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16화
요정의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동안 준혁은 주변이 잘 정돈되어 있는 걸 느꼈다.
누군가 잘 지나다닐 수 있도록 수풀을 쳐 내 두기도 했고, 땅은 부드러웠으며 사방은 마나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마치 지나치게 습한 것처럼 축축함을 느낄 만큼, 마나의 농도가 짙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수련을 한다면 높은 수준에 이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오러의 수치에 반해 요정들의 실력은 이상하리만큼 보잘 것 없었다.
준혁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엘런을 계속 따라갔다.
한참을 걸어가자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엘프들이 사는 곳이라 그런지 평범한 건물들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집은 아주 높은 나무 위에 지어져 있었다.
나뭇가지와 연결된 집은 작지만 아늑해 보였다.
아마도 안전을 위해 나무에 집을 지었거나 요정의 숲이 가진 오랜 전통이었을 수 있었다.
“오오. 집이 나무에 있어.”
백호가 신기하다는 듯 엘프들의 집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엘프들의 삶이 녹아 있는 곳으로 들어가자 하나둘 숨어 있던 엘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부터 청년에 중년,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엘프들은 하나같이 경계감이 가득한 얼굴로 엘런과 함께 온 준혁의 무리를 내다보았다.
엘런이 축 처져선 죄인의 얼굴을 한 채 서 있자 사람들이 하나둘 가까이 몰려들었다.
“엘런?”
“저들은 누구지?”
“이방인을 데려온 거냐?”
모여든 엘프들이 술렁거렸다.
청룡은 엘프들을 경계했고, 준혁은 몰려든 엘프들 사이로 우두머리가 누구일지를 찾았다.
잠시 후, 지팡이를 짚은 등이 굽은 노인이 걸어 나왔다.
“엘런, 어떻게 된 일이냐?”
엘런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노인을 보았다.
“촌장, 이방인이 신수를 찾고 있어.”
엘런이 비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방인!”
노인이 눈을 크게 떴다.
엘프들도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다시 엘프들이 술렁였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던 엘프 촌장이 지팡이를 바닥에 쿵 찍었다.
“조용!”
촌장의 외침에 술렁이던 소리가 뚝 그쳤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촌장이 준혁에게 걸어갔다.
“신수를 찾는다고 했소?”
“그렇습니다.”
준혁이 예의를 갖춘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촌장이 준혁을 위아래로 훑더니 근처에 있던 어린 여자를 손짓으로 불렀다.
“손님을 응접실로 안내해라.”
“이들을 받아 주신단 말입니까?”
한 엘프가 소리쳤다.
“시끄럽다!”
촌장이 끼어들지 말라는 듯 소리쳤다.
그러자 사내가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닫으며 몸을 돌렸다.
“어서 안내해라.”
어린 엘프가 마지못해 준혁의 무리를 이끌었다.
그들이 응접실로 가는 동안, 젊은 사내 엘프들이 촌장에게 모여들었다.
“저들이 누군인지 알고 받아 준단 말입니까?”
“당장 쫓아내야 합니다.”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요. 이방인이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입 다물어!”
촌장이 화를 냈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엘런 녀석이 이방인을 발견했다면 즉시 싸움을 걸었을 게다. 이 녀석이 가끔 실수는 할지 몰라도, 엘프족의 명예까지 버릴 놈은 아니야. 그런 놈이 이런 얼굴로 이방인을 데려왔다면 필시 이유가 있을 터. 아니 그러하냐?”
촌장이 엘런을 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엘런에게 향했다.
엘런은 주눅 든 얼굴로, 침울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상대였습니다.”
엘프들이 영문 모를 표정이 됐다.
엘런이 계속 말을 이었다.
“일대일 승부에서 패했고. 엘프들이 화살을 쏘았으나. 털끝도 스치지 못했습니다.”
엘프들이 경악하며 침음했다.
