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02화
사수 애꾸눈의 말이 칼로 자른 듯 뚝 끊어졌다.
뒤늦게 비석의 변화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정체 모를 비석에서 검은 연기가 조금씩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주 느린 속도였지만 그것은 점차 용오름처럼 하늘을 향했다.
마치 탑처럼 쌓이듯이 올라가는 연기는 끊임없이 위로 솟아올랐다.
마침내 검은 연기가 구름에 닿았을 때.
콰르릉!
천둥이 쳤다.
애꾸눈과 부사수는 물론, 비석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든 헌터들이 화들짝 놀랐다.
소리 자체는 평범한 천둥이었으나, 정체불명의 비석이 만들어 낸 소리인 만큼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것이다.
후두둑!
빗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맑았던 하늘은 거짓말처럼 삽시간에 먹구름으로 변해 갔다.
컴컴한 하늘에서 장대비가 내렸다.
헌터들은 우산을 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은 먹구름 사이로 붉은 불빛이 마치 조명처럼 하늘을 은은하게 밝혔다.
“문뜩 든 생각인데 말이야.”
애꾸눈이 하늘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예?”
“고향에 가고 싶다. 지금 당장.”
부사수가 웃었다.
“저도요. 같이 도망갈까요, 우리?”
“난 여자 친구 있어, 인마.”
부사수의 얼굴이 날씨만큼이나 흐려졌다.
“아무래도, 곧 게이트가 열릴 모양이다.”
애꾸눈의 말에 부사수가 굵은 침을 꿀꺽 삼켰다.
게이트가 열리면 수색조가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원칙이다.
아무리 범상치 않은 상황 속에 열린 던전이라 하더라도, 외국에 헬퍼 요청을 하기 전 자국 내에서 던전 수색을 마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애초에 규칙 따위 무시하고 한국의 귀환자에게 이미 사인을 보냈지만 아직까지는 답변이 없는 상태.
이대로라면 게이트가 열린 후,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수색조의 임무를 맡아야 했다.
“저 미리 말하는데, 수색조 걸리면 뒤도 안 돌아보고 튈 겁니다?”
부사수가 진심을 꾹꾹 담아 말했다.
“그러든지.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밥줄 끊기는 건 매한가지지.”
“S급 헌터들, 와 주겠죠?”
“S급 헌터들이 아니라 귀환자가 와야지. 귀환자가 안 오면 다 죽는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 편해.”
“안 편한데요.”
“우산이나 가져와.”
“……예.”
애꾸눈은 장대비를 맞으면서 비석을 주시했다.
비석을 통해 수많은 헌터들의 죽음이 눈앞으로 그려지는 듯했다.
귀환자가 없다면 해결할 수 없는 국가 재난 사태.
무력감이 가슴을 뜯어먹는 듯했다.
그건 비단 애꾸눈 자신뿐만이 아니라 시부야의 비석 주변을 경계하는 헌터들 모두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다.
* * *
“일본에서 지속적으로 콜을 보내오고 있어. 대기해 달라는 거지. 게이트가 열리기 전부터.”
선우가 서재의 화려한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책 몇 개를 테이블에 놓은 준혁이 걸음을 옮겨 선우의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선우가 말을 이었다.
“일본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형의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문제니까. 형은 신수도 키워야 하잖아. 듣기론 던전 사냥을 통해서 성장시켜야 한다고 들었어. 형에겐 중요한 문제겠지.”
“어차피 던전으로 들어가려면 게이트부터 열려야 하니까. 서두를 필요야 있나.”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건넸다.
“백호가 단계적으로 갈만한 던전들을 준비했어. 생각보다 던전 돌파 속도가 굉장한데?”
“나도 기대 이상이라 놀랐다.”
“괜히 신수가 아닌 거지. 애초에 사람 모습을 한 신수라니.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만약 일본의 블랙 던전에 내가 가게 된다면, 그땐 청룡도 데리고 갈 거야.”
“청룡을?”
선우는 청룡의 전투를 떠올리곤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벤자민을 이긴 청룡이니 위험할 것도 없겠네.”
