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15화
“신수의 존재를 어떻게 알게 된 건지는 모르나 우리에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가 말하는 건 분명했다.
어떤 이유든 더 이상 숲의 진입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신수는 천사들이 보호하라고 어비스 세계에 숨겨 놓았다.
그들을 지키는 이들은 존재하기 마련일 것이니 순순히 내어놓지는 않으리라.
경험상 백호와 청룡도 그랬으니 이번도 다르지 않을 듯싶었다.
“이건 대화가 아니야. 범법 심판이지. 분명히 해 둔다. 우리를 받아들이고 대화의 장을 열어라.”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면?”
“전부 죽는다.”
준혁이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뒤이어,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난 엘런 카이트다. 네 이름이 뭐지?”
“한준혁.”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이군. 좋다, 이방인. 나와 1:1 검술에서 이긴다면 너를 우리 마을로 초대해 주지. 어떤가?”
엘런이 얇은 검을 준혁에게 겨누며 도전장을 내밀었다.
준혁은 옅게 웃으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좋은 제안이네.”
청룡에게 백호를 데리고 잠시 뒤로 빠져 있으라고 명령했다.
청룡은 나무 위의 엘프들을 경계하며 백호를 잡아끌었다.
그리곤 한 발 뒤로 물러섰다.
- 주인님께서 대결하신다. 나서지 마라.
청룡의 전음에 백호가 깜짝 놀랐다.
어떻게 말로 소리를 내지 않고 말을 전달하는지 신기하여 백호는 눈이 빠질 것 같은 얼굴로 청룡을 올려다보았다.
- 집중해라, 백호.
백호가 넋 놓고 청룡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준혁과 엘프 엘런과의 대결이 곧 시작을 앞두고 있었다.
* * *
휘릭!
준혁이 검을 화려하게 회전시키며 손목을 풀었다.
“풋, 푸하하하하! 대체 뭐냐? 그 허접한 손놀림은?”
“……?”
준혁이 의아하게 엘런을 쳐다봤다.
그는 눈물까지 흘려 가며 웃고 있었다.
“감히 요정의 땅을 밟은 놈이길래 기대했더니. 순 얼치기 이방인이었구나. 하하하하!”
엘런이 목젖이 보일 정도로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평범해 보이지만 검의 경지라는 것은 단순히 보이는 것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래 전에 준혁이 마계에서 깨달은 사실이었다.
때문에 가급적 적의 수준을 예측하거나 가늠하지 않는다.
그저 가장 완벽한 일검을 긋기 위해 노력할 뿐.
때문에 준혁이 보기에 엘프 사내는 그다지 강할 것 같지 않았다.
저런 자들은 보통 기본도 되어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휴우, 간만에 정말 많이 웃었어. 덕분이야.”
엘런이 껄렁하게 준혁을 향해 검을 까딱였다.
“어서 덤벼봐. 얼치기 이방인.”
준혁이 망설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엘런에게 다가갔다.
검을 축 늘어트린 채, 무방비의 상태로.
“건방진……!”
엘런이 눈썹을 꿈틀 움직이며, 검을 찔렀다.
까-앙!
준혁이 헬바인의 장검을 위로 올려쳤다.
작은 불꽃과 함께 엘런의 얇은 검이 반으로 뚝 부러졌다.
잘려 나간 검의 조각 일부가 허공에서 회전하더니 바닥으로 푹 박혀 들어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상황에 엘런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어?”
엘런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부러져 나간 검을 내려다보았다.
준혁은 더 이상 공격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넋이 나가 있는 녀석을 베어 봐야 의미가 없어서였다.
승부는 끝났다.
“이, 이럴 수가. 내 명검 하이바른이.”
부러진 칼을 잡고 있는 엘런의 손이 아주 가늘게 떨렸다.
“이제 대화의 장을 열 수 있나?”
준혁이 물었다.
“다, 다시! 이건 반칙이다! 무기가 없는 척 다가오다가 급습이라니?”
준혁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준혁이 다시 뒷걸음으로 물러나 주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준혁을 보며 숨을 몰아쉬던 엘런이 나무 위로 소리쳤다.
