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06화
“기억 안 나?”
준혁이 묻자 백호가 얼굴을 도리도리 흔들었다.
마치 술 마시고 필름이 끊긴 것처럼 백호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
기억을 잃고 폭주하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다.
백호의 경우 정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잘 관리하면서 성장시켜야 할 듯 싶었다.
“우선 나가자.”
준혁은 최설화와 백호를 데리고 던전핵을 파괴했다.
게이트를 통해 밖으로 나오자 지우 옆에 예정에 없던 인물이 있었다.
파천 길드의 마스터 직을 맡고 있는 백인호였다.
준혁을 보고 백인호가 깍듯이 인사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지우도 말 없이 꾸벅 인사하곤 백호를 데리고 둘 사이를 빠져 주었다.
“던전에 들어가 바로 보고를 드릴까 하다가 시간상 곧 나오실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데?”
“일본 협회에서 귀환자님을 찾았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게 굳이 던전 앞까지 찾아와야 할 문제였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
“캐슬 앞의 상황입니다.”
백인호가 기자들이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사진에는 협회장 키무라 겐지와 간부진들이 석고대죄라도 하듯이 캐슬 앞을 점거하여 무릎을 꿇고 있었다.
“……뭐하는 짓이야 이게?”
준혁이 황당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상황이 급박해졌습니다. 일본에서 게이트 조짐으로 보였던 비석이 그동안 유례없는 형태로 진화했습니다.”
백인호가 미리 준비한 자료를 보여 주었다.
일본 시부야의 상황이었다.
끔찍했다.
재해가 휩쓸어간 흔적이 고스란이 남아 있었다.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 같았다.
끊임없는 폭탄 투하가 이루어진 듯 건물들은 무너져 있었고 땅은 뒤집어져 있다 시피 했으며 지옥이 도래한 듯 경계를 섰던 헌터들은 돌처럼 굳었다.
그리고 비석은 피를 빨아먹듯이 돌로 변해 버린 헌터들의 마나를 삼키고 있었다.
“게이트, 이거 확실히 열린 거야?”
준혁이 자료를 보며 물었다.
“그게, 아직 일본 측에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 제대로 비석의 반응에 대한 분석이 되고 있질 않아서 그런 듯합니다.”
“마음만 급한 거네.”
“캐슬로 바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우선 호텔로 모실까요.”
“바로 캐슬로 가야지. 선우는?”
“캐슬 부근에서 귀환자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선우한테 우선 날짜 잡고 캐슬 앞 좀 치우라고 해.”
“아무래도 귀환자님이 오셔야 자리가 정리될 것 같습니다.”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얘기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으로 데려가겠다는 의지였다.
“일단 출발하자.”
준혁이 차에 타고 지우가 운전대를 잡았다.
백인호가 준혁이 타고 있는 차를 뒤따라갔다.
차 안에서 준혁은 옆자리에서 기절한 것처럼 자고 있는 백호를 보았다.
사냥이 지독히도 피곤했던 모양이다.
백호를 잠시 지켜보던 준혁은 일본 협회를 떠올렸다.
‘어지간히 답도 없나 보군.’
한국, 그것도 캐슬 앞에 찾아와 무릎을 꿇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니.
어차피 블랙 던전은 자신이 클리어할 생각이었다.
블랙 던전은 던전 중 최대 난이도인만큼 어비스로 갈 수 있는 균열의 조각을 줄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까.
그렇게 애원하지 않아도 어차피 갈 생각이었으나 일본 입장에서는 상황이 다를 수 있었다.
전에 없던 새로운 재앙으로 던전이 나타난 데다 시작 전부터 헌터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두려움은 배가 되었으리라.
선우가 던전에 대한 계약은 이미 다 준비를 마쳐 놨을 것이다.
‘청룡이 활약할 무대가 다가왔군.’
지금쯤 청룡은 연무장에서 홀로 수련 중일 것이다.
강함을 추구하는 것이 신수의 본능.
청룡 역시, 성장에 목말라 있을 것이다.
그 원을 풀어 줄 무대가 일본에 있었다.
“곧 도착이에요, 귀환자님.”
매니저인 지우가 말했다.
준혁은 창밖을 보았다.