“오히려 청룡의 성장에 날개를 달게 되겠지.”
“누군가에겐 재앙이고 누군가에 기회가 된다니. 얼마나 다행이야? 형이 없었다면 일본은 선택지는 없었을 거고, 재앙은 피할 수 없었겠지.”
“던전이 열리고 각성자가 생긴 것처럼 답은 늘 있다. 너무 편한 생각으로 치우치진 마.”
“그러고 보면 점점 형한테 의지하고 있긴 하네. 나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전 세계가.”
“좋은 방향은 아니야.”
선우가 동의한다는 듯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더보드 최상위 순위권의 헌터들의 움직임은 여전히 파악이 안 되는 거지?”
준혁이 물었다.
“아무래도 자국 내의 보호가 우선일 거고, 성향 자체가 뭉치지 않는 사람들이다 보니 일본으로 모일 가능성은 적어 보여.”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준혁이 뭔가를 떠올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설마 지금 리더보더들한테 블랙 던전을 빼앗길까 봐 걱정하는 거야?”
“전혀 가능성이 없진 않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것이다.
귀환자가 자신의 친형임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선우는 충격에 휩싸이곤 했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대화를 자주 나누게 되어서였다.
“일본에 게이트가 열릴 경우, 형이 나서는 조건으로 계약서를 작성할게. 내일 중으로 일본에 전달될 거야.”
“아마 당분간은 던전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을 거야. 무슨 일 생기면 사람 보내 주고. 던전 안에선 스마트폰은 먹통이니까.”
선우가 빙글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 신수의 폭렙인가?”
준혁은 풋 웃으며 서류에 나와 있는 던전을 보았다.
선우의 말대로 백호의 먹이로 최적의 조건들이었다.
* * *
청룡은 백호를 수련시키기 위해 녀석을 데리고 연무장으로 왔다.
마법이 존재하고, 마물들이 들끓는 신기한 세상.
고도의 문명 발달의 신세계.
이곳에서, 주인의 힘에 의해 신수는 성장한다.
청룡은 연무장의 중심에서 백호를 응시했다.
백호는 던전이라는 곳을 다녀온 이후로 성장했다.
힘과 속도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단순히 마수를 잡은 것만으로 강해진 것이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 수가 있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없으나 강해질 수 있다는 진실이 자신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쩌면 그토록 꿈꿔 왔던 현경의 고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욕심이 벌써부터 심장을 뜨겁게 만든다.
‘주인님과 함께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청룡은 백호의 본능에 의거한 공격들을 한 손으로 쳐 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곧 기회가 올 거라고 했었다.’
그때까지 백호를 성장시키면서 청룡 자신 역시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강해질 수 있는 길에 오를 수 있도록.
청룡은 아주 작은 미소를 입가에 걸며 백호를 보았다.
“그 전에 우선 너부터 제대로 성장해야 해.”
내일부터 본격적인 던전 사냥을 통해 백호는 점차 강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준비를 마치게 되는 언젠가, 주인의 뜻이 펼쳐지리라.
청룡은 그 순간을 위해 칼을 갈고 또 갈 것이었다.
늘 그래 왔듯이 강함의 척도인 주인 한준혁을 따라가기 위해.
천마가 아니라 신수 본연의 근본을 찾아 준 주인.
그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백호, 너도 주인님을 실망시켜선 안 돼.”
“크오오옹!”
청룡을 향해 백호가 스킬 백호참과 화룡참을 난사하듯이 펼쳤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청룡이 잔상을 남기며 움직이고선 백호의 복부에 손바닥으로 장을 찍었다.
쿵.
백호가 헛바람을 삼키며 훌쩍 허공을 날아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우으윽!”
백호가 괴로워하며 꿈틀거렸다.
“어리광은 거기까지다, 백호.”
백호가 침을 흘리며 일어서기 위해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까지의 전투 스타일은 그저 제멋대로 휘두르는 막무가내일 뿐이었다.
제대로 된 무술을 가르친다면 백호의 성장 속도는 훨씬 더 그 배가 되리라.
