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의 모든 것 101화
지우는 백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배, 백호야……!”
그도 그럴 것이, 백호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다시피 하고 있어서였다.
“히이.”
피를 뒤집어쓴 채로 기분 좋다는 듯 웃고 있는 백호를 보자 살짝 무서울 정도였다.
지우는 얼른 수건을 갖고 와 백호에게 묻은 피를 닦았다.
대체 얼마나 피를 많이 묻힌 건지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었다.
“코볼트의 피입니다.”
청룡이 말했다.
“그, 그래? 다행히 잘 해치웠나 보네.”
“생각보단 적응이 빠르네요.”
지우는 그저 애완동물처럼 아기 같던 백호가 이렇게 던전에서 사냥을 하고 점차 마수 사냥에 익숙해져 간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했다.
“그냥 꼬마 백호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잘 클 줄은 몰랐어. 정말.”
지우는 백호에게 묻은 피를 웬만큼 닦아 낸 후, 청룡에게도 새로운 수건으로 마수의 피를 닦아 주었다.
청룡이 그 손길에 살짝 놀랐지만 이내 잠자코 있었다.
준혁 때문이었다.
“넌 어쩌다가 피가 묻은 거야?”
지우가 알기로 청룡은 전투를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게다가 실력은 백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강한 수준.
지우가 의아해하며 묻자 청룡이 백호를 가리켰다.
“저 멍청이가 자꾸 엉겨 붙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죽을까 봐 확 갖다 던져 버릴 수도 없고.”
청룡의 살벌한 언행에 지우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백호가 청룡의 머리를 깨물고 놔주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지우는 백호를 한심하게 보며 잔소리하는 청룡을 보면서 웃음 지었다.
말투는 차갑지만 은근히 백호의 성격을 잘 받아 주는 착한 아이였다.
물론 청룡의 과거를 전혀 모르는 지우의 생각이었지만.
“돌아가자.”
전화 통화를 하고 돌아온 준혁이 말했다.
지우가 문을 열어 주었고 준혁이 차에 탑승하자마자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배고파아아아아아!”
백호가 배를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백호야.”
지우가 백호의 뺨을 잡아당기자 백호가 기력 없이 축 늘어진 채로 차 안으로 들어갔다.
한 바탕 전투를 해서 그런지 캐슬로 돌아가는 길. 백호는 그대로 골아떨어졌다.
널브러진 자세로 정신없이 자고 있는 백호를 곁눈질로 보면서 지우는 웃음을 참았다.
“사냥을 하면서 주인님이 뭔가를 하는 듯했는데 백호와 관련 된 겁니까?”
청룡이 물었다.
“맞아. 스탯 포인트를 찍어 주고 있거든.”
“……스탯 포인트?”
준혁이 스탯 포인트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상태창의 전투력을 보고 스탯을 하나하나 설정해 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자 청룡은 깜짝 놀랐다.
성장이 주인의 통제하에 그 정도로 디테일하게 진행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워서였다.
“그런 게 없었다면 내가 움직일 필요도 없이 백호를 청룡 너에게 맡겼겠지.”
청룡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주인이 자신을 신뢰해 주고 있음이 분명하게 느껴져서였다.
“청룡 너 같은 경우엔 스탯 포인트는 보이지 않지만 내가 설정해 줄 수 있는 부분들이 생겨날지도 몰라.”
“그렇습니까?”
“너 역시 빠르게 클 거다.”
준혁이 청룡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청룡은 무표정한 얼굴로 산발이 됐다.
“귀환자님, 제가 청룡 머리 좀 잘라 줘도 될까요? 제가 또 미용도 재주가 있거든요.”
준혁이 놀란 표정으로 웃었다.
“이지우 매니저는 못하는 게 없네.”
“제가 좀 그런 편이죠. 후훗, 룡아. 우리 집에 가서 머리 자르자?”
“머리가 아니라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 아닙니까? 조금 놀랐습니다.”
“응? 아, 그, 그렇지. 당연히 머리카락이지. 그런 무서운 말을. 하하.”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정리가 조금 필요했는데.”
현재 청룡의 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굉장한 장발이었다.