“검을 다오!”
동료 중 한 명이 검집을 던져 주었다.
엘런이 제 딴에 멋진 동작으로 검을 낚아챘다.
그사이 백호는 팔짱을 끼고 미간을 팍 찌푸렸다.
표정은 떫은 감을 씹고 있는 듯했다.
“청룡 형아? 이거 계속 긴장해야 돼?”
청룡이 백호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까불지 말고 자세를 정돈해라.”
백호가 마지못해 푯정을 풀면서 엘런을 노려보았다.
백호가 보기엔 엘런은 황당한 자였다.
도저히 이해 가가지 않는 멍청한 엘프라고 백호는 생각했다.
그사이 준혁은, 여유롭게 서서 엘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완전히 승복시켜 요정의 숲 깊이 출혈 없이 들어가야 했다.
“최선을 다해라. 변명대지 않도록.”
준혁이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건 채로 말했다.
엘런의 얼굴이 확 찌푸러졌다.
모욕과 수치심으로 물든 얼굴은 잔뜩 붉어지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도 좁혀지지 않을 실력 차이였다. 거기에 감정까지 흔들렸으니 현재 엘런은 칼을 잡아서는 안 되는 상태였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검을 쥔 것이다.
준혁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엘런을 응시했다.
“……방금 전은 실수였다. 이번은 다를 것이다. 네놈의 심장을 갈라주지.”
아니,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미 감정만큼이나 자세부터 망가져 있었다.
어서 검으로 실력을 깨닫게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하아앗!”
엘런이 비장함을 담아 준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캉!
준혁이 가볍게 들어오는 칼을 쳐내자 검이 빠르게 튕겨져 나갔다.
“흡-!”
엘런이 숨을 삼키며 뒤뚱거리듯 걸었다.
백호가 그 모습을 보고 풉! 하고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청룡의 강한 시선에, 백호는 양손으로 자신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백호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볼품없게 자세가 무너져 버린데다 백호의 웃음까지 사게 된 엘런은 분노에 의해 목에 솟은 혈관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대 엘프 가문의 전사 엘런 카이트는 지금의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분명 보잘것없는 실력의 소유자라 생각했다.
검을 쓰는 것이 어설퍼 보였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 거지?
엘런은 준혁을 보며 거대한 벽을 느꼈다.
지난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엘프족의 몰락이 마치 화재가 난 것처럼 새빨간 풍경으로 눈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엘런은 뒤틀린 표정으로 준혁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전력의 속도로 준혁을 향해 파고든 엘런의 검이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동안 준혁은 엘런의 검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루할 정도로 느린 검속.
단순하기 짝이 없는 그저 아주 느린 일검에 불과했다.
준혁이 칼을 쳐 냈다.
까앙!
마치 배트가 야구공을 때린 듯한 소리와 함께.
파르르르르륵!
엘런의 얆은 검이 마치 묘기를 부리듯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하늘로 솟구쳤다.
엘런은 멍한 얼굴로 솟아오르는 자신의 검을 올려다보았다.
파드득!
풀잎과 나뭇가지를 잘라 낸 엘런의 칼이 준혁과 엘런 사이로 뚝 떨어져 내렸다.
푹! 하고 땅에 박혀 들어간 검.
그 검을 내려다보는 엘런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실수가 아닌, 명확한 실력 차이임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상대가 안 되는 적이라는 걸 깨달은 엘런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런 실력자가 나타난다니?
이는 엘프 숲의 재앙이었다.
“쏴, 쏴라……! 이자를 막아라! 이 자는 숲의 재앙이다. 어서 공격해!”
나무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엘프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죽이지 마라.”
준혁이 명령했다.
그와 동시에.
핑!핑!핑!핑!핑!핑!핑!핑!
활시위가 당겨졌다.
수십 개의 화살이 준혁. 그리고 청룡과 백호를 향해 날아갔다.
슈슈슈슈슉!
쇄도하는 화살들.
하나 준혁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날아오는 화살은 준혁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모두 부러지면서 방향을 잃고 꺾여나갔다.
반면 청룡은 가볍게 짧은 점프를 하며 몸통을 회전하면서 창을 연이어 휘둘렀다.