“네 말은 저들에게 우리 엘프 전사들의 공격이 통하지 않은 것은 물론, 엘프들을 공격하지도 않은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엘프들이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이 됐다.
걱정과 두려움이 몰린 표정들이었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말 거라. 우릴 어찌해 볼 생각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나오진 않았을 테니.”
“…….”
“내가 얘기를 나누어 보겠다. 다들 오후 일과나 준비하거라.”
촌장이 그렇게 정리를 하곤, 응접실로 향했다.
여전히 걱정 어린 얼굴로 촌장을 지켜보던 엘프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하나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엘런만이 울적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 * *
응접실은 아주 거대한 나무를 파서 만든 공간이었다.
천장이 꽤 높았고,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찻잔과 같은 평범한 집기들이 있었다.
준혁과 청룡이 자리에 앉고, 백호는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며 내부를 구경했다.
“얌전히 앉아라, 백호.”
눈을 감고 있던 청룡이 한 소리 했다.
백호가 입술을 삐죽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백호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청룡의 옆에 앉았다.
잠시 후, 촌장이 휘장을 걷으며 나타났다.
어린 엘프가 미리 놓아둔 찻잔이 있었다.
촌장이 주전자 같은 것을 들고, 잔을 채워 주었다.
백호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준혁이 먼저 마셨고 뒤이어 청룡도 차를 마셨다.
백호는 냄새가 이상하다며 코앞으로 손을 부채질했다.
“본래 저희 엘프들은 저희 종족을 제외한 이방인들의 침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촌장이 말을 꺼내며 준혁의 맞은편에 앉았다.
“한데 상황을 보니 범상치 않은 분들인 것 같군요. 신수를 찾는 것도 그렇고.”
촌장은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 만연한 얼굴이었다.
“신수가 이곳에 있습니까?”
준혁이 노골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촌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있었지요.”
“있었다는 건…… 지금은 없다는 뜻이군요.”
촌장이 힘 빠진 얼굴을 끄덕였다.
“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 저의 선대께서는 천사로부터 신수의 알을 받게 되었지요. 아버지 대에 이르기까지 아주 신성하게 모시고 보호했습니다.”
준혁은 그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집중했다.
“그리고 이내 알에서 신수가 껍질을 깨고 나왔지요.”
“어떤 신수였습니까?”
“이마에 뿔이 달린 아주 예쁜 말을 닮은 작디작은 아기 신수였지요. 선대께서 이르길 천사가 기린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하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던 거군요.”
“신수 기린은 신비한 힘이 있었지요. 노래를 할 때마다 신기한 변화가 생기곤 했습니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기린이 노래할 때면 힘이 솟았으며 마음이 어두워진 자는 밝아지기까지 했으니, 평화와 사랑을 가져다주는 신비로운 천사의 선물이라, 우리 엘프족은 그리 여겼습니다.”
“…….”
“그렇게 신수와 함께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전쟁이 났습니다. 드워프의 침략이었지요. 자원이 고갈된 드워프가 영역을 넓히기 위해 요정의 숲을 찾은 겁니다.”
“전쟁에서 패했고. 그 이유로 빼앗긴 겁니까?”
“드워프는 지금도 여전히 소중한 나무를 베어 가고 있지요. 우리의 허락도 없이 말입니다.”
결국 힘이 없어 신수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여전히 침략을 당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나쁜 놈들!”
백호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려치며 말했다.
백호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촌장이 그런 백호를 잠시 놀란 눈으로 보다가 피식 웃었다.
“저 아이를 보니, 꼭 제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기린을 보는 듯합니다. 어째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촌장이 백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요.”
“……?”
“이 둘 모두 신수이니.”
준혁의 말에 노인이 벙찐 얼굴로 입을 벌렸다.
“바,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둘 모두 신수입니다. 제가 데리고 있는.”
준혁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촌장은 턱이 빠질 것 같은 얼굴로 청룡과 백호를 번갈아 보았다.
“그, 그럴 리가. 짐승이 아닌 모습을 하고서 어찌.”