평상시라면 문제가 될 게 없었지만 자꾸 달려드는 백호 때문에 긴 머리가 조금씩 관리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묻어나는 건지 머리카락에 하얀 털이 묻어났다.
청룡이 참 귀찮은 놈이라는 듯이 백호를 힐끔 쳐다보았다.
백호는 세상 모르게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흐야암, 백호…… 참! 흐얌.”
꿈속에서도 사냥을 하고 있는 백호였다.
청룡이 피식,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웃음을 흘렸다.
* * *
캐슬로 돌아오자마자 청룡은 먼저 샤워부터 했다.
그사이 백호는 밥부터 먹고 싶다며 난리를 피웠는데, 집사와 메이드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힘이 얼마나 센지 욕실로 등 떠밀어도 꼼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완강한 백호였지만 준혁의 딱밤 한 방에 조용히 울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동그랗게 부어오른 혹을 문지르면서 백호는 욕조 안으로 풍덩 들어갔다.
백호는 이마를 문지르며 훌쩍였다.
분명 살짝 때린 건데도 불구하고 눈앞에 불똥이 튀면서 별이 번쩍이는 듯했다.
“주인님 무서워.”
백호가 흑흑 울면서 비누칠을 했다.
제대로 씻지 않으면 주인님에게 혼날까 봐 무서워서였다.
꼼꼼히 샤워를 마치고 난 후, 백호는 욕실에서 나왔다.
집사가 웃으며 다가와 머리를 닦아주었다.
“집사님, 청룡이 형 뭐 하는 거예요?”
백호가 캐슬 정원 마당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우가 청룡의 머리를 만져 주고 있었다.
“이발을 하고 있는 거란다.”
집사가 백호의 머리카락을 잡아서는 슥슥 비볐다.
“요런 머리카락을 잘라서 깔끔하게 정돈하는 거지.”
백호가 호다닥 뛰어가 거실 통유리에 찰싹 붙었다.
“오오, 신기해.”
별게 다 신기한 백호였다.
“백호 밥 안 먹니?”
메이드 팀장의 물음에 백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밥! 바아아아아아압!”
백호가 잠시 잊고 있었다는 듯 다이닝 룸을 향해 질주했다.
“천천히 다녀, 천천히.”
지나가는 준혁의 한소리에 백호는 끼익! 멈추고는 거북이처럼 살금살금 뒤꿈치를 든 채 걸었다.
“하여튼 오바는.”
준혁이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준혁의 입장에선 백호가 오바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백호는 그게 아니었다.
정말로 준혁의 눈치를 보고 극단적으로 말을 들었던 것뿐이었다.
“백호가 기죽을까 걱정입니다, 귀환자님.”
집사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적당히 눌러 줘야지, 이래서야 어디 캐슬 직원들 일이나 보시겠어요.”
집사가 입을 가리며 하하 웃었다.
준혁은 미용을 하고 있는 청룡을 보았다.
캐슬 정원에서 지우가 머리를 잘라주고 있는 뒷모습은 꽤 보기 좋은 그림이었다.
다만 저 녀석이 무려 천마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낯선 그림이었다.
청룡이 필사적으로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누군가가 말해 주지 않아도 충분히 준혁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귀환자님, 한선우 협회장님이 곧 도착하십니다.”
집사가 전달했다.
선우가 탄 차가 캐슬 입구를 통과했다는 얘기였다.
캐슬로 선우가 온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일본의 던전화 현상에 대한 문제로 캐슬에 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 * *
협회에서 차출된 일본 헌터들이 비석 주변에서 경계 근무를 섰다.
언제라도 이상 상황이 발생하면 대응하거나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비석은 시간이 흐를수록 마치 고속카메라로 촬영한 식물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비석은 마치 가습기처럼 검은 연기를 풀풀 뿜었다.
분석 결과 특별히 인간의 육체에 영향을 끼치는 연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연기 형태의 던전에 의해 큰 사고가 나기도 하고 최근 벤자민 사건 때문인지 경계를 서고 있는 헌터들은 하나같이 극도의 긴장 상태에 있었다.
세계 상위 랭커들조차 갈려 나간 블랙 던전의 등장이 있었던 만큼 현재 일본 시부야의 비석은 공포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대체 어디까지 커지는 거야, 이건?”