“내가 가르쳐 주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넌 강해질 수 없다. 강해질 수 없으면, 주인님에게 인정받지 못해.”
청룡의 말 중, 주인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는 말이 강한 울림이 되어 백호를 흔들었다.
“강해질 거야. 나도. 청룡 형처럼!”
백호가 충격 때문인지 어눌한 말투로 말했다.
“그럼 배워라. 진짜 힘을.”
백호가 가쁜 숨을 내쉬며 청룡 앞으로 다가갔다.
“어, 어떻게 하면 되는데?”
백호가 순수한 눈빛으로 청룡을 보며 물었다.
제대로 배우겠다는 의지가 백호의 눈 안에 박혀 있었다.
그동안 일부러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우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고 벽을 느끼게 만든다.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벽.
그리고 그 벽을 느꼈을 때 방법을 제시하게 되면 귀는 열리게 된다.
배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백호의 수준을 고려하면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강해지고 싶지?”
백호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나도 강해져야 해. 강해져서 주인님이랑 청룡 형아도 지킬 거야.”
“우선은 기본부터다. 첫걸음부터 확실히 배워. 수련과 던전에서는 장난기를 버려. 주인님이 항상 너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는 걸 잊지 마.”
백호가 비장한 표정으로 몸에 힘을 주었다.
“응!”
“마력을 쓰기 전에 신체부터 활용할 줄 알아야 해. 팔을 쓰려면 허리부터 쓰는 법을 알아야 한다.”
청룡이 차근차근 기초부터 알려 주기 시작했다.
백호는 그렇게 청룡과 함께, 늦은 시간까지 밤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수련에 열중했다.
* * *
“상태가 왜 이래?”
준혁이 침대 위에서 끙끙 앓고 있는 백호를 보며 물었다.
“그게, 어제 청룡이랑 밤새 연무장에서 수련을 했나 봐요.”
지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눈 떠라, 백호.”
준혁이 명령했지만.
“으게게게…….”
백호가 병든 닭처럼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냈다.
대략 살펴보니 꽤 고강도의 훈련이었던 듯 근육이 뭉쳐 있는 데다 손톱이 깨져 있었다.
마력의 보호를 받는, 무엇보다 손가락에 발톱의 힘을 가진 백호가 이 정도라면 훈련의 강도는 굳이 상상해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일지 알만 했다.
“열정까지 있고.”
준혁이 피식 웃으며 백호를 향해 말을 이었다.
“이렇게 타고났을 줄이야.”
“저 귀환자님, 그럼 오늘 던전은 패스하는 건가요?”
지우는 백호가 모처럼 휴일을 보내길 바랐지만.
“아니.”
준혁은 냉정했다.
“최설화 힐러를 데려와.”
지우가 식은땀 한 줄기를 흘리며 백호의 방에서 나왔다.
청룡 못지않게, 준혁 역시도 무자비한 스승이자 주인이었다.
* * *
정순한 마력에 의해 새하얀 가루 같은 것이 반짝반짝 떨어져 내린다.
마치 눈처럼 떨어져 내린 마나의 힘이 백호의 전신에 스며들었다.
눈이 풀린 채로 갸르르 소리를 내며 축 늘어져 있던 백호가 조금씩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초점 없던 눈동자는 서서히 또렷해지고 뭉쳐 있던 근육은 부드럽게 풀리면서 외려 더욱더 단단해진다.
세계 정상급 힐러, 최설화의 힐이 만들어 낸 마법이었다.
백호가 벌떡 일어나더니 양팔을 치켜세웠다.
“부화아아아알!”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우, 그리고 최설화와 집사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백호의 말대로 힐 치료에 의한 완전한 부활이었다.
백호가 100퍼센트의 컨디션을 회복하곤 침대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경쾌한 몸놀림이었다.
“크옹! 주인님은요?”
“그 전에 힐러님한테 감사 인사부터 해야지?”
지우의 강한 힘이 담긴 말에 백호가 뚱한 표정으로 최설화를 보았다.
백호는 뒤통수를 긁적이곤 꾸벅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