떨리는 눈동자로 청룡과 백호를 빤히 보던 촌장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젖은 눈동자에서 곧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아아, 느껴집니다. 그때 기린이 보여 주었던 그 느낌이 이 둘에게서도 느껴집니다.”
촌장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얼굴로 청룡과 백호를 보고 있었다.
“할부지 왜 울어?”
백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고, 청룡은 팔짱을 낀 채 외면하듯 얼굴을 돌렸다.
“어찌 신수들과 함께 있는…… 대체 당신은 정체가 무엇입니까?”
촌장이 경악에 물든 눈으로 준혁을 보며 물었다.
“설명하자면 길어서. 드워프가 있는 곳을 알려주시면 신수를 데리러 가야겠습니다.”
촌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숫자는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으며, 무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주인을 의심하는 건가?”
청룡이 살기를 내뿜었다.
“청룡.”
준혁의 눈치를 주자 청룡이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알아서 할 테니, 위치만 알려 주시죠.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촌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셋이서 이 요정의 숲을 무력화시킨 이들이 드워프가 무서울까.”
촌장이 느릿하게 일어섰다.
“아주 호전적인 이들이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 신수를 데려가려면 그들 모두를 죽여야 할 것이외다. 성공한다면 우리로선 행운이군. 원수의 빚을 대신 갚아 주는 것이니.”
촌장이 서랍을 열더니 지도 한 장을 꺼내왔다.
아주 얇고, 작은 지도였지만 지도는 의외로 굉장히 디테일했다.
어차피 천리안이 있으니 얼추 방향만 알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 지도라면 그 이상으로 도움이 될 듯했다.
준혁이 지도를 갈무리했다.
“감사했습니다.”
준혁이 먼저 응접실을 나갔다.
촌장이 놀란 얼굴로 휘장을 걷고 나가는 준혁을 쳐다봤다.
청룡이 뒤따라 나갔고.
“할부지, 안녕. 잘 지내!”
백호가 히히 웃으며 나갔다.
준혁은 신수들을 데리고 지도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엘프들이 드워프의 성으로 떠나는 준혁의 무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촌장도 응접실에서 나왔다.
그런 촌장 주변으로 젊은 엘프들이 다가왔다.
“무슨 대화를 하셨습니까?”
“저들이 어디로 가는 거죠?”
촌장이 입을 벌린 채 준혁을 지켜보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면 큰 변화가 일어날 지도 모르겠구나.”
“예?”
“운명을 피할수야 없겠지만.”
영문 모를 표정으로 지켜보는 젊은 엘프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촌장은 지난 과거와 역사를 되짚는 눈으로 준혁이 떠난 방향에 눈을 떼지 못했다.
* * *
지도에 의하면 드워프들은 성안에 살고 있었다.
즉, 그들을 만나려면 수성중인 공성을 넘어야 한다는 건데 별달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촌장의 말대로 신수를 구하려면 그들을 모두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을 뿐이었다.
“청룡.”
“예, 주인님.”
“아마, 이번에 만나는 부족들은 엘프들과는 조금 상황이 다를지도 몰라.”
“명령만 기다리겠습니다.”
“그러기엔 달고 온 혹이 너무 크지.”
준혁이 백호를 보았다.
청룡의 시선이 준혁을 따라 백호에게로 넘어갔다.
“이대로라면 백호는 오늘 꽤 충격을 먹을지도 모른다.”
백호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준혁이 어떤 뜻으로 어비스에 백호를 데려왔는지, 청룡은 그제야 그 뜻을 알아차렸다.
청룡 역시 백호가 아직은 어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도 육체도.
하지만, 조금은 빨리 눈을 떠야 한다는 걸.
주인 한준혁이 말하고 있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고 있는 청룡이었다.
하여 청룡은 평소와는 다른 눈빛으로 백호를 보았다.
안쓰러움과 걱정이 섞인, 청룡에게선 보기 드문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