해가 져서 어둑어둑했음에도 캐슬에 이르기 전부터 기자들이 줄을 서 있었다.
준혁의 차량이 도착하니 기자들이 저마다 기다렸다는 듯 셔터를 눌렀다.
어둠 속에서 플래시가 번쩍였다.
뒤이어 곧 차량은 캐슬 입구 부근으로 도착했다.
사진에서 봤던 것처럼 일본의 협회장과 간부진들이 무릎을 꿇고 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거야?”
“제가 처음 소식을 들었던 게 1시니까. 최소 7시간 정도는 됐을 거예요.”
지우가 헤드라이트에 비쳐지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차가 지나갈 수 없도록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사실상 시위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근처에 세울게요.”
지우가 그렇게 말하곤 헤드라이트가 벽면을 비추도록 살짝 틀어 놓은 채로 차를 정차했다.
“내릴 것 없어.”
준혁이 그렇게 말하곤 혼자 차에서 내렸다.
캐슬 입구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일본 협회의 사람들을 보며 준혁은 짧은 한숨을 뱉었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준혁이 목소리를 내자 협회장 키무라 겐지가 벌떡 일어섰다.
간부진들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협회장 키무라 겐지가 준혁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힘을 보태 주십시오, 귀환자님. 지금 저희에겐 귀환자님의 힘이 절실합니다.”
국가의 안위를 위해 꿇은 무릎이었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준혁이었다.
사방에서 절정에 이른 듯 카메라 불빛이 번쩍였다.
지독하다 싶을 정도의 촬영이었다.
“거래는 협회장 마스터와 진행하면 될 겁니다. 그만 길 좀 열어 주시죠.”
키무라 겐지가 놀란 눈으로 준혁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정말 도와주시는 겁니까?”
수색도 시작하지 않은 던전에, 힘을 보태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매너가 아니다.
아무리 전에 없던 상황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귀환자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수 있는 일.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이번 헬퍼 요청을 귀환자는 받아 준 것이다.
“거래가 끝나면 내일 바로 출발하는 걸로 하죠.”
그 말을 끝으로 준혁이 차량 쪽으로 돌아갔다.
키무라 겐지는 즉시 간부진을 일으키곤 길을 터 주었다.
준혁의 차량이 캐슬의 입구를 통과했다.
키무라 겐지와 간부진들이 준혁의 차량을 향해 존중을 담아 목례로 인사했다.
* * *
준혁의 결정이 떨어졌다.
급박한 상황이니만큼 일본은 이쪽의 모든 제안을 수락해야만 할 것이다.
선우는 이미 준혁이 캐슬에 도착하기 전에 거래 제안서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간 여러모로 안 좋은 그림이 펼쳐질 여지가 있었다.
준혁을 믿는 이상, 이번 일은 고민해 본 결과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맞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가장 깔끔했다.
“협회장님, 키무라 겐지의 전화입니다.”
“넘겨.”
비서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협회장실 전화로 알림이 울렸다.
- 키무라 겐지입니다.
“한선우입니다.”
-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상황이 급박하여 무례하게 군 점을 용서해 주십시오.
“모르는 처지도 아니고 이해합니다. 지금 협회로 오시죠. 거래 조건이 맞으면 귀환자님은 내일 일본으로 출국할 겁니다.
- 감사합니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우는 전화를 끊고 피식 웃었다.
‘이 무거운 사건이 형에겐 어떻게 느껴질까?’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친형임에도 한준혁은 언제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선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거래 계약서를 다시 한 번 체크했다.
* * *
종일 연무장에서 홀로 수련했던 청룡은, 준혁이 돌아왔다는 집사의 말에 캐슬 본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백호 실력이 많이 늘었어. 네가 잘 가르친 덕분이다.”
준혁이 칭찬했다.
“실력이 늘었다니 다행이네요.”
청룡이 건조한 표정, 건조한 어투로, 잠든 백호를 보며 말했다.
중원을 떠난 이후로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는 일이 없는 청룡이었다.
준혁은 그런 청룡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청룡에게는 과거가 있고 새로 적응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지난 과거가 깊은 만큼 당연한 것이었다.
“내일부터는 청룡 네 차례다.”
백호를 보던 청룡의 시선이 준혁에게로 옮겨 갔다.