비석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애꾸눈의 사내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비석은 벌써 꼬마 건물만 하게 커져 있었다.
비석의 중앙에는 뜻 모를 룬 문자가 새빨갛게 새겨져 있었다.
비석 표면의 갈라진 균열 사이로는 마치 피처럼 붉은 액체 같은 것이 반짝였다.
마치 지옥의 한 형상을 옮겨 온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저 비석 보고 있으면 말이에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지 않아요?”
부사수 헌터가 비석을 보며 말했다.
“자식 없다고 비석 부근으로 배치받는 게 말이나 되나. 젠장 결혼 안 한 미혼은 죽어도 된다 이거야 뭐야? 안 그러냐?”
애꾸눈이 한술 더 해서 불만을 투덜거렸다.
“쩝. 귀환자님이 대기만 해 주셔도 든든할 것 같은데.”
부사수가 스트레스로 인해 홀쭉해진 얼굴로 말했다.
사수의 말대로 비석 부근에 있는 것만으로도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었다.
비석은 마치 곧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풍선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
그 기약 없는 공포감이 주변을 지배하고 있다.
“지금까지 다 던전이었잖아. 갑자기 형태가 변할 리야 있겠냐? 게이트부터 열겠지. 어차피 들어가지만 않으면 죽을 일은 없어. 너도 그래서 군말 없이 온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게이트 발생 시 파장 위험도 있고…….”
“이미 프로텍트 설치 다 끝났는데 뭔 소리야. 나름 큰돈을 발랐으니, 게이트 임펙트 정도야 문제는 안 되지. 겁먹지 마라.”
“저희한테 진입하라고 수색조를 맡기진 않겠죠?”
현재 비석 부근에서 대기 중인 헌터 병력은 나름 고급 인력이었다.
최소 A급의 헌터들이었는데 이는 보여 주기 식으로 상위 헌터들을 배치시킨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굳이 A급 이상의 헌터가 필요하진 않았다.
“S급도 갈려 나갈 판에 우리보고 들어가라는 게 말이나 돼? 아닐 거야. 암, 아니어야 하고말고.”
“……그렇지만 헌터가 없잖아요. 솔직히 우리야 돈 때문에라도 현장에 뛰어야 하지만. S급들은 이미 건물주들이 태반인데 던전에 들어가려고 하겠어요? 만만한 우리를 건드릴까 봐 겁나는 거지. 저 말고도 다들 하는 생각입니다.”
“듣고 보니 불안하네. 너 왜 자꾸 사람 불안한 게 만들어?”
“미리 생각을 해 보자는 거죠. 개죽음당하기 전에.”
“네 말대로 귀환자가 온다면 기운이라도 확 날 것 같은데. 이것 참 사지가 따로 없네.”
애꾸눈이 비석을 보며 넌덜머리를 냈다.
점차 덩치가 커지고 있는 비석에서는 묘한 마력의 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힘은 심상치 않아서 이미 던전에 들어가기 전부터 기세가 절로 꺾인다.
엄청난 에너지라는 게 본능적으로 몸이 알고 있는 듯 했다.
비석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따갑고 이따금씩 소름이 돋았다.
마치 몸살감기에 걸린 것처럼 으슬으슬 추워질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에 귀환자님이 시부야로 와 줄까요?”
“분위기로 봐선 귀환자님이 안 오면 답이 없어. 아포칼립스의 명운이 한 남자에게 걸려 있는 거지. 뭐 리더보더들이 한 번에 세력을 만들어서 모여 주면 모를까. 그런 일이야 있겠어? 그저 한국이, 아니 귀환자가 도와주기를 바랄 뿐이지.”
“하…… 친구가 한국으로 떠나 있자고 할 때 갈걸.”
애꾸눈이 부사수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야, 인마. 무섭다고 나라를 버려? 네가 그러고도 헌터냐?”
“개죽음이니까 그렇죠.”
“으흠.”
애꾸눈이 괜히 헛기침을 하곤 비석을 주시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남아야 해.”
“참 애국심도 대단하십니다.”
“애국심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거다, 이 꼬맹아.”
“어……?”
부사수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응? 또 왜?”
“뭔가 이상한데요?”
“뭐가? 아직 별로 다를 것도…….”