 드워프들이 화살을 쓰려다 공격이 통하지 않음을 깨닫고 저마다 활을 버리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도끼를 꺼내 들었다.
사방에서 준혁을 둘러싼 채 호전적인 눈빛으로 도끼를 치켜들었다.
준혁의 허리 정도까지 밖에 오지 않는 작은 키의 드워프들이 생각보다는 빠른 속도로 준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대화도 없이 이렇게 공격부터 하는 종족들은 처음이었다.
“터프하긴 한데.”
거세게 휘두르는 도끼를 가볍게 피해 다니면서 준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엘프들이랑 크게 다를 것도 없군.”
준혁의 말에 드워프들 몇몇의 얼굴이 굳어졌다.
퍽! 퍽! 퍽! 퍽!
청룡이 만들어 준, 목검이 드워프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살육에 너무 익숙해져서 이렇게 몽둥이로 싸울 생각을 못 했다.
현격한 실력 차이라면 굳이 죽이지 않고도 충분히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조금 번거롭긴 해도 이들이, 반드시 죽여야 할 악마와 같은 종류는 아니었으니까.
“크윽-!’
“으윽!”
“커흑.”
사방에서 신음이 빗발쳤다.
준혁은 다들 하나같이 어디 한 쪽을 붙잡고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드워프들을 훑어보았다.
그 사이 청룡은 백호를 옆구리에 낀 채로 성벽의 난간에 서 있었다.
“역시 주인님은 뭔가 달라.”
백호가 청룡의 허리에 끼인 채로 주인을 향해 감탄했다.
그러자 청룡이 준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