무슨 뜻이냐는 질문이 청룡이 눈 안에 담겨 있었다.
“던전으로 간다. 네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야.”
던전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경험한 건 백호와 함께 갔던 초보 사냥터뿐이지만 어떤 곳인지는 대강 알 수 있었다.
물론 백호가 다니는 사냥터와는 전혀 다른 곳이겠지만 뭐가 됐든 이제 이세계의 진짜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에 청룡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정 수준부터는 정체되어 있는 무학의 수준을 올리기란 지독히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주인의 힘이라면 답답하게 막혀 있는 벽을 시원하게 부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백호가 성장했듯이, 그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자신 역시 더 강한 무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청룡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서 내일이 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시간은 느리게 흐르리라.
오늘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 * *
일본 측의 걱정과 달리 블랙 던전을 해결하는 데에 지나친 요구는 없었다.
블랙 던전을 클리어하게 된다면 모든 던전 물질은 귀환자의 소유로 넘어간다.
그 일을 대행하는 것이 파천 길드.
지금까지 해 온 흔한 패턴이었다.
추가된 사항이 있다면 입찰 허가권을 추가한 것 정도뿐이었다.
일본은 연신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며 받아들였고, 이로써 귀환자 한준혁은 유럽연합과 일본의 입찰권을 가지게 되었다.
점차 던전 소유권에 대한 확장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일본이 자진해서 귀환자를 향해 무릎을 꿇게 되면서 여론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계약 내용을 공개하면서 일본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준혁의 던전행에 관심이 쏠렸다.
지금은 귀환자를 향한 응원이 줄을 잇고 있었다.
물론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도 적진 않았다.
그중 가장 강한 감정을 내비치고 있는 건 바로 백호다.
“왜 나는 안 데려가는 건데에에에!”
백호가 거실에서 온몸에 힘을 주고 소리 질렀다.
준혁과 청룡, 그리고 최설화는 이미 일본으로 가는 전용기에 몸을 실은 후였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백호는 그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자신만 쏙 빼놓고 일본으로 갔다는 것에 분노한 백호는 지우의 달램에도 불구하고 분노를 참지 못했다.
“으아아아아!”
백호가 사자후를 터트렸다.
“히익!”
집사가 기겁하며 놀라 바닥에 철퍽 엎드려 벌벌 떨었다.
메이드들은 그릇을 놓치기도 했고.
쨍그랑!
캐슬 본관 밖에 있는 일꾼들조차도 사다리 위에서 떨어지거나 귀를 틀어막기도 했다.
지우도 깜짝 놀라 마치 석상처럼 몸이 굳었으나 곧 얼굴이 붉어졌다.
지우가 백호의 엉덩이를 짝! 후려쳤다.
“놀랐잖아!”
지우가 화를 내자 백호는 소파로 훌쩍 점프했다.
“끄앙~!”
백호가 쿠션에 얼굴을 처박고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야말로 캐슬이 떠나갈 정도로 서럽게 울고 있는 백호였다.
지우가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한숨을 내쉬는 동안, 집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일어섰다.
메이드 직원들이 눈치를 살피며 거실을 내다보았다.
“안 데려갈 만하니까 안 데려간 거지! 그걸 가지고 울면 어떡해! 그리고 너 때문에 다들 놀랐잖아. 사과드려 얼른!”
천사같던 지우가 화를 내자, 잠시 울음을 멈췄던 백호가 다시 쿠션에 얼굴을 파묻었다.
“끄앙!”
지우의 이마에 혈관이 부풀었다.
“당장 뚝 안 그쳐? 오늘 재밌는 곳 데려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지우가 팩 몸을 돌리자 백호가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달려갔다.
“지우 뉴나.”
백호가 눈물범벅이 된 채 지우의 발목을 잡았다.
“잘못했떠. 한 번만 봐줘. 흑흑. 안 그르께.”
“캐슬 직원분들한테 사과하고 안 찡찡댈 거지?”
백호가 우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 인형 같은 얼굴이라 울어도 예쁜 외모였다.
지우는 피식 웃고는 집사와 메이드들을 보았다.
구경하던 집사와 메이드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지우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백호 길들이기는 전담사육사 못지않은 실력의 지우였다.
지우가 집사와 메이드에게 찡긋 윙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