채채채챙!
청룡의 창날에 막힌 화살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나무 위에 있던 엘프들은 하나같이 얼빠진 표정으로 준혁과 청룡을 보았다.
이런 식으로, 이렇게 쉽게 화살을 막아 내는 것을 보자 그들은 전의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화살을 쳐 낸 이방인들의 실력을 지켜본 엘런은 벌벌 떨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 말도 안 돼.”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체 어떤 인간이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저렇게 무용지물로 만든단 말인가?
자신들의 힘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실력자들이었다.
저벅. 저벅.
준혁이 발길을 옮겨 좌절하여 쓰러져 있는 엘런의 앞으로 다가갔다.
엘런의 얼굴에 지는 그림자.
그림자에 물든 엘런은 좌절한 표정으로 준혁을 올려다보았다.
“해치지 않을 테니 날 너희들의 우두머리에게로 안내해라.”
“…….”
“내가 나쁜 마음이었다면 진즉 다 죽이고 너를 고문했겠지. 예우를 해 주는 만큼, 너희들도 예의를 갖춰라.”
준혁이 화해의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엘런은 굵은 침을 꿀꺽 삼키며 준혁의 손을 보다가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나무 위의 엘프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엘런은 눈살을 팍 찌푸렸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
여기서 대항하고자 다시 덤벼든다 한들 전멸을 피할 수 없음을 엘런은 이미 실력 차이로 명확히 깨달은 상태였다.
때문에 엘런은 마지못해 준혁의 땅을 짚고 일어섰다.
“……따라와라.”
엘런이 축 처진 어깨로, 앞장섰다.
동족들을 화살조차 가볍게 막아 내는 자들이었으니 엘런으로서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 * *
“청룡 형아. 진짜 멋있었어!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슈슈슉 날아오는 화살들을 이렇게 이렇게! 막! 응? 넘 멋졌다고. 나도 하고 싶다. 나도!”
청룡이 짧게 혀를 찼다.
“실력도 없는 게 눈만 높아서는.”
청룡의 차가운 대꾸에 백호가 입술을 삐죽였다.
“칫, 무슨 말만 하면 맨날 뭐라 그래.”
“눈앞의 성취에 집중해라. 남의 것을 탐내는 추악함이 가슴에 남는다면.”
청룡이 앞서가는 엘런을 향해 턱짓했다.
“너도 저렇게 된다.”
축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앞서가는 엘런의 뒷모습을 보면서 백호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뭐, 뭐?! 내, 내가 저렇게 된다고?”
엘런 카이트.
백호는 훗날 자신이 저렇게 형편없는 엘프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오금이 저리는 듯 자신의 양쪽 어깨를 붙잡고 달달 떨었다.
그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미래였다.
“안 돼, 절대 안 돼!”
백호가 눈을 질끈 감으며 청룡의 등에 폴짝 업혔다.
찰싹 달라붙은 백호 때문에 청룡의 얼굴이 사납게 굳어졌다.
“내려. 집어던지기 전에.”
백호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애벌레처럼 청룡의 등에서 내려왔다.
백호는 앞서가는 엘런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주인님의 지도아래 던전에서 일취월장하여 성장했다. 청룡처럼 강해질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엘런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청룡의 말은 백호에게 있어 청천벽력이었다.
어쩌면 강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정과 부정을 품은 불안감을 백호는 태어나 처음 느낀 것이다.
어쩌면 주인님과 청룡이 특별한 것은 아닐까?
“으으으.”
백호는 감기몸살에 걸린 것처럼 달달 떨렸다.
“또 시작이군.”
청룡이 이젠 익숙하다는 듯이 말했다.
반면 백호는 진정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두통을 느꼈다.
“강해지고 싶다. 강해지고 싶어. 저 사람처럼 되고 싶지 않아.”
이번 여행이 끝나면 그동안 해 왔던 것보다 수십 수백 배 노력할 것이라고 백호는 맹세하듯이 다짐했다.
엘프 엘렌 덕분에, 이번 어비스 여행에서 강함을 추구해야 할 이유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있는 백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